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62 - 해남의 우물과 샘, 역사와 현장

향토학인 2022. 1. 6. 03:18

인지의 즐거움262

 

해남의 우물과 샘, 역사와 현장

 

김희태

 

해남의 우물 문화재 전수 조사(2020~2021년)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해남군에서 관내 우물의 정비와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조사였다. 조사 기관은 마한문화연구원(원장 조근우). 조사위원은 김희태, 황호균(문화재위원), 장모창(청우요박물관 학예사), 이수경(지역유산연구원장). 272개소를 조사하였는데 위치, 규모, 마을 유래, 현황, 구전 등을 정리하였다. 일부는 실측도를 넣었고 고지도 자료도 덧붙였다. 우물이 조사대상이지만 우물 자체가 생활사 현장이라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사정 때문에 외지인이 드나들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마을 어른들은 물론 면사무소나 이장님 등 많은 분들이 협조해 주셨다. 해남 관내 우물은 전수 조사 보고서의 관리카드를 기본으로 관리할 것이다. 이 가운데 95개를 해설한 『해남의 우물』을 냈다. 맺음말 부분을 옮긴다.

 

해남의 우물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자세하지 않다. 청동기 시대에 논산 마전유적의 우물처럼 선사시대부터 사용했을 것이다. 특히 해남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다수 분포하여 많은 부족들이 살았을 것이고 그들의 생활공간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요소여서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금강산성은 몽고군의 침입을 대비해 입보용(入保用)으로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계곡부에서 집수 시설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1429년 8월 26일 세종실록 기록에 “해진(海珍) 남면의 구산성(狗山城)안에는 경작할 만한 밭이 있고, 또 물과 샘이 있어서 성과 관소를 설치할 만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현 성곽조에 해남읍성 안에 우물[井] 12개소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뒤이은 지리지 읍지류에도 12개소가 기록된다.

 

조선 초기에 설치한 전라우수영에도 호지(濠池)와 우물 2개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대동지지』에 보인다. 우수영에 있는 우물 2개소에 대한 명칭이나 위치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전하는 방죽샘이 그중 1개소로 보인다.

 

방죽샘 곁에 있는 중수비 가운데 1724년(경종 4, 雍正 2) 명문이 있어 축조 시기는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1724년 중수비는 앞면에 대시주 양심(梁潯)과 시주 4인, 감역 절충 이지만(折衝 李枝萬)등 4인, 그리고 존위, 좌상, 공, 공양 등 직임과 인명을 새겼다. 이어 1752년(영조 28, 乾隆 17), 1804년(순조 4, 嘉慶 9), 1907년(光武 11), 1948년(단기 4281년) 중수비 등 모두 5개가 있다. 시주와 감동, 감역, 별좌, 공원, 화주, 존위, 좌상, 공양 등 여러 직임과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중수비에는 6개마을(서하, 선두, 서상, 남상, 서외, 남하)이 시주로 참여하고 있어 조선후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내면의 대표적 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진마을 장군샘은 1806년(순조 6) 병인년에 처음 만들고 1839년(헌종 5) 기해년 11월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때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이며, 그 이전부터 우물이 있던 자리일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1597년 8월 20일 이진에 도착하여 배에 머물렀는데 곽란이 극심하여 8월 23일 배에서 내려 이진에서 유숙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민의 정성과 장군샘의 정화수의 영험으로 쾌유되었을 것으로 주민들은 믿고 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날이 갠 것을 기뻐하며[喜晴]’라는 시에서 “곳곳마다 물 길으며 의복을 세탁하네”라 하여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빨래터가 보이는 경관을 읊었다. 1612년(광해군 4) 정월이다. 1645년(인조 23 을유) 59세 때 “밥상을 마주하고[對案]”라는 시에서 “샘물 가득 떠서 보리밥 말아먹으면”이라 한다.「금쇄동기(金鎖洞記)」에도 샘과 우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대흥사나 미황사의 우물, 달마산의 금샘, 관두산 풍혈 및 샘도 중요하다. 심적암의 우물은 스님과 신도의 생활공간이었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치고 일어났던 의병들의 생명수였다.

 

해남 사람들은 방향에 따라 동샘·웃샘·앞샘, 크기에 따라 큰샘·작은샘, 입지 따라 들샘·서당샘·갯샘·절샘, 풍수를 반영하여 청룡골샘, 속신에 따라 쌍둥이샘·불로정샘, 물맛에 따라 두부샘·참샘, 그리고 우수영관이들이 사용한다해 관샘 등 다양하게 불린다.

 

우물을 쌓을 때 재료는 자연석, 판석, 장대석, 시멘트, 토관[土管, 노깡]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석, 판석,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우물의 형태는 원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 다양하다. 특히 방형 판석을 육각형으로 쌓은 우물은 조선후기 중수 기록이 있는 방죽샘이 처음 등장한다.

 

지역별[면별] 현황과 특징은 272개소에 대해서 개별로 해설하였다. 샘고사나 당제 등도 우물이나 샘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민속문화 조사는 따로 해야 할 것이지만 기 조사된 자료는 각 우물 이야기에서 간략히 소개하였다. 신앙관습이나 속신에 대해서는 일반론에 해당한다 할 『산림경제(山林經濟)』의 복거(卜居)편 우물조 기록을 제1장 총설에서 제시하였다. 그리고 보존과 관리의 방향도 제안하였다. 우물을 중심으로 한 민속생활사와 향촌사회사에 대하여 앞으로 더 조사연구 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김희태·황호균·장모창·이수경, 『해남의 우물』, 해남군, 시와 사람, 20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