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93
사나운 호랑이를 제거한 찬사 - 제 악호 찬(除惡虎贊), 1617년, 운제록(雲堤錄)-
김희태
호랑이와 관련한 오래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1617년 12월 24일, 영광에서의 일이다. 406년전이다.
영광 지역에 사나운 호랑이가 성내로 들어와 관노(官奴)를 물고 갔다. 관아의 뒤편 숲속으로 들어 가버렸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고, 그 관노의 친척들은 울고 불고 난리통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니 이번만이 아니고, 유독 영광은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심했다. 그것은 영광은 성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경내에 큰 산이 많았고 무성한 수풀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웃 고을 군현보다 호환이 배나 더 많았다. 유독 1616년 사나운 호랑이가 포학을 부렸다. 백성들이 기르던 말이나 개 돼지를 잡아 먹어 치우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호랑이에 다친 사람은 스무명 남짓이나 될 정도였다. 급기야는 사람까지 물어 갔던 것이다.
1617년 12월 24일도 성내에서 호랑이가 관노를 물고 갔다. 이때 군수인 유석증(兪昔曾)이 이른 새벽에 성내의 사수(射手) 약간 명을 모아 몸소 호랑이 굴로 갔다. 사나운 호랑이가 사람처럼 서서 나왔다. 사수가 긴 화살로 호랑이 목을 맞추어 쓰러뜨렸다. 그리고 칡덩쿨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살펴 보니, 두 마리의 큰 호랑이가 모퉁이를 등지고 크게 포효하였다. 사수가 연달아서 호랑이 두 마리도 죽였다. 하루 사이에 호랑이 세 마리를 쏘아 죽이니 호랑이 굴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
호랑이 한마리의 창자를 갈라보니 물고 갔던 관노의 몸체 일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이를 보고 관노의 친척들이 통쾌하다고 외치면서 칭송을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곡하기를 그쳤다. 이로부터 호랑이의 근심이 영광고을에서는 없어졌다고 한다.
당시 영광군수는 유석증(兪昔曾, 1570~1623년)이다. 1615년(광해군 7년 을묘) 윤 8월 23일(정묘) 부임하였다. 1618년 10월 24일 형조 참의로 옮겼다. 1622년 10월 6일 실록 기록에 “유석증은 전에 영광(靈光)의 수령으로 있을 때 청백하고 근신하여 잘 다스렸고”라 하여 선정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영광 사람이 호랑이에 물려 가자 사수를 대동하고 몸소 호랑이굴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유석증은 1597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선정관으로 잘 알려졌는데 나주목사로 두 번 재임했다 처음에는 1610년(광해군 2) 8월부터 10월까지 재임했는데, 친상을 당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두 번째는 1619년(광해군 11)에 부임하였는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국가에 곡식을 바치면서 나주목사 임기 연장을 거듭 요청하였고, 이에 임기가 1622년(광해군 14)까지 연장되었다. “나주 진사 김종해(金宗海) 등 1백여 명이 쌀 1천 석을 바치면서 목사 유석증을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광해군일기』 1622년 10월 6일)는 기록 등이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인간과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가축과 달리 야생의 모습이었다. 위협의 존재였다. 가축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호랑이에 다치고 죽었다. 호환(虎患)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였다. 호랑이를 잡기 위한 전문적인 군사인 착호군(捉虎軍)이 있었고, 호랑이가 나타나면 백성들과 착호군, 그리고 이들을 책임진 수령이 잽싸게 해야 할 행동 요령도 있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호랑이 잡는 9가지 기술이 나온다. 활쏘기[射], 창[鎗], 쇠몽치[椎], 함정[穽], 끈끈이[膠], 총(銃), 쇠뇌[弩], 갈고리[鉤], 연기[熏] 등 9가지 기술 덕분에 호랑이도 인간을 쉽게 대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영광의 호랑이 이야기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 1567~1618) 선생이 쓴 글에 있다. 문집인 『수은집(睡隱集)』에는 실리지 않았고 『운제록(雲堤錄)』에 실려 있다. 『운제록』은 강항이 평시에 쓴 시문을 모은 필사본이다. 현재 3책이 남아 있다. ‘운제(雲堤)’는 강항이 살고 있던 곳이다. 1책의 경우 120편의 글이 있는데 절반정도는 『수은집』에 실리지 않았다. 「제악호찬(除惡虎贊)」을 옮긴다.
사나운 호랑이를 제거한 찬사 – 제 악호 찬(除惡虎贊)
수령이라는 직책은 백성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할 뿐이다. 그래서 이를 일으키면 제사를 지내주고, 능히 큰 환란을 막으면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사전(祀典)에 들게 되는 것이니 선왕이 사람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을 중히 여김이 지극했다.
우리 군은 성을 둘러싼 것이 모두 산이어서 경내에 큰 산과 무성한 수풀이 많기 때문에 호환이 사방의 고을보다 배나 많다. 지난해부터 사나운 호랑이가 포학을 부려 백성이 기르던 소나 말이나 개 돼지를 먹어치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빨에 상한 자가 스무명이나 되었다.
정사(丁巳)년(1617년, 광해군 9) 십이월 이십사일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성중에까지 들어와 관도(官奴)를 물고, 관아의 뒤편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이때 군수인 유후(兪侯, 兪昔曾)가 이른 새벽에 성내의 사수(射手) 약간 명을 모아 몸소 호랑이 굴로 가니, 사나운 호랑이가 사람처럼 서서 나왔다. 사수가 긴 화살로 그 목을 맞추고 칡덩쿨 사이를 헤치고 보니, 또 두 마리의 큰 호랑이가 모퉁이를 등지고 크게 포효하니 사수가 연하여 그 두 마리도 죽였다 이래서 하루사이에 호랑이 굴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
작은 호랑이의 창자를 가르니, 물고 갔던 관노의 신근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이에 그 관노의 친척들이 손을 모아 통쾌하다 칭송하고, 눈물을 흘리며 곡을 거두니 호랑이의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군에 다시는 범의 해가 없게 되니 공은 마땅히 한문공(韓文公)이 악어(鱷魚)를 제어한 일과, 주처(周處)가 맹호를 베어버린 일로 더불어, 서로 수천년 사이에 견줄만하다. 이런 까닭에 그 일을 써서, 무령(武靈)의 고사(故事)에 덧붙여 둔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 『국역 운제록1』, 영광문화원·영광내산서원보존회, 2001. )
除惡虎贊
守令之職 爲民興利除害而已 而興口利 又不奴除一害 故先王之世 口禦大災 則祀之 能捍大患則祀之 死而得列於祀典 則先王之重 除人害至矣 本郡環城皆山 而境內多大山茂林 故虎患倍於四鄰 自去年來惡虎 肆暴食民畜牛馬犬豕 則不足論 其四人于牙口 至二十人 丁巳臘月二十四日 惡虎入城中 攫取口奴入衙後竹林 時郡守兪侯 凌晨聚城內 口口若干名 躬冒虎穴 惡虎人立而出 射手以長 口摏其喉 窮披藤蔓之中 又有二大 口欠偶大哮 射手連斃 其二一曰之內虎穴遂 口剔小虎之腸 則所咬官奴之腎根猶在 口口其親戚祝手稱快破涕轍哭 境內虎患遂絶郡口口害之 卽當與韓文公之除鱷魚 周處之斬口口 相上下於數千載之間矣 余故書之以附武靈故事
이 글 끝의 “한문공이 악어를 제어한 일”과 “주처가 맹호를 베어버린 일”은 백성들이 맹수로부터 어려움을 당한 일을 처리한 고사를 말한다.
“한문공(韓文公)이 악어(鱷魚)를 제어한 일”은 중국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한유(韓愈, 한문공)이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나갔는데, 그곳 악계(惡溪)에 사는 악어가 백성들의 가축을 마구 잡아먹어서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마침내 직접 가서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더니, 바로 그날 저녁에 시내에서 폭풍과 천둥벼락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는 물이 다 말라서 악어들이 마침내 그곳을 떠나 60리 밖으로 옮겨가 더 이상 조주에는 악어의 폐해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3 鰐魚文》에 있다.
“주처(周處)가 맹호를 베어버린 일”은 중국 진(晉)나라 때 양선(楊羨) 사람 주처(周處)는 완력이 세고 방자하게 굴어 남산(南山)의 범, 장교(長橋) 아래의 교룡(蛟龍)과 더불어 향리에서 세 가지 해악으로 꼽혔는데, 뒤에 주처가 개과천선하여 범과 교룡을 사살해서 해악이 모두 사라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58 周處列傳》에 있다.
영광 불갑산에 2009년에 설치된 호랑이 조형물이 있다. 불갑사 일주문 부근 북쪽 산 기슭이다. 1908년 2월 “덫고개”에서 한 농부에 의해 잡힌 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구입하여 일본에서 박제로 제작해 1909년 목포 유달초에 기증했다.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생김새는 뒷머리 부분에 황갈색 바탕의 검은색 줄무늬가 있어 왕(王) 자가 선명한 한국호랑이의 특징이 드러난다. 100년이 넘은 중요한 유산이다. 보존처리를 잘하여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목포유달초교는 1898년 일본인 목포 거류 민단 목포 심상 소학교로 개교하였다. 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이 글을 시작한 거는 2022년 1월이다. “임인(壬寅)”년 호랑이 얘기를 풀어 보자 함이었다. 차일 피일... 11월 10일 전남 문화관광해설사 불갑사 현장 시연 자리에서 간략히 소개를 하였다. 그 글을 다시 들추어 마무리 한다. 일년이 훌쩍이다.
불갑산 호랑이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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