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98 - 규봉 오르다가 고목나무 아래 시 한수, 고봉 기대승

향토학인 2023. 2. 26. 16:26

인지의 즐거움298

 

규봉 오르다가 고목나무 아래 시 한수, 고봉 기대승

 

김희태

 

고봉 기대승(1527~1572)선생은 무등산 규봉을 오르다가 고목 나무 아래서 쉬면 시를 한 수 읊는다.

 

속진을 떨치고 무등산에 올라 규봉을 가는 길. 맑고 높은 하늘 막힘이 없다. 돌틈에서 피어난 꽃은 그 돌과 한 몸이 된듯한데, 그 옆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여기서 잠깐 쉬어 가야 겠다. 나무를 등지고 저 하늘 바라 보니 구름만 두둥실. 노니는 길 완상하니 신선을 낀 듯하여라”. 이는 소식의 전적벽부에 나오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꽃이 핀 돌틈이라 한 걸 보니 늦봄쯤 되는가 보다.

 

규봉에 이르다到圭峯

 

명랑하게 티끌 없는 지경이고

청고하게 막힘없는 하늘이로세

그윽한 꽃 돌 틈에 쓰러지고

고목나무 바위 가에 기대었네

 

해가 도니 남명이 널찍하고

구름 옮기니 북두가 매달렸네

놀러 와서 좋은 경관 모두 완상하니

혼연히 나는 신선을 낀 듯하여라

 

朗廓無塵境(낭확무진경) 淸高不住天(청고부주천)

幽花欹石罅(유화의석하) 古木倚巖邊(고목의암변)

 

日轉南溟活(일전남명활) 雲移北斗懸(운이북두현)

來遊窮勝賞(내유궁승상) 渾覺挾飛仙(혼각협비선)

 

시월 어느날 석양의 고목

 

시월의 경관을 읊은 시에는 석양의 까마귀가 고목에 모여드는 풍경을 읊었다. 아침녁, 담장 위에 흩뿌린 듯 솜실 같은 서리가 덮어주고 있다. 천기가 돌아 다시 시월이 된 정경이다. 낮이 되자 따뜻한 햇살은 저 어덕 위의 사람들에게 두루 쪼여 준다. 저물녁, 까마귀들이 고목에 모여 든다. 다시 맑은 새벽 안개, 속진을 적셔 버린다.

 

소춘 시월의 어느 한나절, 안개에 서리에 햇살에 석양에... 이제 모진 추위가 다가 오겠구나. 창호지를 바르고 옷을 껴 입어야지. 원기를 길러야지.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석양 고목에 날아드는 기원으로 담았다. 그저 단순하게 철이 바뀐 것을 대비하려기 보다 양진(養眞)”이라 하여 진리의 길을 더 탐구하려는 것 같다. 어쩌면 만년의 시작인 것도 같다.

 

소춘小春

 

시월을 예부터 소춘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천기가 다시 돌아와 새롭네

가벼운 서리는 담장의 풀을 공교로이 아껴 주고

따뜻한 햇살은 언덕 위 사람을 두루 쪼여 주네

 

석양의 까마귀들은 고목에 모여들고

맑은 새벽안개는 더러운 먼지 적시네

알겠구나 절서가 모진 추위 다가오니

창을 막고 옷을 껴입고 원기 길러야 함을

 

十月從來號小春(시월종래호소춘)

秖今天氣更回新(지금천기갱회신)

微霜巧貸墻根草(미상교대장근초)

煖日偏烘陌上人(난일편홍맥상인)

 

薄暮烏鳶盤古木(박모오연반고목)

淸晨煙霧浥淤塵(청신연무읍어진)

須知節序行嚴冱(수지절서행엄호)

墐戶兼衣且養眞(근호겸의차양진)

 

나지막한 흙담 너머 나무

 

고봉 기대승은 옛집을 보며 형상화 한다. 그 집은 낮은 담이 둘러 있는데, 흙담이 나지막하니 나무는 더 높아 보인다. 푸른 들과 아름다운 산, 대숲에 드리운다. 어쩌면 광주 한 켠의 생가 정경이 아닐까. 한가히 지내며 홀로 처하였지만 달빛은 내마음인 듯 비춰주니 어여쁘지 아니한가.

 

지난 시절 말하고 웃고 울었는데 그 과거도 내세도 지금도 덧없는 것 같다. 그래도 애써 또 배워 나가는 것은 내 일이 아니겠는가. 게으름을 탓하며 심기일전 하리라 헤아려 본다. 저 높은 나무처럼.

 

속절없이 지어 보다謾成

 

푸른 들 아름다운 산 대숲에 비치고

낮은 담에 높은 나무 옛집에 임했도다

한가히 지내니 -원문 빠짐- 하고자 함 따라

홀로 처하니 달빛 마음에 비춰 때로 어여쁘네

 

지난 자취 백 년 동안 말하고 웃고 울었으며

덧없는 인생 일천 겁은 과거도 내세도 지금도

애써 배움 나의 일임을 또한 알았느니

게으름에 굴러 빠짐 심히 부끄럽네

 

綠野佳山映竹林(녹야가산영죽림)

短墻喬木舊窺臨(단장교목구규임)

投閒□□□從欲(투한□□□종욕)

處獨時憐月照心(처독시련월조심)

 

陳迹百年言笑哭(진적백년언소곡)

浮生千刼去來今(부생천겁거래금)

亦知强學爲吾事(역지강학위오사)

深愧疎慵轉陸沉(심괴소용전육침)

 

*이야기가 있는 광주의 나무와 호수, 대동문화재단

규봉 가는 길(2020.10.29.)

到圭峯() / 小春 / 謾成(고봉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