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32
나대용장군의 <체암집(遞菴集)>, 출판 불허 차압당하다, 1932년
-체암공이 유탄에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동방의 미친 개[東方ノ狂犬]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김희태
<체암집(遞菴集)과 <체암행적(遞菴行蹟)>
나대용장군 관련 기록자료를 모은 행적집으로 <체암집(遞菴集)>과 <체암행적(遞菴行蹟)>이 있다. 1912년본의 표제는 체암집(遞菴集), 1932년본은 체암행적(遞菴行蹟)인데 내용은 일부를 제하고는 같다. 체암집(1912)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공개하고 있다. 2008년 전남 여수시 지역사 수집자료(주삼동 개인자료)이다. 체암행적(1932)은 송재사에 소장되어 있다. 1912년 본과 1932년 본 두책 다 내제(內題)는 ‘체암공행적(遞菴公行蹟))’이다.
이 책은 체암집 서명[표제]으로 1932년에 출판하려다가 불허된 적이 있다. 이때의 출판 불허문서가 남아 있는데 “七. 三. 一”의 연기 표기가 있어 1932년 3월 1일 불허되었음을 알 수 있다. “七”은 쇼와(昭和) 7년을 뜻한다.
현전하는 자료로 보아 조선 후기에 <체암행적>의 편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년(임자)의 <체암집> 첫 부분에 나오는 「체암공 행적 서문[遞菴公行蹟序]」은 끝에 “聖上二十五年 庚申五月 前行繕工監役 錦城林炳遠 謹序”라 하여 1800년(정조 24) 5월에 임병원이 지은 글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초간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간본이라 할 1912년 본은 임병원의 서문(1800년)에 이어 나경식(羅景植)의 소서(小序)가 있다. 그리고 발문은 3편을 싣고 있는데 제목과 연기 표기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1824년 나언효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어간에도 편간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謹書遞庵公行蹟後 - 崇禎紀元後四甲申仲春八世孫彦孝謹書 ; 1824년 나언효
謹書遞庵羅公行蹟後 - 元黓困敦之歲小畜月上澣錦城吳繼洙謹跋 ; 1912년 오계수(<난와유고> 권9에 실림)
謹書遞庵公行蹟後 - 壬子仲夏旣望十一世不肖孫鳳運拜手謹書 ; 1912년 나봉운
1932년에는 <체암행적>이 편간된다. 1800년본이 발간되었다면 이를 초간본으로 보고, 1932년본은 삼간본이라 할 것이다. 서문은 「체암공 행적 중간 서문[遞菴公行蹟重刊序]」이라 하여 중간(重刊)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서문은 “歲在玄黓涒灘季秋上澣十一世孫翔煥謹序”라 하여 1912년(玄黓涒灘, 壬子)에 나상환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를 “계추 상한(季秋上澣)”이라 표기하였다. 계추(季秋)는 9월을 말함으로 1932년 9월에 중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상환의 서문에 이어 1800년 임병원의 구서(舊序), 1912년 나경식의 소서(小序)가 있다.
1932년 본의 발문은 5편이 실렸는데 앞 3편은 1912년에 실린 발문이다. 다른 2편의 발문은 1932년에 지은 것인데 그 시기를 각각 “계추(季秋)”, “중양(重陽)”이라 하여 9월로 표기하고 있다.
謹書遞庵公行蹟後 - 崇禎紀元後四甲申仲春八世孫彦孝謹書 ; 1824년 나언효
謹書遞庵羅公行蹟後 - 玄黓困敦之歲小畜月上澣錦城吳繼洙謹跋 ; 1912년 오계수
謹書遞庵公行蹟後 - 壬子仲夏旣望十一世不肖孫鳳運拜手謹書 ; 1912년 나봉운
遞庵公行蹟重刊跋 - 歲在玄黓涒灘季秋上澣十世孫宗煥謹跋 ; 1932년 9월 나종환
謹書遞庵公行蹟重刊後 - 歲在壬申重陽之月下澣十一世孫圭運宗謹書 ; 1932년 9월 나규운
이처럼 서문과 발문을 통해 1932년 삼간본은 9월에 편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32년의 발문을 지은 나종환(10세손)은 「나대용 포장가자교서」를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사 촬영할 때 소장자로 기록된 나주군 문평면 오룡리 나종환(羅宗煥)과 같은 인물로 보인다.
체암집(遞菴集) 출판 불허 문서
2022년 나대용장군 학술조사 과정에서 1932년 <체암집>의 출판 불허에 관한 문서를 확인하였다. 이수경 징역유산연구원장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여 제보하여 주었다. 윤여정회장과 김희태가 자료를 추가 확인하고 보완하여 학술조사단에 제공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2022.11.18.) 토론문(김희태)에 실었다.
조선총독부 경찰국 도서과(圖書課)에서 발간한 <朝鮮出版警察月報(第四三號)>(昭和七年 四月號)에 따르면 1932년 3월에는 6종의 출판물이 불허가 되었다. 「출판법」에 따른 것이다. 3월분 출판 출원수는 허가 215종, 불허가 6종, 취하 1종 등 모두 222종이었다. 1932년 3월 출판물 납본수는 출판법에 따른 것이 단행본 72종, 잡지 112종, 기타 7종이고, 출판규칙에 따른 것이 단행본 16종, 자비 277종, 기타 115종 모두 644종이었다.
「출판법」은 1909년 2월 23일 공포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이름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통감부가 만든 법이라 할 수 있다. 출판 허가신청, 납본, 위반 때 처벌 규정, 반포금지, 인본 압수 등을 답고 있다. 관련 조항이다. 원고의 사전검열과 사후 제본 납부를 의무화함으로써 출판물을 사전, 사후에 철저히 통제하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각종 단행본이나, 이른바 ‘계속간행물’은 1909년에 만들어진 「출판법」에 따랐다.(네이버 지식백과, 「법과 생활」 ; 법령정보센터)
조선총독부 경찰국 도서과는 ① 신문지, 잡지 출판물 관련 사항, ② 저작권, ③ 검열된 신문지 잡지 출판물의 보관, ④ 활동사진, 영화의 검열 등의 업무를 맡았다.(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조선출판경찰월보(제43호)>(1932년 4월호)의 목차는 출판물 납본수 및 출판출원 수표(3월분), 출판물 행정처분 건수표(3월분), 신문지 행정처분 건수표(3월분), 차압(差押)처분통계(3월분), 주의(注意)통계(3월분), 불허가 차압 출판물 목록(3월분), 불허가 차압 출판물 요지이다.(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불허가 차압 출판물 목록
[1] 出版法ニ依ルモノ-治安之部
題號 | 種類竝ニ使用文字 | 處分年月日 及 種類 | 發行地 | 發行者 |
遞菴集 | 單行 漢文 | 七. 三. 一 不許可 | 京城 | 徐丙稷 |
新進文藝(第一輯) | 雜紙 朝鮮文 | 七. 三. 一 不許可 | 京城 | 金熙哲 |
集團(第一卷 第三號追加) | 雜紙 朝鮮文 | 七. 三. 七 不許可 | 京城 | 林仁植 |
集團(第一卷 第三號) | 雜紙 朝鮮文 | 七. 三. 十 不許可 | 京城 | 林仁植 |
集團(第一卷 第三號) | 雜紙 朝鮮文 | 七. 三. 三一 不許可 | 京城 | 林仁植 |
集團(第一卷 第三號追加) | 雜紙 朝鮮文 | 七. 三. 三一 不許可 | 京城 | 林仁植 |
(風俗之部ナシ)
<체암집(遞菴集)>은 한문 단행본이며 발행지는 경성, 발행자는 서병직(徐丙稷)이다. 불허가 연월일은 1932년 3월 1일이다. 체암집의 불허가 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不許可差押出版物要旨
遞菴集 單行漢文 七. 三. 一 不許可
- 謹書遞菴公行蹟後 -
當時李忠公, 遞菴公カ流彈ニ當ツテ倒レズ彼等ニ數年ノ命ヲ與ヘタナラババ東方ノ狂犬ヲ一人殘ラズ無クシテ彼等ノ子孫ヲシテ數百年後ニ再ビ我ガ大義トナラシメルコトガ無カツタアラウ. 兩公ノ忠勳ハ偉大ナモノデアル.東方ノ士丈夫ニシテ林下ニナクモノ幾何デアロウ.而シテ忍ンデ亡靈ノ恨ヲ見ル. 悲シイ哉.
불허가 차압 출판물 요지
체암집(遞菴集) 단행 한문 1932.3.1. 불허가
근서 체암공 행적 후(謹書遞菴公行蹟後)
당시 이충공, 체암공이 유탄에 맞아 쓰러지지 않고, 그들이 수 년 동안 더 살아 있었더라면 동방의 미친 개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그들의 자손으로 하여금 수백 년 후에 다시 우리가 대의로 삼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두 분의 충훈은 위대한 것이다. 동방의 선비중에 신체를 보전하고 임하(세상)에 있을 사람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망령의 한을 보노라. 슬픈 일이다.(번역 유재연님 자문)
1932년에 체암집을 발간하고자 출판 허가를 신청했는데, 3월 1일자로 불허가 되었고, 그 사유는 「근서체암공행적후(謹書遞菴公行蹟後)」에 실린 글 때문이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충무공과 체암공이 살아 있었더라면 동방의 미친개(東方ノ狂犬)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조치해 버렸을 것이고, 수백년 뒤에 다시 일제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문의 글이 불허가의 요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32년 3월 1일자로 불허가 되었지만, 9월에 발간된 것으로 보아 불허가 사유가 되었던 발문의 글은 제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이충무공전서>이다. 1795년에 발간한 <이충무공전서>는 1930년 이순신의 후손 이민복과 대전에 살던 서장석이 내용을 보강해 재발간하고자 하였으나, 일제는 검열에서 ‘왜추(倭酋)’, ‘왜적(倭賊)’ 등의 단어를 삭제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1934년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의 오탈자가 일제의 출판 검열을 피하기 위해 초서(흘림체) 등으로 숨겨 본뜻을 알리는 방법으로 발간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대전시학예연구사, 이충무공전서의 비밀 밝히다」, 2015.04.28., 대전광역시청 누리집)
앞에서 본 여러 종류의 발문 가운데 누구의 발문에 출판 불허가가 된 글이 실려 있었던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출판 허가 신청한 자료나 불허가 된 통지, 발행자(서병직)와의 관계, 이와 관련 자료들도 더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체암 나대용장군에 대한 후대의 인식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대용장군 관련 자료가 보다 많이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다음 글에 실린 일부 내용을 수정하여 전재함.
김희태, 「체암 나대용장군 관련 자료와 고문서 해제 -계미무과방목(1583), 포장가자교서(1611), 체암집 출판불허문서(1932)-」, <향토문화>42,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23.12.
*인지의 즐거움287 - 나대용장군 무과 급제 동방(同榜) 500명 중 전라도 99명, 1583년
https://kht1215.tistory.com/924
*향토학통신 - 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
https://kht1215.tistory.com/947
*인지의 즐거움333 - 나대용장군에게 통정대부를 가자한 포장가자교서(1611년)
https://kht1215.tistory.com/1116
불허가 차압 출판물 요지(조선총독부 경찰국 도서과(圖書課), <朝鮮出版警察月報(第四三號)>(昭和七年 四月號))
체암집(체암공행적) 표지(1912년,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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