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34 - 이방언 대접주의 동학입교 전후 장흥 지역 사회 동향과 교류 관련 자료

향토학인 2024. 1. 28. 04:18

인지의 즐거움334

 

이방언 대접주의 동학입교 전후 장흥 지역 사회 동향과 교류 관련 자료

 

김희태

 

이방언(1838~1895) 대접주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향촌 지식인의 활동에 대해서 살펴 본 바 있다.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시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 다소 모험적인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소개를 통하여 당대의 시대상을 이해하고 후대의 인식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여긴다.

 

동학 대접주로 활약한 이방언(정석)의 학맥과 동문, 동학 입도 계기 등에 대해서 꾸준한 탐문을 해 오던 터에 새로운 자료를 확인하여 소개하였다. 이방언의 또 다른 이름(본명으로 보이는)인 이정석(李正錫), 사복재 송진봉((思復齋 宋鎭鳳, 18401898)·학남 김우(鶴南 金, 1833~1910)·오남 김한섭(吾南 金漢燮, 1838~1894)·이방언(정석)의 동문 수학과 삭적(削籍), 최익현에게 보낸 친필 편지 등이다.(김희태, 동학 대접주 이방언장군 친필 편지-새로 확인된 장흥 인문학 자료-)

 

이를 통하여 유학자와의 교유, 사상적 변이와 동문 삭적 등 갈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자료의 한계로 인해 관심을 두지 못했던 분야를 살펴보려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었다.

 

이방언과 같은 마을에서 생활했던 동년배의 송진봉이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1890(고종 27) 814일 편지에 기록한 묵암공(默庵公)은 이정석(李正錫)의 선고(先考)”라는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아 묵암 이중길(默庵 李重吉)-이정석(이방언, 이민석)의 연결고리를 확인하였다. 이방언의 또 다른 이름이 이정석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방언은 장흥 용산면 접정리(接亭里) 묵촌(黙村, 黙洞)에서 출생했다. 1838(헌종 4) 당시 전라도 장흥도호부 남면 묵촌이다. 인근 월송리(月松里) 월림(月林)을 오가며 활동을 했다. 1912년 기록에 장흥군 남상면 월림리(月林里), 묵촌리(黙村里)가 보인다. 1914년에 월림리는 재흥리(再興里), 송치리(松峙里), 사점리(沙店里)와 합해져 월송리(月松里)가 된다. 묵촌리는 접정리(接亭里)와 합해져 접정리가 된다. 현재 월송리 월림마을, 접정리 묵촌마을이다.

 

송진봉이 1890814일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는 거주처[발신처]가 묵촌(黙村), 이정석(방언)1890815일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는 거주처[발신처]가 월림(月林)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용산면 월림리 392번지가 이방언장군 생가터로 알려져 온다. 현재의 옥은 1949년에 상량한 집이다. 2019.11.07 현지 확인, 제보 이광식님(이장), 문병갑님(재흥), 김희태와 김상찬, 황호균이 답사했다. 원래의 월림마을은 도둘골로 부르는 곳에 있었는데 동학농민혁명기에 불에 타버렸다고 전하여 이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다.(이병혁님 제보, 2019.04.19.)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종 공적(판결문, 양호우선봉등록 등), 사적(문집, 동학사, 오하기문 등) 기록에서는 이방언(李邦彦, 李邦言, 李方彦)”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그런데 동학 입교 전으로 보이는 1890년부터 동학전쟁 이후에도 이정석으로 쓰고 있는 문헌이 여러 건이다. 주로 유학자들의 기록에서 이정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정석이 본명으로 볼 수 있다. 후대의 대동보에서는 이민석(李民錫)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동보의 기록을 옮긴다.

 

民錫 字芳彦 號直菴 憲宗戊戌生 性度豪膽氣岸奇偉容貌端嚴文學卓越詩禮律身孝友傳家敦睦愛族患難相恤 甲午東學與全琫準 飛檄聚衆 改革弊政 名振八域 呼稱南道將軍 享祀于井邑東學祭 乙未四月二十三日卒(<인천이씨대동보>5, 1982).

 

한편, 1934<인천이씨파보>에는 民錫 字子邦 憲廟戊戌生 乙未四月二十二日卒의 기록만 보인다.

 

이방언의 친필 편지를 확인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이정석이 장흥 월림(月林)에서 최익현에게 보낸 것으로 1890815일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당시 주류이던 성리학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왕대비 승하에 대하여 신민으로서 예를 갖추지 못함을 표한 점, 당대 성리학자인 중암 김평묵의 문하에 들었다고 한 점, 면암 최익현에게 하루빨리 배우기를 청한다는 내용 등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논어(論語)>,<주자어류(朱子語類)>, <순자(荀子)>, <맹자(孟子)>의 구절을 언급하고 있어 이정석의 학문 경향을 알 수 있다.

 

이정석(이방언), 송진봉, 김한섭이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는 충남 청양의 모덕사에 원본이 전하고 있다. 2019년에는 <길이길이 흥할 땅 長興 특별전>(국립나주박물관, 2019.06.04~09.01)에 이정석(이방언)의 친필 편지를 전시하였다. 특별전 도록(2019, 231~232)에는 3인의 편지가 나란히 실렸다. 인지의 즐거움179 -탐진강을 넘나든 세친구, 130년만의 조우-이방언-김한섭-송진봉로 소회를 적은 바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1891년께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친필 편지(1890)로 보아서도 동학 입도 전 해에는 성리학에 전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언의 부친 묵암 이중길(1797~1879)노사 기정진(17981879)이 한번 만나보고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묵암의 시에 차운하다次默庵韻는 시가 <노사집> 2권에 있다. 그리고 노사는 묵암에게 답장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였다. 호산 위하조(魏河祚, 1809~1881)도 시를 남긴다. <위씨세고>9 호산거사유고에 次默菴李[重吉]이 있다. 이처럼 이방언의 부친도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1892(임진, 고종 29)에 이르러서는 동문들 사이에서 동학에 투신한 이정석(이방언)을 동문록에서 삭적하고 파출하려는 논의가 일어난다. 학남 김우의 월산정사에서 오남 김한섭, 사복재 송진봉 등이 삭적, 절교 등을 상의한 것이다. 송진봉은 여러 가지로 효유(曉喩萬端)하려고노력하지만, 끝내 듣지 않음으로 이방언을 삭적하기에 이른다. “우리 무리의 화가 이로서부터 비롯되었다(吾黨之禍 自此始矣)”는 한탄을 하기도 한다.

 

이같은 동문들의 효유에도 불구하고 이방언(정석)은 갈등을 뒤로 한 채 사상적 변이를 통해 동학의 이념을 추구하였고 신명을 다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장성 황룡촌 전투, 장흥 석대들 전투 등에서 대접주로서 큰 활약을 한다. 남도대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방언(이정석) 장군의 친필 편지를 처음 확인하여 발표한 이후 제보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미 조사한 자료에서도 새로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점과 시각을 달리하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추가로 확인한 자료를 보자.

 

첫째, 이방언의 부친 이중길이 장흥 남면 면약의 도정(都正)으로 활동한 문헌 확인이다. 남면 면약 약임 명부인 <수행안(遂行案)>의 경신년(1860, 철종 11) 12월 도정이 이중길로 나온다. 또한 이 <수행안>에는 갑자년(1864, 고종 1) 도정 송경옥(宋景玉, 송진봉의 부친), 무진년(1868, 고종 5) 직일(直日) 송진원(宋鎭元, 송진봉 동생), 신미년(1871, 고종 8) 직일 송진봉(宋鎭鳳)이 나온다. (남면 면약에 대해서는 김희태, 조선후기 장흥부 남면 面約의 시행배경과 내용참조.)

 

둘째, 용산면 녹원리 밀성박씨가에 전하는 문서 가운데 동산 박희원(東山 朴熙元, 1865~1930)의 문집 <동산미정고(東山未定稿)>, 그리고 <오당록(吾黨錄)><조객록>(弔客錄, 哀感錄, 1892) 등에 보이는 이정석, 송진봉 등에 대한 기록이다.(박철환 제보. 2018.5.16 조사)

 

문집 기록은 만오 박재영(晩寤 朴載榮, 1836~1892, 박희원 부친), 이정석, 송진봉, 김창수(金昌洙)가 송령(松領)을 함께 넘으면서 보보시(步步詩)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박희원, 敬書家大人步步詩後, <동산미정고>17 )

 

<오당록>에는 李正錫 戊戌 邦彦 仁川人 宋復齋從遊 長興月林이라 하여 이정석의 자 방언(邦彦)과 생년(무술), 거처(장흥 월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오당록>(1885년 을유, 고종 22)은 김평묵(金平默, 18191891), 이희석(李僖錫, 1804~1889), 송진봉, 김한섭, 위영복(魏榮馥, 1832~1884), 김태한(金台漢, 1847~1913), 김기열(金璣烈, 1845~1914), 김우(1833~1910), 이정석 등 143인의 명록이다.

 

<조객록>1892년 임진년 717일 박씨가의 조객 명안으로 이정석, 송진봉 등이 보인다. 이정석은 718일 계빈(啓殯) 명안에 보이는데 李正錫 生戊戌 字邦彦 仁川人 輓 月林의 내용이다. 본명, 생년, , 본관, 부의 내용,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이면 1892년이다. 이방언(정석)1891년께 동학에 입교한 것으로 알려 있는데, 18927월에도 이정석본명으로 문상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당록과 <조객록>은 이정석이 본명, 자가 방언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방언의 동학 입교는 1891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1892년에 동문에서 삭적됨으로 그 이전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왜 입교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로서는 거의 확인 되지 않는다. 성리학에 진력하던 이방언이 동학에 입교한 데는 개인적인 이유, 지역적인 이유, 성리학 자체의 문제, 동학 이념의 시대성 등을 성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사회 동향과 시대정신을 읽어 가면서 살펴야 할 것이다.

 

이정석(이방언)의 편지에 실린 저 정석은 사는 지역도 궁벽하고 어려운 시운을 만나 어려서부터 배울 기회를 잃었습니다. 또 부모님은 연로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실의에 빠져 혼자 곤경에 처해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正錫...且以居地僻陋 遭時難苦 小少失學 亦莫非親老 家貧而落魄 隻身無地也)라는 내용을 통하여 지역의 궁벽함, 시운의 어려움, 집안의 가난함, 곤경에 처해 몸 둘 곳이 없었음 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대학자에게 보낸 편지로서 예를 갖춰야 함에도 개인과 집안, 지역의 어려움과 곤궁함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현실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묵암 이중길(자 찬문, 이방언 부친)이 노사 기정진에게서 받은 편지

 

이찬문[중길]에게 답하다答李贊文[重吉]

이별은 많고 만남이 적은 것을 옛사람도 슬퍼했는데, 심부름꾼이 전해준 편지를 받고 아울러 여러 가지 해산물을 보내 주시니, 관산(冠山)은 천상(天上)에 있지 않나 봅니다. 편지를 통해 세밑과 새해 무렵에 어버이 모시고 평안하심을 알게 되니 감사하고 흐뭇하여 뭐라 사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집스럽고 추악함이 날로 더하여 말하는 것도 귀신이요 먹는 것도 시체와 같으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를 모시면서 늘그막에 글을 읽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노형을 한 번 보고 마음이 끌린 이유가 오로지 여기에 있었는데, 내 자신을 돌아봄에 형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몹시 부끄럽습니다. 더욱 명덕(明德)을 높여서 세한(歲寒)에 그리워하는 심정을 위로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사연은 많지만 편지에 다 쓸 수가 없습니다.(<노사집> 4/ 안동교역, 한국고전종합DB)

 

*다음 글의 내용 일부를 수정하여 전재함.

김희태, 장흥 동학농민혁명 중등용 부교재의 관련 인물 서술 방향-이방언 대접주 동학 입교 전후를 중심으로-, <향토사연구> 제31집, 한국향토사전국협의회, 2021, 55~78.

 

*다음 발표한 글의 완성을 위하여 자료를 수집 정리중이다. 강호제현의 제보를 기대한다. 

김희태, 19세기 말 향촌 지식인의 사상적 변이와 갈등-이방언(정석) 대접주 자료를 중심으로-, < 한국근현대사학회 5월 월례발표회 >, 대우재단빌딩7층 제1세미나실, 2018.05.12. 

 

*인지의 즐거움150 - 장흥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이방언 대접주 친필 편지 처음 확인-동학 입도 전 1890815일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글-

https://kht1215.tistory.com/335

 

*인지의 즐거움179 - 국립나주박물관 장흥특별전1 ; 탐진강을 넘나든 세 친구, 130년만의 조우-직암 이정석(방언)-오남 김한섭-사복재 송진봉-

https://kht1215.tistory.com/486

오당록(吾黨錄, 1885년, 녹문 박희원 서문)의 이정석 기록 - 성명 李正錫 생년 戊戌(1838), 자 邦彦, 본관 仁川人, 종유관계 宋復齋(송진봉)從遊, 거주지 長興 月林이 기록되어 있다.(박철환님 제보. 2018.05.26.)

임진년 717일 조객록(용산면 녹원리 밀성박씨가, 박철환님제보 / 장흥사료조사[김기홍님])

(임진년 7) 18啓殯 조객록

(임진년 7월) 18일 啓殯 조객록 &ndash; 이정석(李正錫) 생년(生) 무술(1838), 자 방언 인천인 만(輓) 월림(月林). &ldquo;만(輓)&rdquo;은 조의의 형식으로 보이는데, 입곡(入哭), 만(輓), 문(文), 제문(祭文) 등이 보인다. 만(輓)은 상가에 참례한 경우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관행을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방언(정석)은 1891년께 동학에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1892년 7월에도 이정석 본명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조갹록 - 송진봉 이정석
남면 면약 수행안(임원 명부), 경신년부터 작성

경신년(1860, 철종 11) 도정 이중길(이방언 부친)

도정 송경옥(갑자년, 1864)(송진봉 부친)

직일 송진봉(신미년, 1871년, 고종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