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05 -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의 유래와 전승-2023년 참관기를 겸하여-

향토학인 2023. 5. 24. 16:07

인지의 즐거움305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의 유래와 전승

-2023년 고줄제작, 고싸움줄당기기 참관기를 겸하여-

 

김희태

 

유래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읍 일원에서 조선시대부터 정월대보름에 행해지고 있는 전통민속놀이이자 농경의례축제이다. 벼농사 문화권의 보편적인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고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싸움 줄당기기이다.

 

고싸움줄당기기는 장흥읍을 가로지르는 예양강(지금의 탐진강)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편을 나눠서 했다. 조선시대 장흥에는 두 개의 행정 관청이 있었는데, 예양강 서쪽 부내면에 읍치(邑治)를 둔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와 예양강 동쪽 부동면에는 역로(驛路)를 관장하는 벽사도(碧沙道)가 있었다. 소속이 다른 두 기관이 서쪽과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두 기관 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돼 고싸움 줄당기기가 더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민중들의 놀이가 관아에서 장려하여 주민단합과 결속을 다지게 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고을형 축제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장흥읍 남외, 교촌, 충열리 등은 부서(府西)로 붉은 천을 사용했고, 행원리와 건산리, 상리 등은 부동(府東)로 푸른 천을 사용하였다. 부서줄에는 강진군 군동면병영면, 부동줄에는 장흥군 부산안양면 주민이 참여하기도 했다.

 

가치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는 벼농사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행해지는 놀이라는 점에서 보편성이 있다. 그리고 역사성, 학술성, 고유성, 향토성, 축제성의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비추어 더 돋보인다는 특수성이 있다.

 

보편성은, 줄다리기는 풍농을 기원하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과 단결을 위하여 수도작(논농사) 문화권에서 널리 연행된다는 점이다. 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사례로 보면 알 수 있다. 2015년에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를 포함한 영산, 삼척, 밀양, 의령, 남해 등 6개소와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이 국가간 공동등재의 형태로 등재되었다.

 

이같은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장흥은 고싸움줄당기기가 함께 전하여 두 놀이가 별개가 아니어 가장 원형에 가깝다는 점, 고을형 축제 전통의 전형을 보여 주는데 장흥부와 벽사도라는 지역의 역사와 전승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 동짓달 15일경부터 고삿줄로 시작하여 정월대보름에 그 절정을 이룬다는 점, 청사초롱을 매달고 횃불을 들고 행군한다는 점, 토반과 예인이 줄 위에 타고 특이한 노래가 불려진다는 점, ‘깔기밀치기가 행해진다는 점 등 장흥만이 갖는 특징이고 가치이다.

 

명칭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는 고싸움과 줄당기기가 같은 줄로 한꺼번에 이어지는 놀이이다. 고싸움은 고를 맞대고 서로 겨루어 넘어뜨리는 형식의 놀이이다. 줄당기기는 고싸움이 끝 난 뒤 한쪽의 고를 다른 쪽의 고에 끼워넣고 비녀목으로 고정한 뒤 양쪽에서 줄을 당기면서 겨루는 놀이이다. 줄당기기, 줄땡기기, 줄다리기, 삭전(索戰) 따위 여러 명칭이 있다.

 

민속문화는 해당 지역의 현장에서 주민들이 쓰는 용어를 일종의 표제어로 쓴다.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갈 때는 장흥 보름줄다리기라고 했다. 고쌈, 고싸움, 고줄쌈, 고줄놀이, 줄쌈 등으로 불렀다.

 

고싸움과 줄당기기가 같은 고줄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장흥에서만 남아 있다. 다른 지역은 고싸움과 줄당기기가 따로 행해져 서로 다른 놀이처럼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는 장흥에서 전래되고 행해지던 민속놀이 현장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의 겨루기가 같은 줄로 할 수 있는 가장 원형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명칭이다.

 

전승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이어져 왔다. 1917년의 사진이 전남사진지에 실려 있는데, 사자산을 배경으로 탐진강 하중도의 시장마당에서 줄당기기하는 사진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줄당기기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사진이라 한다. 사진에는 장옥(場屋)50여동이 보이는데, 비교해 보면 줄의 길이는 200~250미터쯤이고 참여 인원은 300여명으로 보인다.

 

1918년에는 금장 출신 소천 이인근((小川 李寅根, 1883~1949)선생이 고싸움줄당기기 현장을 보고 지은 한시가 소천유고(小川遺稿)에 실려 있. 기산 출신 신헌 김옥섭(愼軒 金玉燮, 18781930)의 시도 있다. 그리고 1925, 1928, 1929, 1931년에 장흥에서 삭전대회(索戰大會)가 열렸다는 신문기사가 있어 1930년대까지는 꾸준히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기록자료는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아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데 중요하다.

1917년 장흥고싸움줄당기기 전경(장흥읍 탐진강 강터 시장, 전남사진지)

시문

 

장흥의 선비들이 고싸움줄당기기를 보고 지은 한시(漢詩)는 줄을 만들거나 당기는 직접 참여자는 아니지만, 관람자도 참여자의 한 축이라 주목할 자료이다. 특히, 무형유산이나 민속생활사 자료들은 문헌 기록으로 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1918년 대보름의 고싸움줄당기기를 보고 지은 소천 이인근(1883~1949)의 시 제목은 무오년 정월에 백형의 삭전운에 차운하다[戊午正月次白兄索戰韻]이다. 내용을 보면, “징 북소리 시끌벅적 호령소리 분명하니, 동서의 형세 두 편으로 나뉘어 일어나네.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鉦鼓喧喧號令明 東西形勢兩分生 龍爭虎鬪千斤力 地塌天崩萬仞聲)”라 하였다. 풍악과 호령 속에 동서 두 편이 행하는 용호상박의 줄당기기 현장을 읊고 있다.

 

신헌 김옥섭(1878~1930)의 시는 정월 보름에 줄당기기를 보다[上元日 觀索戱]라는 제목인데, “머리를 맞대고 쌍용이 들 가운데서 싸우고, 성 가득 우레 북 울려 하늘을 흔들려하네. 웅건한 기세로 다투니 끝내 진정되기 어려워,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견디고 있으니 가련하구나.(交首雙龍鬪野田 滿城雷鼓欲掀天 爭雄氣勢終難穩 畢竟戢鱗堪可憐)”라는 내용이다. 머리를 맞대고 동부와 서부고의 쌍용이 싸우고 성안 가득 울려 퍼지는 우레 북소리에 하늘까지 흔들리는 듯한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다.

1918년 한시(소천 이인근(1883~1949), 독우재 소장)
1931년 장흥 고싸움줄당기기[索戰] 보도자료(매일신보, 1931.03.01)

재현

 

장흥 고싸움줄당기는 1970년에 재현 형태로 다시 고줄을 꼬았고 고싸움을 하고 줄당기기를 했다. 1970415일 열린 1회 보림문화제의 상징행사로 30여년만에 재현되었다. 장흥읍 행원리에서 제작을 했고 원도리에서 연습을 했으며 탐진강에서 실연을 했다.

 

이어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01021부터 23일 사이 광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 지춘상(1932~2009) 교수가 지도하였고 이 대회의 사진이 잘 남아 있다.

 

1982년에는 KBS 주최의 열전 팔도대항을 통해 다시 한번 알려지면서 문화계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70년 재현 이후 20115월 제41회 장흥군민의 날보림문화제까지 매년 연행되었다. 이후 인원 동원과 준비의 어려움 때문에 홀수년 격년제로 시행하고 있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광주공설운동장, 1970.10.21., 사진 지춘상교수)
1970년 시연(장흥읍 원도리, 옛 장흥교도소 자리, 사진 지춘상교수)

형태

 

고싸움 줄당기기의 구성은 원래 줄만들기, 고샅줄당기기, 보름줄당기기로 이어진다. 줄만들기는 정월 10일경 볏짚을 거둬 길이 200여 미터, 둘레 2~3미터의 줄을 만든다. 이 줄을 반으로 접어 줄머리를 만들고 밧줄로 감는다. 그 머리에서 나온 줄을 꼬아 2, 3합하여 굵게 몸체를 만들고 화려한 청사초롱을 달아 멜대를 묶는다. 그 뒤에 줄머리를 45도로 세우면 완성된다.

 

고삿줄당기기는 동짓달 15일께부터 어린이들의 소규모 줄당기기가 벌어지고, 청년들까지 가세하여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보름줄당기기는 정월 대보름 하오에 동서의 놀이꾼들이 달려들어 청사초롱을 켜고 탐진강변으로 간다. 모래사장에 다다르면 전희로 고싸움이 벌어지고, 바로 이어 줄당기기가 시작된다. 먼저 줄을 떠받들어 숫줄을 암줄에 넣고 비녀목으로 찔러 연결한다. ‘줄들어갔다라는 함성이 터지면 줄을 내리고 함성과 함께 격렬한 놀이가 시작된다. 놀이를 한참 하다가 불리한 쪽은 줄패장의 호령에 깔기를 하고, 상대방은 격렬한 밀치기를 시도하면서 놀이가 전개된다.

 

계승

 

장흥 고싸움줄당기기에 대해서 체계적인 조사와 무형문화재 지정 등의 논의가 있어 2013년에는 장흥군의 지원으로 장흥문화원에서 전문가[이경엽양기수이옥희]가 참여하는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를 발간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정남진 토요시장 입구와 장흥대교에 고싸움줄당기기 상징물을 설치했고 탐진강 제방에 벽화를 그렸다. 2019년 시연한 고줄은 예양교 아래에 전시하고 있다.

 

2022년에는 문화재청의 미래무형유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202333미래무형유산과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의 전승 방향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발표는 이경엽이옥희김희태허용호, 토론은 양기수박원모고대영문병길김상찬이 참여하였다.

 

2023410일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었고,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중에 있다. 2023428일 제53회 군민의날보림문화제에서 고싸움 줄당기기 시연을 했다.

1990년 고싸움(탐진강, 군민의날보림문화제, 사진 양기수)

1990년 줄당기기(탐진강, 군민의날‧보림문화제, 사진 양기수)
1992년 시연(탐진강, 군민의날‧보림문화제 전날, 사진 김전환촬영 영상인용)
고싸움줄당기기 상징물(장흥대교 동판[좌], 정남토요시장 입구 고줄 모형[우])

장흥대교 동판 부조

고싸움줄당기기 벽화(탐진강 서편 읍사무소 부근) 

2019년 고줄 보관 전시(장흥읍 탐진강 예양교 밑)

 

제작

 

고싸움줄당기기에 활용되는 고줄은 암고와 숫고 모두를 장흥읍 행원리에서 만들고 있다. 원래는 동부 고는 장흥읍 원도리·관덕리·상리 행원리 일원에서, 서부 고는 장흥읍 남외리·충렬리·교촌리 일원에서 만들었다. 고줄을 만드는 시기는 보림문화제가 시행되기 전 년도로, 추수시기에 볏짚을 미리 예약, 보관하여 보림문화제가 열리기 20여일 전까지 고줄을 완성한다.

 

최근 군민의 날 보림문화제 행사에서 시연한 고줄의 길이는 200m 내외이다. ‘고의 머리라 불리는 고리의 지름은 약 2m 내외이며, 굵기는 약 둘레가 0.8m 가량이다. 고의 몸통부분은 지름이 1.5m 내외이다. 주 몸통 부분에서 점차 가늘어지도록 하기 위해 옆 줄을 빼내어 뒷부분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고줄을 만드는 주재료는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만드는데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여 3의 배수로 줄을 점점 굵게 만들어 총 81합까지 만든다. 81합이 세가닥 모여 한곳의 줄이 된다. 2023년 고줄은 기계로 꼰 새끼를 무안에서 구입하였는데, 새끼줄이 가늘어 4줄로 꼬기 시작하여 324합이 되었다. 크기는 암고가 전체길이 4,300, 고머리 외경 155, 줄 직경 30, 고몸통의 폭 50였다. 숫고는 길이 4,200, 외경 140로 조금 작았다.

 

고머리 부분은 동부고와 서부고가 서로 맞부딪쳤을 때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대나무를 중심 부분에 넣어 만든다. 암고와 숫고의 고머리 크기는 거의 비슷하지만 암고는 약간 둥그렇고, 숫고는 양간 머리 쪽이 약간 긴 타원형을 갖춘다. 이는 고싸움 이후 줄다리기를 위해 두 줄을 연결할 때를 감안하여 만든다. 고가 모두 만들어지면 서부 고인 암고는 고머리에 붉은색 천을 감고, 동부 고인 숫고에는 청색 천을 감아 고를 구분한다.

 

2023년 고싸움줄당기기 고줄제작은 행원리 회관 앞에서 47일에서 10일 사이 제작되었다. 마을 주민이 공동노동으로 참여하였는데, 자치운영회(이장 김기종님), 부녀회(이명호님), 청년회(이석동님)장흥읍번영회(백형칠님)와 계약을 맺은 뒤 고줄 제작을 주관하였다. 원로[위현종님(88), 장세홍님(87)]들이 입회하여 자문하였다.

줄꼬기(1994, 사진 양기수)

행군

 

고싸움 줄당기기를 위해 행군을 할 때는 고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청사초롱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한다. 과거에는 장흥도호부와 벽사역 관아의 동헌 뜰에 들어가서 인사를 한 뒤 탐진강변으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놀이를 펼쳤다. 1992년부터는 공설운동장에서 시연을 하고 있다.

 

줄을 메고 행진할 때에는 예전에는 고을 원님을 줄 위에 태웠다고 하며, 토반에 해당하는 한량과 예인들이 줄 위에 올라타서 소리를 하며 이동했다. 근래에는 고싸움 줄당기기를 위해 행사장으로 이동할 때 군수나 국회의원이 줄 위에 타기도 하며, 지휘자가 줄 위에 올라서서 행진을 이끈다.

 

동부 고는 군민회관에서 출발하여 중앙로를 거쳐 옛 국도 2호선을 따라 장흥대교 지나 칠거리로, 서부 고는 석대모퉁이에서 출발하여 신작로길을 따라 칠거리에서 합류하여 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2023년에는 동부 고는 장흥대교 밑 탐진강에서 출발하여 칠거리로 갔는데, 군민의날 참여 각 읍면 선수단과 행사단 전체가 뒤따라 시가행진을 했다. 서부 고는 토요시장 입구에서 칠거리로 행군하여 동부와 서부고가 차례대로 동동리, 경찰서앞, 남문고개를 넘어 공설운동장 동문과 서문으로 행했다.

 

올해에는 시가행진을 할 때에 동부 고에는 장흥읍장(길현종), 장흥군민의 상 수상자(김장규김일진), 설소리꾼 국악인(정숙이, 목포), 미래세대로 장흥서초등학교 남학생이 탔다. 서부 고에는 새마을금고이사장(한용현), 장흥군체육회장(정성인), 장흥군민의 상 수상자(김점배), 소리꾼(김효정, 장흥), 장흥초등학교 여학생이 탔다. 공설운동장 행군시에는 동부 고에는 장흥군수(김성), 재경향우회장(김연식), 장흥군번영회장(주재용), 서부 고에는 장흥군의회의장(왕윤채), 장흥문화원장(김명환), 이장자치회장(위성석)이 탔다.

시가 행진(행군)(2017.05.01, 사진 마동욱)

시연

 

고줄이 행사장에 이르면 청사초롱 장식을 해체 한 뒤 고싸움을 시작한다. 고싸움을 시작하기 앞서 장흥의 특유의 농악 벅꾸놀이로 장정들의 사기를 충전시키고 편대장과 부장 3명이 위에 올라타 상대 고의 기세를 살핀 뒤 옷을 벗어 저치고 기세를 돋우며 밀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승패는 상대방의 고머리를 누르고 또 줄을 땅에 닿게 하면 된다. 고싸움이 끝난 뒤에는 줄이 달린 멜대를 빼 내고 줄당기기를 한다. 고싸움에서 진 편이 줄을 어깨에 메고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면서고 머리를 댔다 떼었다 반복하며 응전을 촉구하고, 암수 고머리가 끼워지면 줄 들었다!”라는 소리와 동시에 비녀목이 찔러지고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승부가 쉽게 나지 않을 경우 이튿날로 연장해 펼치기도 했다. 2023년의 줄패장은 동부 고는 윤만수님최석중님, 서부 고는 박인식님박성남님이었다.

 

장흥 고싸움줄당기기는 도작문화권의 보편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도 있으며 향토성, 예술성, 축제성이 드러난다. 150년 이상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전형(典型)을 유지하고 있으며 민족정체성 함양과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에 무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를 잘 이어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라 할 것이다.

 

참고

-이경엽양기수이옥희,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 장흥문화원, 민속원, 2013.

-장흥군장흥문화원문화재청, 미래무형유산과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의 전승 방향 학술회의(발표문집),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영상실, 2023.03.03.

-양기수김희태김상찬,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 고줄 제작과정-장흥읍 행원리, 2023.04.07.~04.10.-, 장흥군 제출자료, 2023.

-김희태,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의 유래와 전승, 53회 장흥군민의날보림문화제 고싸움 사진집, 마동욱사진, 2023.

**2023년 사진 - 양기수마동욱김상찬김희태

 

장흥군민의날 보림문화제 시연(공설운동장, 2019.05.02, 사진 김희태)

장흥군민의날 보림문화제 시연(공설운동장, 2017.05.01, 사진 마동욱)

줄당기기(2017.05.01., 사진 마동욱)
1970년 줄당기기(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광주, 사진 지춘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