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63
곳곳마다 물 길으며 옷을 빨고, 400년전의 동네 ‘시암’ 풍경
-고산 윤선도의 우물과 샘 인식과 형상화-
김희태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
1612년(광해군 4) 정월 어느 길가의 풍경을 읊는다. ‘날이 갠 것을 기뻐하며[喜晴]’라는 제목의 시 38구 가운데 보이는 일부 구절이다. 샘과 관련해서는 “곳곳마다 물 길으며 의복을 세탁하네”라는 구가 보인다.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빨래터가 보이는 경관이다.
농부는 밭에 나가 민첩하게 밭을 갈고
여행객은 길에 올라 거마가 가벼워라
곳곳마다 물 길으며 의복을 세탁하고
집집마다 멍석 깔고 곡식을 말리누나
안개와 먼지 사라지니 뱃노래가 일어나고
산과 물 산뜻하니 노닐 마음이 더해지네
도인은 약을 말리며 시렁 옆에 서 있고
나무꾼은 낫을 차고 숲속으로 들어가누나
農夫往田耒耜便(농부왕전뢰사편)
行客登途車馬輕(행객등도차마경)
汲泉處處濯衣裳(급천처처탁의상)
布席家家乾粟秔(포석가가건속갱)
霧捲埃宿起棹謳(무권애숙기도구)
山明水麗添遊情(산명수려첨유정)
道人曬藥架邊立(도인쇄약가변립)
樵父腰鎌林下行(초부요겸임하행)
어느 시골 아침나절의 풍경이다. 농부는 일찍부터 밭을 갈고 여행객은 거마(車馬)도 가볍게 길을 나선다. 곳곳마다 우물이 보이고 동네의 공동 빨래터의 공간, 집집마다 곡식을 말리고, 멀리서 뱃노래도 일어난다. 도인은 약을 말리고 나뭇꾼은 숲속으로 든다. 그림을 보는듯한 향촌의 일상이다. 공동 우물 공간이 눈에 띤다.
윤선도는 1609년(광해군 1) 8월에 생모 순흥안씨의 상을 당한다. 1611년(광해군 2) 10월 복을 마치고 11월에 조상의 묘소 성묘 차 처음으로 해남에 내려왔다. 이 때 남귀기행(南歸紀行) 7언 고시 122구를 지었다. 서울에서 용인, 공주, 장성, 해남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시로 형상화 한다.
그리고 1612년에는 진사시에 합격한다. 이 해 진사시는 식년시와 증광시 2회가 확인된다. 정기시험인 식년시 시험일은 3월 13일이다. 증광시(增廣試)는 조선시대 즉위경이나 30년 등극경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작은 경사가 여러 개 겹쳤을 때 임시로 실시한 시험이다.
윤선도는 증광시에 아원(2등)으로 합격한다. 시험일은 9월 9일이다. “문과(文科)를 방방(放榜)하여 이민구(李敏求) 등 33 명을 뽑았다. [새 궁궐에 이어(移御)하고 동궁(東宮)이 가례(嘉禮)를 올린 두 가지 경사가 있어서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베푼 것인데, 생원과 진사도 아울러 뽑았다. ]”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57권, 광해 4년 9월 9일 경자조)
이 시는 처음에 “春王正月歲壬子[임자년 봄 왕정월]”이라 시작을 한다. 1612년 정월의 경관을 읊은 것이다. 해남에서 본 것인지 다른 곳의 경관인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밭갈이와 공동우물 등 향촌의 서경 경관이다.
그런데 이 시는 형식상 “동시(東詩)”로 분류된다. 동시(東詩)란 과체시의 별칭으로 과시(科詩), 동인시(東人詩), 행시(行詩), 공령시(功令詩)라고도 한다. 관리 선발 시험인 과거시험 과목 가운데 하나인 시(詩)를 시험할 때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우리나라 전통 한시(漢詩)에서 중요한 시가(詩歌)형식이다. 제목에 운(韻)자가 들어가야 하고 18운(韻) 36구(句) 이상이 되어야 한다.
동시의 제목은 역사(歷史)와 고사(故事), 명구(名句), 시문(詩文), 경전(經典), 전기(傳記), 소설(小說)등의 다양한 원전(原典)을 인용했다. 과거 시험을 위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1612년에 윤선도는 “희청(喜晴)”, “청운막도고인다(靑雲莫道故人多)”, “모설방고산(冒雪訪孤山)” 등 14수의 동시(東詩)를 짓는다. 이같은 시작(詩作)의 과정을 거쳐 9월의 소과(진사) 증광시에서 아원(亞元)에 오른 것 같다.
날마다 샘물 떠서 손수 적셔 주리이다
윤선도는 53세 때인 1639년(인조 17, 기묘)에 지은 ‘동곽의 이로가 분매를 보내 주었기에 사례하다[東郭李老惠盆梅]’는 시가 있다.
이처럼 눈보라가 거세게 부는 때에
홀로 꽃 소식을 옥 가지에 부쳤어라
초나라 난초에 열매가 없음을 혐의한 듯
심강의 국화가 시든 것을 애석해하는 듯
굳센 절조 그야말로 군자에 걸맞기에
고인이 보낸 깊은 정이 더욱 느껴지네
밝은 창가 궤안 위에 높이 올려 두고
날마다 샘물 떠서 손수 적셔 주리이다
當此風饕雪虐時(당차풍도설학시)
獨將芳信寓瓊枝(독장방신우경지)
如嫌楚國蘭無實(여혐초국란무실)
似惜潯江菊已萎(사석심강국이위)
勁節正宜君子以(경절정의군자이)
深情更覺故人貽(심정경각고인이)
高安靜几明窓裏(고안정궤명창리)
日酌淸泉手沃之(일작청천수옥지)
이동곽이 매화 화분을 보내온 모양이다. 마음속의 국화와 밝은 창가의 분매. 날마다 샘물 떠서 적신다고 했다. 분매는 샘물을 길러다가 생기를 북돋고 마음속의 절조는 이상세계의 샘물로 적실 것이다. 시절이던 마음이던 눈보라가 치지만 군자의 절조는 지켜야 하고 그 근간은 샘물이다.
윤고산은 그 일년 앞서 1638년 6월, 병자호란 때 분문(奔問)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체포되어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었다. 분문이란 임금이 위기에 처했을 때 신하가 급히 달려와 문후(問候)함을 이른다. 이듬해 1639년 2월에 석방되어 해남으로 돌아와 수정동(水晶洞)에서 정자를 짓는다.
1645년(인조 23 을유) 59세 때 “샘물 가득 떠서 보리밥 말아먹으면”이라는 내용의 시를 읊는다. “밥상을 마주하고[對案]”라는 제목이다. 봄날인 듯하다. 고사리 싹이 돋는다. 앞산에 비 흩뿌린 뒤라 더 파릇하다. 일에 찌든 듯 어두운 찬부여 봄날이니만큼 얼굴을 펴보소. 샘물 한가득 보리밥 말아먹으면 마음마저 조용해지고 안정되니 이 살림살이를 누가 가난하다 하리요.
앞산에 비 온 뒤에 돋아나는 고사리 싹
밥 짓는 아낙이여 봄 왔으니 얼굴 펴오
샘물 가득 떠서 보리밥 말아먹으면
유인의 살림살이 가난하지 않는다오
前山雨後蕨芽新[전산우후궐아신]
饌婦春來莫更顰[찬부춘래막경빈]
滿酌玉泉和麥飯[만작옥천화맥반]
幽人活計不爲貧[유인활계불위빈]
윤선도는 1640년(인조 18 경진)에 「금쇄동기(金鎖洞記)」를 짓고 1642년에는 「산중신곡(山中新曲)」 18장을 짓는다. 1644년 2월에는 상이 병환에 의약(議藥)토록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상소하였다. 의약(議藥)이란 내의원(內醫院)의 제조와 의관들이 모여서 임금이나 왕비 등의 병환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진찰 및 투약 등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윤고산에게 상이 의약토록 한 것은 그만큼 예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를 짓던 1645년(인조 23)에는 「산중신곡」 2장과 「고금영(古琴詠)」 1장을 짓는다. 해남의 향촌 서경을 읊은 경관이고 삶의 모습이다. 그 중심에 샘이 있다. “옥천(玉泉)”이라 하였다.
* 이 글은 『해남의 우물』( 2021)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해남 우물의 특징>의 일부를 수정한 글이다. 처음 인용한 시 “희청(喜晴)”은 38구의 시인데, 우물과 샘의 경관 관점에서 골라 읽어 본 것이다.
* 참고문헌
『고산유고(孤山遺稿)』제1권(한국고전종합DB)
임귀남, 「《孤山 尹善道 東詩》 選譯」, 전남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2018.
김희태·황호균·장모창·이수경, 『해남의 우물』, 해남군, 시와 사람, 20021.
‘날이 갠 것을 기뻐하며[喜晴]’(고산 유선도, <고산유고>권1/한국고전종합DB)
1612년 증광시 사마방목(진사시) - 증광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루는 임시시험이다. 이해 증광시 시험일은 9월 9일로 기록이 있다. 시험의 사유는 "새 궁궐에 이어(移御)하고 동궁(東宮)이 가례(嘉禮)를 올린 두 가지 경사"였다. 윤선도는 100명 가운데 2등(亞元)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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