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33
나대용장군에게 통정대부를 가자한 포장가자교서(1611년)
김희태
포장가자교서 현황과 전래
「나대용 포장가자교서(羅大用褒奬加資敎書)」는 나대용이 창선과 해추선 등 일종의 특수군선을 개발한 공적을 포장하면서 통정대부를 가자(加資)하는 교서이다.
교서(敎書)는 국왕이 내리는 명령서·훈유서(訓諭書)·선포문(宣布文)의 성격을 가진 문서로 즉위교서, 공신녹훈교서, 문묘종사교서, 포장(褒奬)교서 등 다양하다. 문신이 제진(製進)하여 왕의 열람(閱覽) 또는 청문(聽聞)을 거치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교서의 전존은 225건이며 이 가운데 포상 상가[가자]교서는 13건이 전하고 있다. 실물문서 11건, 사진유리필름 자료 2건이다. 상가 교서 내용이 문집에 실린 것은 17건이다.(노인환, 「조선시대 敎書 연구」)
서두에 ‘교 남해현령 나대용 포장가자서(敎南海縣令羅大用褒獎加資書)’, 끝에 ‘만력 삼십구년 유월 초사일(萬曆三十九年六月初四日)’ 연기가 있다. 1611년(광해군 3, 萬曆 39) 6월 4일 남해현령으로 재임 할 때 내린 국왕문서로 거북선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크다.
「나대용 포장가자교서」는 조선사편수회에서 1928년 6월 7일 촬영한 디지털 이미지가 공개되고 있다. 이 고문서는 2021년 10월 나대용 종합학술조사 계획을 논의하던 초기 단계에서 웹사이트 검색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사진 유리필름 자료이기는 하지만, 원본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나대용 포장가자교서」는 원본의 전존 여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문서의 원문은 교서를 지은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문집인 <죽음집(竹陰集)>』(1681년경)과 <금성나씨족보>(1800년), 그리고 <체암집>(1912년)과 체암행적(1932년)에 실려 있다.
1928년 조선사편수회 조사 당시 나주군 문평면 오룡리 나종환(羅宗煥) 소장이었다. 1919년부터 1930년까지 문평면장을 역임한 나종환(羅宗煥)이 있는데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평면에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현금 천원(圓)을 기부하는 등 교육사업에 여러 번 특지(特志)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동아일보」 1931년 08월 04일자.) 1914년 10월 21일 나주군 거평아계면장(居平芽界面長) 나종환 기록도 확인된다. 나종환은 1932년 중간본 <체암공행적>의 발문을 짓기도 한다.
조희일은 1602년 별시문과로 급제하여 예조참판, 승문원제조, 경상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죽음집>은 조희일의 손자인 조경망(趙景望)이 가장되어 오던 정사본(淨寫本)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김수항(金壽恒)에게 부탁하여 산정을 마쳤고, 태인 현감으로 재임할 때에 5권 5책의 목판본으로 간행을 하였다. 조경망은 1680년(숙종 6) 가을에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였고, 이민서(李敏敍)의 서문이 1682년에 쓰여 졌으니, 간행은 1681년쯤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7815),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죽음집> 권5 응제(應製)편에 「교포 남해현령 서(敎褒南海縣令書)」가 실려 있다. 교서 끝에 “縣令姓名。不載本稿。[현령의 성명은 본고에는 기록하지 않았다.]”라 주석이 있다. 응제는 임금의 명에 응하여 지은 시문을 말한다. 증손 조정만(趙正萬)이 강서현령으로 재임할 때인 1704년(숙종 30)에 16권 6책으로 증보, 재편하여 중간하는데 나대용 교서는 그대로 실린다. 이 중간본은 규장각(奎6830), 연세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982) 등에 소장되어 있다.
<금성나씨족보>는 5권 5책의 목활자본으로 “숭정후삼경신팔월일간행(崇禎後三庚申八月日刊行)”의 간기가 있어 1800년(정조 24) 간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족보에는 1692년(숙종 1) 나두벽(羅斗璧)의 서문, 정묘년 나수암(羅壽嵒)의 서문, 1766년 정상(鄭棠)의 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古2518-12-6)에 소장되어 있다. 문서의 제목은 ‘교 남해현령 나대용 포장가자서(敎南海縣令羅大用褒獎加資書)’, 끝의 연기는 ‘만력 삼십구년 유월 초사일(萬曆三十九年六月初四日)’로서 교서 원본 문서의 표기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체암집>(1912년)과 <체암공행적>(1932년)에는 문서의 제목을 ‘교서(敎書)’라 하고 본문만 적고 연기는 표기하지 않았다.
<표> 나대용 포장가자교서 현황
번 | 문서(문헌)명 | 출처 | 판종 | 발간(촬영)연도 | 관련인물 | 소장처 |
1 | 敎南海縣令羅大用褒獎加資書 | 원본(촬영) | 사진필름 | 1928년 | 나종환(나주 문평면 오룡리) | 국사편찬위원회 사진유리필름(조선사편수회) |
2 | 敎褒南海縣令書 | 竹陰集 권21 應製 | 목판본 | 1681년경 초간/1704년 중간 | 조희일 | 규장각 (奎7815/奎6830) |
3 | 敎南海縣令羅大用褒獎加資書 | 금성나씨족보 | 목활자본 | 1800년 | 국립중앙도서관 (古2518-12-6) |
|
4 | 敎書 | 『체암집』 | 목활자본 | 1912년 | 국사편찬위원회(여수 개인소장) | |
5 | 敎書 | 『체암공행적』 | 목활자본 | 1932년 | 송재사/나주시 |
나대용 포장가자교서의 교감과 해설
「나대용 포장가자교서」의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 사진필름자료를 기준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서의 제목은, <금성나씨족보>는 원문서와 같고, <죽음집>은 ‘교포 남해현령서(敎褒南海縣令書)’, <체암집>과 <체암공행적>은 ‘교서(敎書)’이다. 본문 글자는 네 곳이 다르다.
敎南海縣令羅[大][用]1)褒獎加資書2)
王若曰 禦敵3)要在得人 方略佇施於邊鎭 善」事必先利器 舟楫立辫於迅防 靡有勞而」不褒 囙已能而可勉 維爾少而執技 俾也鍊4)」戎 奉公忘私 世有悞謂之戇 臨事不避 人亦」咸知其忱 緬惟南海之衝 屢警東方之猘 固」宜臨水而剿殄 曷使登陸而跳踉 肆當繕機」械之時 首5)興造舳艫之役 近徵閑山之大捷」 制倣龜形 遠法淮甸之良規 勢疾鹞子 惟」財力匱乏之極 乃6)手足拮据而成 莅邑纔」十月來 訖工以三隻聞 既有盡軄之效 可無」報功之章 兹加爾通政大夫行南海縣令 如」故 於戱 固吾封疆 壯虎豹在山之勢 戢彼顗」覦 絶鯨鯢駭浪之虞 故茲教示 想宜知悉7)」
萬曆三十九年六月初四日」
교감주석
1) [大][用] : 사진필름자료는 훼손되어 있으나 『금성나씨족보』에 따라 인명임을 알 수 있음.
2) 敎南海縣令羅大用褒獎加資書 : 『죽음집』은 敎褒南海縣令書, 『체암집』(1912)과 『체암행적』(1932)은 敎書로 표기.
3) 敵 : 『죽음집』 ‧『금성나씨족보』는 敵, 『체암집』‧『체암행적』에는 賊으로 표기.
4) 鍊 : 『죽음집』 은 練, 『금성나씨족보』‧『체암집』‧『체암행적』은 鍊으로 표기.
5) 首 : 『죽음집』‧ 『금성나씨족보』는 首, 『체암집』‧『체암행적』은 遂로 표기.
6) 乃 : 『죽음집』 ‧『금성나씨족보』는 乃, 『체암집』‧『체암행적』은 迺로 표기.
7) 『죽음집』 은 끝에 縣令姓名 不載本稿라 2행 세주로 표기.
국역문은 1976년에 (국역)체암나대용장군실기를 낼 때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 1914~1993) 선생이 국역한 내용이 통용되어 오고 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선학의 국역문에 일부 윤문을 해 보았다.
교서
왕은 이렇듯이 말한다. 적을 막는 방책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방략이 변진에서 시행되기를 기대했더니, 일을 잘하자면 먼지 기물을 치레해야 하는거라 주집(배)은 방어를 위해 마련되었도다.
공로가 있으면 포양(褒揚)하지 않는 법 없나니, 있는 능력을 다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너는 진작부터 기술을 지녀, 마침내 훈련원에 봉사하였다. 공을 받들고 사를 잊으니 세상에선 한결같이 우직하다 일렀고, 일에 임하면 회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성을 알아주었다. 돌아보건대 남해는 요충지대라 누차 왜적의 침략을 보았다. 진실로 해상에서 무찔러 버려야지, 어찌 육지에까지 조량하게 할소냐.
그래서 기계를 수선하는 때를 당하여 드디어 배 만드는 역아를 일으켰도다. 가깝게는 한산의 큰 승첩을 입증하여 모양은 거북선을 모방했고, 멀리는 회전의 좋은 법규를 본받아 형세는 요자보다 빠르도다.
오직 재력의 핍박이 극심하여, 이에 네 손 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고을 다스린지 겨우 열 달 만에, 공역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직책을 다한 실효가 있는데, 어찌 공을 보수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러므로 너에게 통정대부를 가자하고, 남해현령을 이전과 같이 거행케 한다.
아! 우리 봉강을 굳건히 하여 호표가 산에 있는 기세를 과시하고, 적의 침략을 근절시켜 경예가 파도를 일으키는 근심을 없이하라. 넌지시 이와 같이 교시하노니, 마땅히 체득할 줄 믿는다.(신호열선생역,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1976, <국역 체암나대용장군실기>)
남해현령 나대용을 포장하여 자급을 더하는 교서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을 막는 방책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고, 방략이 변진에서 시행되기를 기대했더니, 일을 잘하자면 먼저 기물을 치레해야 하는거라 주집(배)은 방어를 위해 마련되었도다. 공로가 있으면 포양(褒揚)하지 않는 법 없나니, 있는 능력을 다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너는 젊어서부터 기량을 갖추었으니 군사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공을 받들고 사를 잊으니 세상에선 한결같이 우직하다 일렀고, 일에 임하면 회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정성을 알아주었다. 생각해보건대 남해는 요충지대라 누차 왜적의 침략을 보았다. 진실로 해상에서 무찔러 버려야지, 어찌 육지에까지 제멋대로 날뛰게할소냐.
그래서 기계를 수선하는 때를 당하여 드디어 배 만드는 일을 먼저 일으켰도다. 근래에는 한산의 큰 승첩을 입증하여 모양은 거북을 모방했고, 멀리는 회전의 좋은 법규를 본받아 형세는 매[鷂子]보다 빠르도다.
오직 재력의 핍박이 극심하여, 이에 네 손발로 노력해서 이루었도다. 고을 다스린 지 겨우 열 달 만에, 공역을 끝내어 세 척을 만들었다니. 이미 직책을 다한 실효가 있는데, 어찌 공을 보수하는 특전이 없을소냐. 이러므로 너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고, 행 남해 현령을 이전과 같이 계속 근무하도록 한다.
아! 우리 국경[封疆]을 굳건히 하여 용맹한 전사[虎豹]가 산에 있는 기세를 과시하고, 흉악무도한 왜적[鯨鯢]이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거두고 파도를 일으키는 근심을 없이하라. 넌지시 이같이 교시하노니, 마땅히 체득할 줄 믿는다.
1611년(만력 39)년 6월 4일(국역 윤문 엄찬영님(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자문)
*다음 글에 실린 일부 내용을 수정하여 전재함.
김희태, 「체암 나대용장군 관련 자료와 고문서 해제 -계미무과방목(1583), 포장가자교서(1611), 체암집 출판불허문서(1932)-」, <향토문화>42,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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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학통신 -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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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서(『체암집』, 1912년,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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