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02 -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4종의 건조물 기록, 1761년 상량

향토학인 2023. 5. 16. 10:58

인지의 즐거움302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4종의 건조물 기록, 1761년 상량

 

김희태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예고(2023.04.27.) 되었다. 1986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승격 지정인 셈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건립이나 수리 등 관련 자료를 살피다가 몇가지 중요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현재의 대웅보전 건립에 관한 기록인데 네가지이다. 이들 기록이 서로 연결되어 목조 건조물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어 흔하지 않은 사례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법당안 서쪽 벽에 <만덕산 백련사 대법당 중수기> 현판 액자가 걸려 있다. 세로 145.2, 가로 42로 큰 편이다. 1765년에 강진 출신 학자 동강(桐岡) 이의경(李毅敬, 1704~1778) 글을 지었고, 총신(聰信) 스님이 글씨를 썼다. 이 현판은 대웅보전의 중건 배경과 연도,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사료 가치가 있다. 현판에는 중구(重搆)로 표기하였다. 중건의 의미라 하겠다.

 

앞 부분은 이의경이 지은 글이다. ‘전몽 작악(旃蒙作噩)’의 고갑자로 표기된 연기가 있다. 전몽(旃蒙)은 을(), 작악(作噩)은 유()에 해당되니 을유년(1765, 영조 41)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뒷부분은 대시주질, 연화질, 목수질 등 중수 당시 참여한 직임과 승명, 인명이다. 끝에 숭정 기원후 재을유 사월 산인 총신서(崇禎紀元後再乙酉四月日 山人聰信書)’라 하여 총신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의경이 지은 글을 백련사 스님 총신이 글씨를 쓴 것이다.

 

숭정 기원년1628년으로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이다. 1628년으로부터 두 번째[] 을유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첫 을유년[1645]은 제하고 재을유로 표기한 것 같다. 실제로는 삼을유인 셈이다. 1765년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1765년에 이의경이 지은 글을 같은 해 4월에 백련사 스님 총신이 글씨를 써서 새긴 것이다.

 

<백련사 대법당 중수기> 현판의 내용은 1760(영조 36) 2월에 큰불이 일어나 대부분 전각이 피해를 입어 중수를 한 것이다. 현판에는 이의경이 지은 기문에 이어 대시주질(大施主秩)과 연화질, 야장(冶匠), 목수질(木手秩), 산중대덕질, 전행질(前行秩) 지전(持殿), 삼강(三綱), 서기(書記) 등의 직임이 기록되어 있다. 중건을 서원하고 각자 분담해서 여러 곳에서 시주를 모아 176148일 불사를 시작, 1762413일 대법당 등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현판에는 대시주질(大施主秩)은 가선 오이상(嘉善 吳以尙), 가선대부 비구 왈찰(嘉善大夫 比丘曰札) 19, 연화질(緣化秩)은 화주 전행주지 태화(化主前行住持太和), 별좌 윤철(別坐潤哲), 대도감 전행주지 왈찰(大都監前行住持曰札), 당시 주지 혜철(其時住持 惠哲), 산중대덕질(山中大德秩) 선사 영택(禪師永宅) 등이다. 특히 야장(冶匠) 김중기(金重己), 김덕빈(金德彬), 박준손(朴俊孫), 목수질(木手秩) 도편수 승 유신(都片手僧維信), 부편수 이동빈(副片手李東彬), 승묵편수 승 대인(繩墨片手僧大仁) 등 대웅보전을 건립할 때 참여한 기술인들의 직역과 인명, 승명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참여한 승려들의 직임과 승명을 알 수 있어 조선후기 18세기 후반의 사찰 운영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무엇보다도 목조 건축물을 짓는데 참여한 기술 장인들이 기록된 점도 중요하다. 야장(冶匠)은 민간 기술장인으로 보이는 네명이고, 목수 질로 도편수는 승려[維信] 대목장, 부편수는 민간인[李東彬] 대목장이다. 승묵편수(繩墨片手)는 실측 기술장인이라 하겠는데 승려[大仁]가 맡았다. 1761~62년의 목조 건출물의 설계와 시공 장인들의 직임과 인명 기록이다. 이들이 참여하여 짓거나 수리한 건조물이 또 있나 찾아 볼 일이다.

 

이 중건기의 글을 지은 동강 이의경(1704~1778)의 문집 동강유고(桐岡遺稿)(2)<강진 만덕산 백련사 중수기(康津萬德山白蓮寺重修記)>가 실려 있다. 대웅보전 현판에 실린 글보다 내용이 많지만 내용은 중수에 관한 것이다. 문집에 실린 글은 용어나 인명, 승명이 표기가 다른 경우도 보인다. 현판의 도편수는 문집에서는 도료장(都料匠) 부도료장 이름은 이동빈(李東賓) 등이다.

 

중건기 현판과 문집에 실린 기문을 보면, 백련사는 1760(영조 36) 21일 밤에 발생한 대화재로 대웅전과 만경루, 시왕전 등 불전과 요사를 합쳐 수백여 칸이 소실되었다. 곧 총신(聰信), 왈찰(曰札), 지정(智正), 혜철(惠哲), 태화(太和), 신징(愼澄), 규연(圭演), 찰연(察演), 규철(閏哲), 연징(蓮澄), 붕관(鵬寬) 등이 중건을 서원한 뒤 재목을 구하고 기술자를 모았다. 공사는 17614월 초파일에 시작하여, 1년 만인 1762413일에 완료하였다.

 

1761년의 불사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나한전(혹은 응진당), 사왕문, 진여문(眞如門) 등이 건립되었고 비전(碑殿, 明績殿), 판전(板殿, 八藏殿), 약사전(藥師殿), 관음전은 1760년의 화재를 겪지 않았다.

 

위 두가지의 기록과 함께 2010년 대웅보전 해체 수리 당시 종도리 하부에서 확인한 겉상량 내용은 당해 목조 건조물의 절대연대를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다. ‘1761년 상량[乾隆 二十六年 辛巳]’이 쓰인 겉상량 기록은 수리보고서 자료에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사찰 기록인 만덕사지에서도 중수 기록이 확인된다. , 대웅보전 건축물 자체의 종도리 하부의 겉상량문, 법당에 걸린 중수기 현판, 동강 이의경의 문집에 실린 중수기문, 백련사 사적기라 할 만덕사지등 네가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만덕산 백련사 대법당 중수기(국역 : 엄찬영)

 

만덕산 백련사 대법당 중건[重搆]한 일이 이루어졌음을 산에 알리고 조기대사(照起大師)가 나를 찾아와 그 사연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이 절의 뛰어난 경치는 동남(東南)에서 으뜸이니 이는 곧 그림으로 그릴 수 없고 오직 역대에 흥망성쇠를 반복한다고 하였다. 대사가 크게 말하면서 와 말하였다. 이 절은 처음 만든 조사는 바로 신라 문성왕(文成王) 왕사 무염국사(無染國師)이다.

萬德山白蓮社大法堂, 重搆之役, 告成其山, 照起大師來要, 余記其事由. 余曰是寺形勝, 甲于東南, 此則言之不可畵, 唯是歷代頹興復之. 因師其大說來, 師曰此刹開山初祖, 卽新羅文成王師, 無染國師是也.

 

고려 시대 원묘국사(圓妙國師)가 두 번째 창건하고 무외대사(無畏大師)가 세 번째 창건하고 진정국사(眞靜國師)가 네 번째 창건하였다. 조선 세종 때 천태대사(天台大師)가 다섯 번째 창건하였다. 고려 때 무너진 연유는 모르겠으나 천태 때에는 왜구가 요란하여 폐허를 이루었으니 원묘, 무외, 진정, 천태는 모두 대선덕(大禪德)으로 수복(修復)할 수 있었다.

高麗圓妙國師再刱之, 無畏大師三刱之, 眞靜國師四刱之. 我世宗朝, 天台行乎大師五刱之. 麗時墜, 未知緣何故, 而天台時, 則盖因倭擾致荒茀, 而圓妙也無畏也眞淨也天台也, 皆以大禪德. 故能得旋修復也.

 

오늘날의 역사(役事)는 경진(庚辰)21일 밤 화재로 다 불타버린 이유에서이다. 절의 스님이 왈찰(曰刹), 지정(智正), 혜철(惠哲), 태화(太和), 신징(愼澄), 규연(圭演), 찰연(察演), 규철(閏哲), 연징(蓮澄), 붕관(鵬寬) 등이 반드시 복원을 맹세하고 나서 머리를 나누어 시주를 모으고 혹은 그 사유재산을 다하여서 신사(辛巳)(1761, 영조 37) 4월 초파일 처음 일을 시작하여 임오(壬午)(1762) 413일 신미(辛未) 일에 완공하였다. 하루아침에 다 옛 모습을 되찾고 대법당에서 치력(致力)을 다하니 그 규모가 웅장하여 자못 전날에 비해서 나은 셈이 되었다. 대개 이 절의 부흥은 여타와는 드물고 인도문자로 다르다. 비문(碑文)에서 소위 온화한 일이 많아 빙빙 돌아 모인 것은 어찌 신령한 땅의 경이로움이 아니겠는가? 자연히 부처의 힘이 몰래 보호하였다는 일이 과연 이것이다.

今玆之役, 盖緣庚辰二月初一日, 夜火災焚燒殆盡. 寺之僧曰刹與智正·惠哲·太和·愼澄·圭演·察演·閏哲·蓮澄·鵬寬等, 誓必復建, 分頭出募檀施, 或磬竭其私財, 以辛巳四月初八日始役, 斷乎于壬午四月十三日辛未. 能一日盡復舊觀, 而極致力于大法堂, 其規模宏敞, 殆迭古而過之. 盖是寺興與他尋常, 梵字有異. 碑文所謂夷非一, 而旋復修葺者, 豈非地靈境異 自有佛力之冥護者, 果是也.

 

그러나 인사(人事)를 가지고 말하면 옛날부터 외호(外護)를 잘하는 사람이 많기에 다 보시하기에는 쉽고 오늘날 진심으로 단나(檀那 시주(施主)하는 사람은 적기에 영차! 하며 힘쓰기는 어렵다. 그런즉 왈찰(日刹) 등이 발원하여 일을 모은 그 공덕도 어찌 달마대사가 말하는 하늘과 사람의 인과가 적다고 말함이겠는가? 바라건대 글로 다 써서 후대 사람에게 보이노라. 나는 말한다. 대사의 말이 다하였으니 거듭 글을 청할 수 없어 이 말을 가지고 윤색(潤色)하여서 백련사의 중수한 사적의 기문을 삼는다.

然以人事言之, 古之善根外護者衆, 故擧施爲也易;今之信心檀那者尠, 故邪許用力也難. 然則曰刹等能發願而集事者, 其功德亦, 豈可以達摩所云人天之果而小之哉? 願悉書之, 以示後來者. 余曰師之言悉矣, 無可疊狀請, 以是言而潤色之, 以爲白蓮社重修事蹟之記.

 

을유년(1765, 영조 41) 윤달 동강 은자는 기록하다.

旃蒙作噩 餘分之月 桐岡隱者 識.

 

대시주질 대시주 가선 오이상

대시주 가선대부 김한징 임창이

대시주 통정대부 비구 왈찰 박태무

대시주 가선대부 오후량 정백추

대시주 가선대부 조선항 김인귀

대시주 가선대부 김만재 박동언

대시주 가선대부 한귀동 김회연

자기평 이춘숭

대시주 가선대부 비구 지정 김막대

비구 규연 김수명

 

연화질

화주 전 행 주지 태화 치장 김중기 공양주 포한

별좌 규철 김덕빈 상흔

대도감 전 행 주지 왈찰 박후손

기타 주지 혜철 목수질 도편수 스님 유신

부편수 이동빈

승묵편수 스님 대인

 

산중 대덕질 전행질 삼강 숙철

선사 영택 전 행 가선 왈찰 연징

선사 광학 전 행 가선 지정 최운

선사 조기 전 행 통정 두잠 서기 우화

선사 광우 전 행 판사 혜철 내왕 윤기

선사 지환 전 행 주지 태화 대기

성각 전 행 주지 신징

지전 총신 전 행 주지 규연

자언 전 행 주지 찰연

덕안 대공덕 지정

연장 신징

패장 숙경

수 창순

 

大施主秩大施主嘉善吳以尙

大施主嘉善大夫金漢澄 任昌伊

大施主通政大夫比丘曰刹 朴太茂

大施主嘉善大夫吳厚量 丁白秋

大施主嘉善大夫趙善恒 金仁貴

大施主嘉善大夫金萬才 朴東彦

大施主嘉善大夫韓貴同 金會連

子己平 李春崇

大施主嘉善大夫比丘智正 金莫大

比丘圭演 金守明

 

緣化秩

 

化主前行住持 太和 治匠 金重己 供養主 抱閑

別坐 閏哲 金德彬 尙欣

大都監前行住持 曰刹 朴後孫

其時住持 惠哲 木手秩 都片手 僧維信

副片手 李東彬

繩墨片手 僧大仁

 

山中大德秩 前行秩 三綱 淑哲

禪師 永宅 前行嘉善曰刹 蓮澄

禪師 光學 前行嘉善智正 最云

禪師 照起 前行通政杜岑 書記 宇華

禪師 曠佑 前行判事惠哲 來往 閏已

禪師 智還 前行住持太和 大已

性覺 前行住持愼澄

持殿 聰信 前行住持圭演

慈彦 前行住持察演

德岸 大功德 智正

領將 愼澄

牌杖 淑冏

刻手 暢淳

 

숭정기원 후 두 번째 을유년(1765) 4월 일 산인 총신이 쓰다.

崇禎紀元後再乙酉四月日山人聰信書

 

 

대웅보전의 또 다른 기록 자료

 

백련사 대웅보전의 이광사 필 大雄寶殿편액도 동국진체의 정수라 평가 받고 있으며, 안에 걸린 萬德山白蓮社편액과 함께 서예사적 의미가 크다.

 

법당 안에는 중건기 현판과 함께 두개의 현판이 더 있다.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 편액과 해탈문 중수기현판이다.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 편액은 김생 글씨(傳 金生筆)로 전한다. 김생(金生, 711~791)은 신라 경덕왕 대의 명필로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과 강진 백련사 만덕산 백련사 편액이 그의 글씨로 전해 온다. 그런데 백련사라는 용어가 김생 당대에 쓰였는지 살펴 볼 일이다. 편액 옆에는 2행으로 <新羅聖德王時 金生筆蹟 此寺千幾百年傳來 更爲水墨塗粉 此片缺虧 遺感千萬耳>라는 글이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편찬(1668)한 낭선군 이우(1637~1693)<만덕산 백련사비>를 제서(題書)할 때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건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김생의 글씨를 보고 쓴 발문(跋文)이 있다. 백련사 대웅보전 글씨를 본 것 같다. 18085월과 18107월이다.

 

김생(金生)의 글씨에 발함(정약용, <다산시문집> 14권 발())

위 신라(新羅) 김생(金生)의 글씨는 불경(佛經) 중에서 오려낸 것이다. 각본(刻本)의 김생 글씨는 모두 가늘고 힘차며 빼어났는데, 이 글씨는 획이 매우 통통하니, 아마 변한 서체일 것이다. 감별하는 자는 이 점을 살피기 바란다. 무진년(순조 8, 1808) 5월에 열수산인(洌水散人)은 발한다. 전번에 발을 쓸 때도 의심하였었는데, 지금 다시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경오년(1810) 7월에 쓴다.[右新羅 金生書于佛乘中割取者也刻本金生書皆瘦勁峭拔此書肥澤特甚盖其變相也賞鑒者審焉洌水散人跋戊辰中夏前跋固已疑之今日再觀猶然庚午首秋題]”

 

해탈문 중수기현판은 1836(헌종 2, 병신) 봄에 쓴 기록으로 연기 기록은 道光十六年丙申季春晶雲智逸記이다. 1해탈문을 중수한 사실이 적혀 있다. 해탈문은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만경루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2010년 해체 수리 당시 확인된 종도리 하부 겉상량(乾隆 二十六年 辛巳, 1761년)
만덕산백련사대법당중수기 현판(1765년, 42×145.2㎝ )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중수기(부분)(동강유고, 이의경 1765년)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 편액

발김생서(跋金生書)(정약용, 다산시문집)

대웅보전 편액(이광사 필)

 

해탈문중수기 현판(1836, 41.3×141.2)

 

*참고 자료

동강유집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자료 보고서(신청서(전라남·강진군 제공)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예고 보도자료(문화재청·전라남·강진군)

문화재위원회 회의록(2023.04.20.), 관보(지정예고)

사진 : 전라남도·강진군·성대철·김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