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04 - 15만평의 너른 유림수(柳林藪), 광주의 비보숲

향토학인 2023. 5. 20. 16:35

인지의 즐거움304

 

15만평의 너른 유림수(柳林藪), 광주의 비보숲

 

김희태

 

1872전라좌도 광주지도에 광주읍성 공북루 밖에 대로 양옆으로 유림수(柳林藪)라는 표기와 함께 숲이 그려져 있다.

 

이 유림숲에 대해서는 미암 유희춘(1513~1577)의 시 버드나무 숲을 지나다가[過柳林]가 가장 이른 시기일 것 같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숲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그루 도랑에 그늘진다 했으니 넓은 지역임이 나타난다.

 

해 가린 천 그루에 맑은 도랑 그늘지는데

한 밤새에 쓸쓸하게 도끼 자국 남아있네

어찌하면 우로에 젖어 길러지게 하여

훗날 우거진 숲에 봉황새 와서 살게 할까

 

千株蔽日蔭淸渠(천주폐일음청거)

一夜蕭條斤斧餘(일야소조근부여)

安得栽培濡雨露(안득재배유우로)

穹林他日鳳來居(궁림타일봉래거)

 

이 유림숲은 지금의 임동을 가로지르는 국도 1호선과 광주천 사이로 보고 넓이를 개략해 보니 얼추 15만평은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 읍성이 10만여평이니 그 널찍함을 알 수 있다.

 

광주의 수구막이, 비보숲, 군사용 보호림, 방풍림, 가로수 등 여러 기능이 전해진다. 수구막이 비보숲이고 보호림일성 싶다. 이처럼 너른 숲이다 보니 호랑이가 몰려 오기도 한다.

 

그래서 유림숲에서 수렵도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사냥을 하여 호환을 다스린 것이다. 오재 조정만(寤齋 趙正萬, 1656~1739)의 시에 유림숲에서 수렵을 구경하고 두공부의 동수행(冬狩行)’ 시운을 차하여 설악산인에게 부쳐 화답을 요청하다(柳林藪觀獵 次杜工部冬狩行韻 寄雪岳山人要和 [戊子])라는 시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무자라는 연기가 있어 1708(숙종 34)이다.

 

조정만은 1707년에 7월에 광산현감에 부임하였다가 광주목이 복호되면서 17071222일 목사로 승격되어 1708년까지 재임하였다. 그 시의 일부만 보자.

 

해양의 관렵은 본디 웅장하다 칭해지니

대장의 약속은 군공을 따라서 행한다네

이른 아침 호각을 불며 북문을 나서니

나의 수레 견고하고 나의 말도 화동하네

 

천군이 유림의 숲을 사방으로 에워싸서

징과 북을 두드리니 창공이 진동하네

형초의 검객은 힘으로 호랑이를 잡으니

푸른 물소와 노란 큰 곰은 세지도 않네

 

海陽觀獵素稱雄[해양관렵소칭웅]

大將約束依軍功[대장약속의군공]

平明吹角出北門[평명취각출북문]

我車旣攻我馬同[아거기공아마동]

 

千軍四圍柳林藪[천군사위유림수]

鉦皷合沓震高穹[정고합답진고궁]

荊楚劒客力扼虎[형초검객력액호]

不數蒼兕與黃熊[불수창시여황웅]

 

호각 불며 북문을 나서 유림숲을 에워싸고 징과 북을 두드리면서 사냥을 하여 호랑이를 잡는다. 광주는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종종 있었는데, 읍성에서 가까운 유림숲까지 호랑이가 출몰했었던 것 같다. 고을 수령의 입장에서는 호랑이로부터 민가를 보호하기 위해 사냥을 하였고 그 과정을 시로 남긴 것이다.

 

조정만 복사의 문집에는  「광주 증심사 제증 행문상인(光州證心寺 題贈行門上人)」, 「서석상봉 시삼연(瑞石上峰 示三淵) 등의 시가 있고 적벽을 유람하고 지은 복천동유기(福川同遊記)가 있다. 

 

수은 강항의 향교상량문에 원래 향교가 옛적에는 성곽의 밖에 있었는데 어토(於菟, 호랑이)가 때로 화심(禍心)을 드러내어 이에 저자로 옮기니라는 내용이 있어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서 호환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인간과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가축과 달리 야생으로 위협의 존재였고 사람들도 호랑이에 다치고 죽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한 전문적인 군사인 착호군(捉虎軍)이 있었고, 호랑이가 나타나면 백성들과 착호군, 그리고 이들을 책임진 수령이 잽싸게 해야 할 행동 요령도 있었다. 호랑이 잡는 기술은 활쏘기[], [], 쇠몽치[], 함정[], 끈끈이[], (), 쇠뇌[], 갈고리[], 연기[] 9가지가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온다.

 

양경지(梁敬之, 1662~1734)광주목사 조정만이 유림에서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읊다(次趙光州柳林觀獵韻)는 시를 짓는다.

 

전라좌도 광주지도(1872)에는 공북루 밖 대로가로 유림수(柳林藪)가 보이는데, 이 무렵 우잠 장태경(愚岑 張泰慶, 1809~1887)유림의 가을바람 (柳林藪秋風)이란 시를 남긴다.

 

어디서 온 군마인데 보폭이 이리 넓은가

초나라 한나라 군대 함성, 세력이 엄청나네.

놀라서 사립문 열고 몸 세워 일어나니

나무에 바람스치는데 그 모습 그리지 못하네

 

何來軍馬步來濶(하래군마보래활)

楚漢兵聲勢不孤(초한병성세불고)

驚開蓬戶挺身立(경개봉호정신립)

風在枝頭形未圖(풍재지두형미도)

 

1917년 지도에는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62그루의 유림숲 나무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임동에는 농업학교, 농사시험장, 임업묘포, 원잠종제조소, 심지어 형무소농장까지 있었다. 이 시설은 유림숲 터에 세웠으며 차츰 유림숲은 자취를 잃어 갔다.

 

유림수처럼 1872년 함평지도에 나오는 향교 앞의 노거수림, 광양지도에 있는 읍수(邑藪)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쉽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는 유림숲속 방직공장: 버들꽃씨의 기록기획전시회를 202297일부터 1030일까지 하였고 전시도록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