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07 - 1512년 정문을 세워 표창하다 – 강진 효자 고수정(高守精)

향토학인 2023. 7. 18. 10:03

인지의 즐거움307

 

1512년 정문을 세워 표창하다 – 강진 효자 고수정(高守精)

 

김희태

 

조선시대 들어 강진의 효행 인물로 효자 고수정(高守精)이 있다. 고수정은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관을 만들 나무를 완도에서 구해 놓았는데 목수가 여러 날이 지나도 오지 않자 3일간 음식을 먹지 않고 나무를 부둥켜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를 가상히 여긴 완도 첨사가 나무를 베어 보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제사음식을 손수지어 올리고 본인은 죽을 먹으면서 3년상을 마치기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 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성종임금이 이같은 소식을 듣고 진원현감을 제수했다. 진원은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과 남면 일원에 있던 고을이다.

 

고수정 기록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강진 신증편 효자에 나온다. 내용중에 금상(今上七年)’ 기록이 보이는데 금상(今上)’책의 편찬 당시 임금이라는 의미로 중종을 말한다. 중종 7년은 1512년이다.

 

고수정(高守精) 어머니가 죽으니, 죽을 먹고 시묘하면서 상을 마쳤다. 제찬을 몸소 장만하여 바치었으며, 남과 이야기하다가 간혹 부모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소리내어 슬피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상(今上, 중종) 7(1512)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高守精母死廬墓啜粥終喪親具奠饌與人言或及父母未嘗不失聲哀哭今上七年旌閭/신증동국여지승람37 강진현 신증 효자조)

 

고수정의 효행과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1512(중종 7년 임신) 59(임자)조에 기록되지 않은 충신 효자 열부의 명단을 속간하여 책을 만들게 하다는 내용에 있다.

 

앞서 상이 중외에 교유하기를, “본조(本朝) 충신ㆍ효자ㆍ열부의 사적이 미처 도사(圖寫)되지 못한 자를 빠짐없이 찾아 내어 속간(續刊)하여 책을 만들라.” 하였는데, 예조가 각도에 이를 알려서 절의(節義)로 정표할 만한 사람의 성명ㆍ직함을 빠짐없이 적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남곤(南袞)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강진현(康津縣)에 사는 전 현감(縣監) 고수정(高水精)은 어미의 상을 당해 빈소 앞에 엎드려서 거의 한 달 동안 음식을 조금도 먹지 않았으며, 장례를 치른 뒤에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면서 3년을 마치되 전물(奠物)은 자신이 손수 지었습니다. 거상을 마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혹 부모의 일을 말하게 되면 일찍이 실성 통곡(失聲慟哭)하지 않는 적이 없다 합니다.”(先是, 上敎諭中外曰: "本朝忠臣孝子烈婦事績, 未及圖寫者, 竝無遺搜摭, 續印成冊, 禮曹行移各道, 節義可旌人姓名職銜, 使無遺牒報" 至是, 全羅道觀察使南袞啓:…… 康津縣居前縣監高水精, 遭母喪, 俯伏殯前, 勺飮不入口者幾一朔, 及葬廬於墓側, 啜粥終三年, 奠物親自炊()〕 。 終制後, 鄕人或有言及父母之事, 未嘗不號慟失聲云"/중종실록15, 중종 7(1512) 59壬子 2번째기사)

 

이어 중종 12년 정축(1517) 11(정축)조에는 전라도 관찰사 남곤이 충신ㆍ열녀ㆍ효자에게 정문하고 복호하기를 장계하다는 내용에 다음 기록이 나온다.

 

전라도 관찰사 남곤이 장계(狀啓)하기를, “강진(康津)에 사는 전() 현감(縣監) 고수정(高守精)은 효행(孝行)의 사적(事跡)이 특이하니 모두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함이 마땅합니다.하였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全羅道觀察使南袞狀啓:康津居前縣監高守精, 孝行事跡卓異, 竝宜旌門復戶, 而宋世貞四人, 俱是士流, 賞職勸勵, 何如? 竝依允/중종실록27, 중종 12(1517) 11丁丑 3번째기사)

 

정문(旌門)은 충신ㆍ효자ㆍ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붉은 색으로 단장하고, 그 현액(懸額)에다 충신ㆍ효자ㆍ열녀의 직함ㆍ성명 등을 새기는데,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복호(復戶)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고수정의 효행 사실과 정려 관련 사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 효자조 기록에 이어 동국신속삼강행실도(1집 효자도 권1)에도 실린다.(한국고전번역DB 인용)

 

수정여묘(守精廬墓) - 고수정이 여묘를 지키다

고수정은 강진현 사람이다. 어미 돌아가거늘 시묘를 하고 죽을 먹으며 상례를 마치면서도 몸소 제사 음식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말하매, 혹 부모의 일을 말하게 되면 일찍이 소리를 내지 못하고(말을 잇지 못하고) 서러워 울기만 하였더라. 공희대왕 때 정려를 내렸다.[원문 : 守精廬墓/高守精康津縣人母死廬墓啜粥終喪親具奠饌與人言或及父母未嘗不失聲哀哭 恭僖大王朝㫌閭/ 언해 ; 고슈졍은 강진현 사이라 어미 죽거시묘고 쥭머거 상 되 친히 뎐찬을 초고 사으로 더브러 말호매 혹 부모의게 미츠면 일즉 실셩고 셜워 울기아니티 아니더라 공희대왕됴애 졍녀시니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광해군 9)에 유근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다.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비롯하여 신라ㆍ고려ㆍ조선 시대의 충신ㆍ효자ㆍ열녀의 사적(事跡)을 수록하고 그 덕행을 찬양하였다. 한문으로 적고 한글로 풀이하였으며, 본문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였다. 1818책의 목판본이다.

 

대동야승에 실린 해동잡록(5 본조)에도 고수정(高守精) : 강진(康津) 사람이며 어머니가 죽자 죽을 먹고 3년상을 마쳤고 직접 상식 드릴 찬을 마련하였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혹 부모의 일을 언급하면 슬프게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수정의 효자 관련 유산은 강진읍 영파리 산1-1(임천리 산45) 일원에 있다. ‘강진 제주고씨 충효정려와 비(康津 濟州高氏 忠孝旌閭)’ 명칭으로 강진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진의 충효 문화유산 강의 자료중(2023.07.19. 강진향교주최, 장소 강진 유림회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수정여묘(守精廬墓) - 고수정이 여묘를 지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효자조
고수정선생 효자 정려 명정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