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61 ; 유달산➆ - 목포 팔경 ‘유달기암(儒達奇巖)’, 목포인의 심상(心象)

향토학인 2021. 12. 24. 00:45

인지의 즐거움261 ; 유달산➆

 

목포 팔경 ‘유달기암(儒達奇巖)’, 목포인의 심상(心象)

 

김희태

 

1955년(단기 4288년) 7월 16일에 중수한 전말을 기록한 유선각의 기문(儒仙閣記). 첫머리에 유달산의 입지와 형상을 잘 그리고 있다. 유선각은 1932년 처음 세웠는데 당시 목포시 시민들의 공모로 지어진 이름이다. 목포인의 심상이 녹아들어간 명칭이다. 1955년 중수하고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중건한다.

 

호남의 유달산(儒達山)은 목포항의 주산(主山)이오, 그 빼어난 경치로 고금에 으뜸가는 산이다. 영산강과 다도해가 만나는 물목에 우뚝 서서 마치 장군이 깃발을 진열하고 창과 방패를 정렬하여 적의 무리를 기다리는 것 같고, 그 기세는 하늘이 안배하며 땅이 포설하고, 그 자태는 귀신이 수를 놓고 신령이 그려 놓은 듯 그 형상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곧 이 산이 있었건만 그 정령을 모아 얻은 이 몇 사람이며, 수려하고 걸출한 수석(水石)을 완상하며 주석한 이 몇이런가.[湖南儒達山, 卽木浦港之主山, 而以奇勝擅於今古者也, 聳立海澨如將軍之列旗幟, 整戈矛而待敵衆, 其氣勢之天排, 地舖物態之鬼繪, 神畵盡不可名狀, 自開闢以來, 便有此山, 精靈所會鍾得幾人, 秀杰水石所賞住得幾人](하동현, 김형만역, 「유선각기」, 『목포향토사료모음집』, 목포문화원)

 

1957년 7월에 지은 유달 수성사 창건 서문에서도 유달산의 형상은 잘 표현하고 있다. 유달산은 이제 기암괴석의 산을 넘어 정령(精靈)이 깃들고 걸출한 명사 숙덕이 배출되는 문운(文運)이 강림한 산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유달산(儒達山)은 호남의 명산이라, 정령(精靈)이 모여들어 기세(氣勢)가 빼어나고 시원하게 틔어서, 문장(文章)을 맡아보는 규수(奎宿, 28수 중 文運을 관장)와 수명(壽命)을 맡아보는 노인극성(老人極星)이 아래로 강림(降臨)하여 비추니, 이 산 아래 사는 사람 중에 걸출한 명사(名士)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기로(耆老) 숙덕(宿德, 학덕 높은 어른)이 수백세(數百世) 이전으로부터 수백세 이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하여준 것과 보여준 것이 털끝만치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니, 유달(儒達)이라는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단지 해동(海東) 한 구역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정승채, 김정섭·김형만역, 「유달 수성사 창건서(儒達壽星社創建序)」, 『목포풍아집』, 목포문화원)

 

유달산과 목포의 경관과 심성을 읊은 시는 『목포풍아집(木浦風雅集)』과 『호남보인시사고(湖南輔仁詩社稿)』를 통해 그 다양함과 심미성을 알 수 있다.『호남보인시사고』는 1954년 보인시사(輔仁詩社)에서 등사본으로 발간한 시집이다. 119명의 시사원(詩社員)들의 주옥 같은 시 600여편에 이른다. 목포문화원에서 국역본(김형만 역, 2020)을 냈다. 『목포풍아집(木浦風雅集)』은 1965년에 목포시사(木浦詩社)에서 발간한 시문집이다. 600여편의 시를 포함하여 기문, 상량문, 편액, 비문 등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시문을 집대성했다 할 것이다.

 

1920년에 창시되고 1932년 유산정(儒山亭) 정자를 낙성한 유산음사(儒山唫社), 1939년 창립된 보인시사기 1961년 목포시사(木浦詩社) 합하여 개칭하고 1965년에는 『목포풍아집(木浦風雅集)』을 냈다. 유산정 원운을 비롯하여 1922년(임술)의 춘회(春會)부터 1964년까지의 풍아를 집성하였다. 중고생의 시와 산문도 있다. 이 문화공간이 유달산에 있는 유산정-목포시사이기 때문에 『목포풍아집(木浦風雅集)』과 『호남보인시사고(湖南輔仁詩社稿)』는 유달산-목포인의 심상을 담고 있다 하겠다.

 

외지의 선비들로 유달산을 읊은 시를 남긴다. 1957년 가을에 구례출신의 학자 고당 김규태(1906~1966)는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 1901~1960) 등 여러 문우들과 함께 유달산을 오른다. 함평 세심정을 거쳐서이다. 두수의 시를 남긴다. 그 일부를 보면, ‘유달산에 올라(登儒達山)’에서는 “바다는 드높고 송골매 가을에 비껴 나니 남국의 명산에 유람시를 읊는다(海天寥廓鶻橫秋 南國名山戲一遊)”, ‘효당의 유달산 운에 따라(次曉堂儒達山詩)’에서는 “바다 위 명산 하늘 끝자락 누대에 외로운 기러기 가을 구름 안고 날아간다( 海上名山天畔樓 冥鴻獨擧白雲秋)”고 하여 가을 유달산의 경승을 노래했다.

 

이같은 문향(文鄕), 시향(詩鄕)의 전통은 ‘목포팔경’으로 회자되기에 이른다. ‘목포팔경’은 ‘유산기암(儒山奇巖)’이 첫머리이다. ‘유달기암(儒達山巖)’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유달산의 상징성을 말해 준다 하겠다.

 

유산기암(儒山奇巖) - 유달산의 기묘한 바위들의 아름다운 형상

용당귀범(龍塘歸帆) - 돛단배가 고하도 용머리 앞을 돌아오는 풍경

아산춘우(牙山春雨) - 봄비 속에 청신하여진 아산의 아름다운 풍경

학도청람(鶴島晴嵐) - 아지랑이 필 때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봄날의 삼학도 풍경

금강추월(錦江秋月) - 가을달빛이 어린 영산강의 아름다운 풍경

입암반조(笠岩返照) - 저녁 노을 빛이 드리운 갓바위부근의 아름다운 풍경

고도설송(高島雪松) - 겨울철 고하도의 눈 덮인 소나무의 풍경

달사모종(達寺暮鍾) - 달성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의 고즈넉한 풍경

 

목포 팔경 가운데 ‘달사모종(達寺暮鍾)’이 있다. 유달산 달성사의 저물녁 은은한 종소리이다. ‘달사만종(達寺晩鍾)’으로도 표기한다. 달성사는 1915년에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목포 팔경은 근대기에 형성되어 목포인의 심상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읍지 등의 기록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목포팔경의 시조나 그림이 시민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이고 목포시사(木浦詩社)에 출입하던 원로 유생(儒生)들이 만들어 단가(短歌)로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935년의 신문기사를 눈여겨 볼만하다. “목포 '儒達山'을 朝鮮 八景에 入選시키고자 府 當局 海景 사진 모집”한다는 「부산일보」1935년 7월 8일 기사이다. 어쩌면 이 무렵부터 ‘팔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되어 ‘목포 팔경’도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950년대에 이르러 기록이 남겨진다. 유선각에 ‘목포팔경’ 시 현판(하동현, 1955년경)이 걸린 것이다. 지금은 목포문예회관에 있다. 1960년대에는 ‘목포팔경’ 시가 『목포풍아집』에 오른다.

 

‘목포팔경’이 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회자되고 보급된 시기는 1980년대에 들어서부터라고 여겨진다. 1981년에 목포시에서 발행한 『내고장 전통가꾸기』라는 책자를 통해서 목포팔경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85년 목포문화원에서 발행한 『목포향토지』제1집, 1990년에 유달산공원화추진위원회에서 발행한 『유달산』등에 목포를 노래한 찬가(讚歌)로 ‘목포팔경’이 소개되면서부터 그 명맥이 시민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목포팔경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 중 하나는 목포지역 화가들이 그린 목포팔경 그림을 통해서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81년 당시 목포시 시사편찬위원 몇 사람이 모여서 목포의 명승을 그림으로 남겨 목포시에 보관하자는 의견을 모아, 당시 저명한 목포 연고 화가들에게 부탁하여 목포팔경을 그림이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남농(南農) 허건(許楗), 아산(牙山) 조방원(趙邦元), 도촌(稻邨) 신영복(辛永福), 백포(白浦) 곽남배(郭南培) 4인의 화가들이 각자 두 폭의 작품을 남기게 되었는데, 현재 목포 종합문화예술회관 상설전시장에 ‘목포팔경’ 편액과 함께 걸려있는 8점의 목포 팔경 그림이다.(최성환, 「목포팔경에 대한 소고」, 『목포문화사랑』, 2002)

 

이제 유달산은 목포팔경의 ‘유달기암’ ‘유산기암’으로 목포의 상징으로 형상화되기에 이른다.

 

유달산의 연혁과 유래를 살피면서 역사문화 배경을 정리해 보았다.(인지의즐거움 255~261 ; 유달산➀~➆)

 

유달산은 조선초기 1448년(세종 30) 『세종실록』에 ‘유달산(鍮達山)’으로 처음 표기가 나오며 이후 ‘유달이(鍮達伊)’ 등으로 표기되다가 영달산(靈達山), 유달산(楡達山), 유달산(儒達山) 등으로 표기가 되면서 6백여년 동안 이어지는 서남해안 물목의 대표적 명산 경관 기록 유산으로 역사성이 있다.

 

 

유달산은『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유달봉화(鍮達 烽火)가 기록으로 나온 이래 조선시대 전 기간을 황원-유달-군산-고림산으로 연결되는 제5거 봉화로서 『호남봉대장졸총록』에 별장 6인, 군 25명, 보인 48명 등이 주둔하는 서남해안 길목의 관방 시설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유달산은『무안목포진지도』, 『무안현지도』(1872년, 규장각 소장) 등 각종 고지도류에 기암괴석이 회화식으로 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초기 여성소설가 박화성의 ‘하수도공사’(1932) 작품의 배경으로, 1915년 이후 생성되어 회자되다가 1940~50년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 ‘목포팔경(유산기암)’ 등 문학작품 속에서, 그리고 기행수필과 경관지명, 행정지명, 학교명칭, 회사 명칭을 비롯하여 “유달산 타령” 등 민요 민속, 그리고 문화 행사 등을 통해 목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목포 시민의 심상에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유달산은 목포인의 심성을 형성하는데 큰 기반이 되었고 역사 문화 생활속에서 문화경관으로 자리잡아 온 역사문화명산이다.

조선후기 지도에 표현된 유달기암(儒達奇巖) 경관(목포진지도, 1872년, 규장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