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51 - 속이지 말고 거둬들여야 한다. 한국고문연구회장 변시연, 2008

향토학인 2016. 6. 3. 03:40

인지의 즐거움 051

   (20000801)

 

속이지 말고 거둬들여야 한다.

-길이 있는 만남 ; 한국고문연구회장 변시연-

 

김희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일까. 명예, 재산, 권력?? 몇가지 단어를 떠올려 보아도 고개가 자웃해진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만남”. 흔한 일상사이겠거니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만남과 인연되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이다.

 

  장성 북하면 단전리 손룡정사에서 여전히 서책과 함께 글을 대하고 계시는 산암 변시연선생. 한국고문연구회회장. 다른 여러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잘 알려져 있고, 그간 이룩한 업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러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긴장된 적도 없었다. 선학의 학문세계와 인생살이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글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하여 자주 인사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

 

“구방심”하고 “무자기”한다

 

  산암선생에 있어 “만남”의 의미는 각별하다. 인사를 나눈 뒤 반드시 성명, 본관, 생년, 주소 등 인적사항을 손수 적는다.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다. 열아홉살 전후부터라고 하니 벌써 60여년을 계속해 온 셈이다. 우리 일행도 신고식을 치루었다. 동행한 이종국기자, 정경성 도청 학예연구사, 5명의 목포대 대학원(기록관리학과, 사학과) 학생들(안대희, 이재근, 서명균, 이재훈, 고정서). 마침 경주이씨가 두명이 있어 성암공파와 익재공파라 하니 ‘성암이 익재 큰아버지여‘라 하면서 그 내력을 설명해 준다. 평생을 이렇게 정리하게 된 것은 어떤 인연에서일까. 만날 때마다 궁금하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정사에 두루 걸린 액자를 보니 무자기 無自欺, 구방심 求放心, 구무실 求毋室, 삼지 三知가 눈에 띠었다. 저 속에 담긴 의미를 듣다보면 그 궁금증은 풀릴까.

 

  “한번은 이리에서 대학생, 학부모, 향토사가들이 40여명 방문했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한 것 없냐고 하니 묵묵부답이었어.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어서인지, 그냥 그래서인지, 반응이 없어 서운해하던 차에 유일한 질문이 있었어. 그것도 부모를 따라온 중학생이었어. 바로 구무실 求毋室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어. 이제 두 번째로 그 질문을 듣는구먼.”

 

  카랑 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시다. 1922년 장성읍 안평리에서 태어났으니 80을 앞두고 있다. 세상사람들의 무관심에 대한 질타를 하시는 것 같다. 서로가 만났기 때문에 선현의 말씀이며 서책의 내용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고마운 줄도 모르고 심지어 왜 서로가 만났는지 생각지도 않은 세태를 탓했던 것일까.

 

  “사람마다 태어날 때 타고난 양심이 있어. 살다가 여러 가지 욕심에 빠져 나빠지게 되지. 그러니 흩어져버린 본래의 양심을 구하라는, 찾으라는 것이 구방심 求放心이야. 그 양심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해. 그것이 무자기 無自欺야. 구방심하고 무자기한다는 뜻에서 이 방을 구무실 求毋室이라 한거야. 또 삼지 三知라는 것은 분수를 알아야하고(知分),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知足), 그칠 줄 알아야 한다(知止)는 것이야. 지금 세태를 봐. 속이고 싸우고 끝없는 욕심에 어지럽지 않아. 만족하고 그쳐야지. 속이지 말고 거둬들여야지.”

 

  손룡정사 본채는 3칸집이다. 가운데 칸을 구무실이라 하고 양켠을 낙낙당 樂樂堂과 취봉당 聚鳳堂이라 했다. 낙낙당이란 논어에 나오는 ‘벗이 있어 먼 곳에서도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라는 구절에서 이름했다고 한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만남을 소중히 하는 그 깊은 뜻을. 어디서 찾아오든 봉황으로 생각하고. 만나니 즐거웁고.

 

서른 여섯에 시작한 고문 편찬

 

  언젠가 호남향사회라는 향토사 모임에 관계하면서, ‘전남지방의 향토사연구’를 특집으로 회보를 낸적이 있다. 향토 연구자의 활동을 정리하는 난이 있었는데 산암선생에 대한 정리를 필자가 맡았다. 그런데 그때는 얼마나 선생님을 대하기가 어려웠던지 면담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뵙지 못하고 정리하여 책자는 발간되었다. 1993년의 일이다.

 

  그 뒤 도청에서 문화재위원회가 끝나고 조심스럽게 책자를 전해드렸다. 다음날 아침 전화를 받았다. “자네가 전해준 책은 잘 읽어보았네. 소개한 12사람 가운데 제일 자세하더구만. 나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한 것 같은데, 한번쯤 찾아오지 그랬나.” 하면서 단어 하나, 표현 하나 하나 짚어 주시면서 의미를 깨우쳐 주고 틀린 곳은 바로잡아 주셨다.

 

  선학의 활동을 다룬다는 것 자체도 벅찬 일인데 면담도 하지 않고 정리하여 발간한 책을 드렸으니 호통을 칠 법하여 식은땀이 흘렀지만, 오히려 자상한 가르침에 더더욱 몸둘 바를 몰랐다.

 

  그 때 책자의 마지막에 “선생은 삼지론 三知論을 실천하고 있으며, 스승인 겸산 홍치유선생이 강조했던 스스로 속이지 말고 방치된 마음을 거둬들이자(無自欺 求放心)는 가르침을 받들어 오고 있다.”라고 마무리했다. 헌데 그 자세하고 깊은 뜻은 이제서야 알 수 있었고, 한번 정한 좌우명을 평생동안 간직한 실천적 삶에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지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동문화연구회의 조상열회장도 산암선생의 주선에 의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 또한 후학을 아끼는 큰 가르침이었다.

 

  선생의 업적은 고문의 편찬과 저작에 있다. 1957년 호남문원편간회를 결성하고 통문을 돌리자 많은 자료가 들어왔다. 한국전쟁기에 수없이 많은 고문서와 전적이 잿더미가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던 차에 그 편간 목적에 찬동하여 너나 없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그렇게 호응이 클 줄 몰랐어. 다 타버리고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전국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 문원편간회로 확대했어. 1987년까지 <문원 文苑>73권을 편찬했어. 수록인원만 2천명이 넘고 글은 6천 7백편이야. 뒤에 누군가 계산해 보고 글자 수는 5백 38만 5천자 정도 된다고 해. 그런데 편찬된 그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선현들과 만날 수 있었고, 그 얼과 학문세계를 이어가려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거야. 그분들과 지금도 교유하고 있어. 그 글은 지금도 읽고 있어. 앞으로 누군가 이 책자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해.”

 

  서른 여섯에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수단을 받아야 하니 서울에 많이 올라갔는데, 10여년을 허스름한 여관 한곳에서만 지냈다. 그가 가면 여관은 문전성시였고 항상 여관집 주인과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이 책이 편찬되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제1차 세미나를 할 때 주제로 선정하는 등 전국적으로 고문수집과 조사연구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의 유명대학에도 기증하였다. 한국학의 뿌리를 알려준 셈이다. 요즈음의 용어로 “벤처기업”이라 할만하다. 물론 수익성은 떨어지지만, 개척자적 도전정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고문적 출판사상 개인저서로는 최대규모이며 ‘서거정 徐居正의 <동문선 東文選>에 견줄만한 금자탑이자 한국학의 총결산’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던 대규모 문헌편간 사업을 해낼 수 없었을 테니까.

 

  자료를 보러 서재에 들어서다 그 도전정신의 일면을 엿 볼 수 있었다. 분용실 憤勇室이란 서재의 당호를 접하고서이다.

 

  “발분망식 發憤忘食이란 말이 있지. 무슨 뜻인지 알아? 분발하여 끼니까지 잊고 노력함을 말해. <논어> 술이편에 나와. 거기다가 용기가 있어야 해. 그렇게 해야 공부할 수 있어. 안색이 희노래지도록 해야지. 코피가 터지도록 말이야. 그래야 깨우칠 수 있어. 글을 쓸 수 있어. 하여 분용실이라 했지.”

 

  거기에 몇 말씀을 보탰다.

 

  "그런데 말이야. 용기만 있으면 안돼. 예의를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난폭해지고 세상만 어지러워져. 그래서 勇而이나 無禮인則 亂이라 했어 <논어> 태백편에 있어. 또, 지와 인과 용 세가지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할 덕목이기도 해. 知仁勇 三者는 天下之達德也라는 거야, <중용>에 있어. 뜻을 알겠어“

 

  발분하고 용기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禮義, 지인 知仁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은 정해진 이치야

 

  산암선생은 고문편찬 외에도 개인저작도 많다. 회갑을 맞아 그간 썼던 글을 모아 <이지록 而之錄> 11권에 담았다.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에서 따 명명한 것이다. 1985년에는 <역호설 亦乎說> 13책, 1986년에는 시집인 <학언지 學言志> 1책, 1988년에는 <상류고 桑楡稿> 7책, 그 후 <속 상류고> 9책, 손룡정사로 이주 한 뒤 지은 글을 모은 <손룡초 巽龍草> 등 48책에 달한다. 1년 1권꼴의 저작이다. 모두가 한문체인 점에 비추면 평생 글만을 쓰셨다해도 허언은 아닐성 싶다. 최근의 정보화시대라는 추세에 맞춰 한국학술정보에서 데이터 베이스작업을 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선생님의 저작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 이 역시 한학자는 고루하다는 일반의 인식과는 동떨어지는, 개척정신이다.

 

  한국고문연구회에선 1년에 한 권씩 <고문연구>라는 회지를 내고 있다. 12권까지 냈다. 전남지역의 글을 모아 편찬한 적도 있다. 미간행 문집의 영인사업을 1986년부터 4년에 걸쳐하였다. 전라남도가 지원하였다. 모두 60인에 이르고 32책이었다.

 

  “40여년전부터 6월 13일이면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곤 했어. 그런데 금년에는 그게 맞았어. 남북정상회담을 하러 북한을 간 날짜가 6월 12일이라 했었는데, 하루가 연기가 되어 6월 13일이 된 거야. 63이라는 수의 의미가 아주 좋은 거야. 비결에 있어. 공동선언이야 6월 15일이지만, 50년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난 것은 6월 13일이야. 이 63(6. 13)이라는 숫자는 49(4.19 혁명), 56(5.16), 다음에 이어지는 것인데 그대로 잘 진행될 거야. 제2해방이야. 정해진 이치야. 소재지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차 한잔씩 샀지. 우리 고전학은 더욱 빛을 볼거야.”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교류가 활발해질텐데, 전통문화나 고문분야에서 전망이나 방향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미 1957년부터 <문원>을 편찬할 때 북한쪽 선현들의 글은 수단금 없이 실어놓은 적이 있다. 혜안을 지녔다고 할까.

 

   마무리할 시간이다. 평생 고문연구 편찬 저작과 사료수집을 했는데 전해지지 않아 아까운 자료는 없는가 물었다. 의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총살당할 뻔했지. 전쟁통 많은 고문들이 탔어. 정말 아까운 것은 <장성 경인지 長城庚寅誌>야. 경인년은 1950년이야. 전쟁이 쓸고 간 자리는 험난했지. 특히 장성은 심했지. 그래서 유가족동지회를 조직해 조직부장이 됐어. 죽은 사람의 명단, 인적사항, 장지, 주검의 상태 등 특기사항 등을 개별로 일일이 기록했지. 대창으로 쑤셔진 시신들. 사방에 있었지. 이를 수습하고 합동 안장식을 치뤘어. 고아도 돌보았지. 이를 정리했지. 장성 경인지야. 필사했으니 한권뿐이었지. 그게 없어졌어. 지금도 아까워. 상투를 틀고 일을 보았는데, 군부에서 견제를 했어. 결국 국민방위군 기피라는 명목으로 총살을 하려 한거야. 다행이 도움을 준분이 있어 살아났어. 그때 상투를 자르게 되었지.”

 

  항상 그러하셨듯이, 비록 새카만 후학일지라고 만남 그 자체부터를 즐거움 삼아 이곳 저곳 동행해 주셨다. 가져간 향토자료를 뒤적이시고, 장성과 담양의 경계인 한댓재에서는 음료 한잔, 손룡정사 앞 정자(용귀정)에서는 동네분들과 아이스크림, 고불총림 백양사 선방에서는 녹차 한잔. 만나는 사람마다 성명을 묻고, 오래전에 만나는 사람도 기억해 내고, 지나는 곳곳마다 유래를 설명하시고... 내일이면 역사공부하는 아들(변주승, 전주대) 내외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문안차 올거라는 말씀도 함께.

 

  떠나 올 때 하신 말씀.

 

  “자네 건강이 안 좋다 했는데 얼굴을 보니 좋아진 것 같아. 그런데 안색이 너무 좋아....”

 

  마지막 말씀은 끝내 안하셨지만 혼자 속으로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젊었을 때는 얼굴이 희노래지도록 공부해야 해. 그런데 요즘 공부를 안하는 것 아니야! 다음 만남에서는 또 안색을 볼거야!”

 

* 길이 있는 만남 - 한국고문연구회장 변시연, 대담 김희태 사진 이종국, <금호문화> 2000년 8월호

산암선생의 강학처 장성 손룡정사(사진 이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