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17 - 천관산 구룡봉을 찾은 사람들, 2008

향토학인 2016. 4. 13. 20:28

인지의 즐거움017

  (20080301)

  

천관산 구룡봉을 찾은 사람들, 2008

 

김희태

  천관산의 '大佛'명문과 '梵字' 기록

 

   천관산 탑산사에서 정상 환희대쪽을 향해 오르다 보면 아육왕탑에서 300m 지점의 구룡봉에 많은 암각문이 있다. 이곳 암각문은 주로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성명과 연대 등을 기록한 것이다.(<표> 참조) 구룡봉 입구에서부터 일련 번호를 부여하여 암각문을 표기하고 해당인물의 인적사항이 찾아 지는 경우는 간략히 해설해 둔다.

 

   구룡봉 암각문은 탑산사 큰 절 도성스님의 제보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80127(일)과 20080201(금), 20080329(토) 현지 확인하여 촬영과 판독을 하였다. 두 번째 답사는 아들 민균(고1)도 동행하였다.

 

   탑산사 오르는 길에 있는 석굴암 옆 바위 상단에 ‘登天冠山=春花’의 명문이 있다. 그리고 탑산사 인근의 곤유암터 아래 부분에도 암각문이 있다. 또한 미수 허목(1595∼1682)의 기문인 「천관산기」에 ‘돌이 네모지고 모두 돌 상자형상인데 문자가 있으니 모두 범자이다(石方而皆石函形 有文皆梵字)’라 하여 梵字문이 있다는 기록, 『지제지』의 ‘大佛’ 명문 기록, 위도급의 시 ‘梵字’ 등이 있어 천관산과 탑산사 일원의 암각문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조사를 요한다. 그리고 관련인물 간의 교류관계나 지역에서의 활동, 남긴 글에 대한 분석과 해설 활용 등이 앞으로 더 해야 할 일이다.

 

   이 글은 <천관산 구룡봉 암각문>이라는 내용으로 『탑산사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2008.4. 장흥군·순천대학교박물관)의 <탑산사의 문헌적 접근> 편에 실린 글을 보완한 것이다. 암각기문 상의 장흥 인물과 관련한 자료정리에 도움말을 해주신 위성선생(장흥 관산, 문화관광해설가), 제보를 해 주신 도성스님께 감사드린다.

    

 

  구룡봉을 탐승한 선인-위정훈, 박춘장, 위세보, 위도급

 

   구룡봉에 대해서는 암각문 외에 선인들의 기록도 있다. 청금 위정훈(聽禽 魏廷勳, 1578~1662)선생은 여러 친구들과 천관산을 탐승하고 구룡봉을 거쳐 탑산사에서 유숙하면서 시 <與諸友登九龍峯大醉而下宿塔山次云>를 남긴다. 보성의 동계 박춘장(1595~1664)이 남긴 <支提山有償記>에 구룡봉을 다녀간 기록이 있다. 1638년(무인년, 인조 16) 4월의 일이다.

 

   삼족당 위세보(1669~1707)선생은 탑산사에서 머무르면서 <九龍峯> 시를 남긴다. 『장흥문화』29호에 김은수 교수가 <삼족당 위세보의 한시>를 소개한 글에 실린 내용을 보자.

 

  구룡봉 九龍峰

 

  암벽은 층층이 푸른 하늘로 솟아 있고   

    壁立層巖入太淸

  아홉 용이 숨어든 물이 옥처럼 푸르네   

    九龍潛處玉潭靑

  학의 맑은 울음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鶴生寥亮來何遠

  이는 바다 너머 삼신산에서 오는 거겠지 

    風雷時作絶頂來

 

  천관산의 향토지리지인 『지제지』를 남긴 존재 위백규선생은 1765년경 천관산 일대를 답사한 뒤 아들(魏道及, 1754∼1821)에게 천관산의 경관과 지명을 소재로 하여 96수의 시를 짓도록 하는데 구룡봉 제목의 시도 있다. 이 96수의 시는 『지제지』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장흥문화원에서 발간한 『지제(천관산)지』에 실린 구룡봉 시를 소개한다.

 

  구룡봉 九龍峰

 

  고봉이 구름밖에 치솟아 서로 엇물려 대를 이루니

    高峯雲表戞微台

  용이 놀던 아홉군데 구정이 열렸구나.            

    九處龍游九井開

  푸른 안개 붉은 노을 양 창자에 감췄는데         

    綠霧丹霞藏羊腹

  풍뢰가 때때로 정상에서 내려치네                

    風雷時作絶頂來

       

<표> 천관산 구룡봉 암각문 현황

연번

암각문

연대

인물 행적과 참고자료

1

宋綺老

1883년(추정)

송기로 : 1830∼1898, 본관 恩津, 자 仲皓, 호 松石. 장흥도호부사 2회 역임(1883.2∼1884.8 / 1887.윤4∼1888.8), 문집 『송석집』 5책

2

同遊 / 茶嵒居士 魏榮馥 / 道谷居士 宋鍾雲 / 癸未 四月 來遊

1883년

다암 위영복 : 1832~1884, 본관 장흥, 자 芳瑞, 호 茶嵒이, 『존재집』 편찬, 문집 『다암선생문집』 1책

도곡 송종운 : 본관 은진, 자 燦五, 호 道谷, 송기로 부사의 아들, 문집 『도곡집』 3책

3

魏洪良

 

위홍량 : 1881~1961, 자 洛範, 호 重窩, 처음 이름 鶴良. 본관 장흥, 魏德祚(증조)-玉隱 錫烈-春軒 魏啓泮(父)-위홍량, 문집 『중와유고』 2책

4

九龍 / 金永泰 / □□□ / 高英柱 / 李相泰 / 府西

1914년 이전

府西 : 현재의 장흥읍 영전리, 송암리, 금안리,, 평장리, 대반리, 덕제리, 송산리, 사안리, 연동리, 석동리, 북홍리, 성불리 일원, 1914년 장흥읍에 합해짐

5

魏啓泮 / 金永惠[恩] / 魏啓芳

 

위계반 : 1848~1939, 자 致周, 호 춘헌, 본관 장흥. 문집 『춘헌집』 권1 시 同崔雲齋(永祚)崔畏軒(永卨)登天冠山

6

玄基奉 / 金基權 / 金益儉

 

현기봉 : 1855∼1924, 鶴坡, 영암 학산출신

7

魏啓漢 / 芳□

 

 

8

東方一士宋秉璿 / 宋秉瑗 / 尹滋鉉 / 安澤煥 / 梁相曄 / 安成煥 / 金在洪 / 金始中 / 魏啓泮 / 魏赫基 / 魏啓龍 / 魏啓溫 / 金魯鉉 / 魏啓文 / 魏啓學 / 魏啓寬 / 魏秉良 / 魏性奎 / 戊戌□三月二十日

1898년 3월 20일

송병선 : 1836∼1905, 본관 은진. 자 華玉, 호 東方一士·淵齋. 회덕출생. 『연재선생문집』, 『무계만집』

안택환 : 1844∼1917, 양상엽 : 1852∼1903 , 안성환 : 1858∼1911

위계반 : 1848~1939, 자 致周, 호 춘헌, 본관 장흥. 문집 『춘헌집』 권1 시 同崔雲齋(永祚)崔畏軒(永卨)登天冠山

위혁기 : 1860∼1944, 자 致明, 호 桂陽, 다암 위영복 아들

위계문 : 1865∼1951, 자 昌汝, 호 竹菴, 魏松 아들

위계학 : 1868∼1919, 자 士悅, 호 淸溪, 魏重植 아들

위계룡 : 1870∼1948, 자 雲汝, 본관 장흥, 호 오헌

위계온 : 1870∼1902, 자 致儉, 호 竹坡, 魏錫九 아들

위계관 : 1873∼1942, 자 子栗, 호 道谷, 魏栐 아들

위병량 : 1879∼1900, 자 懋元, 魏啓信 아들

김노현 : 1841∼1915, 광산인, 호 小石

9

金玉珍 / □□

 

 

 

  

  장흥부사를 두 번이나 지낸 송기로

  - 암각문 1 ‘宋綺老’

 

   구룡봉 입구에 음각 종서로 새겼다. 송기로(宋綺老)는 장흥도호부사를 두 번에 걸쳐 지낸 인물이다. 『장흥읍지』(경술지, 1910년) 선생안에 나타난 다음 기록을 통해 보면 1883년(고종 20) 2월 장흥부사로 부임하였다가 1884년(고종 21) 8월에 광주목사로 옮겨 갔고, 다시 1887년(고종 24) 윤 4월에 장흥부사로 부임하여 1888년(고종 25) 3월에 옥천구수로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임할 때에는 진주목사와 서로 바꿨음을 알 수 있다. 비각이 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장흥읍 교촌리에 있는 장흥향교 앞의 비석군에 <부사송후기로청덕휼민영세불망비>(府使宋侯綺老淸德恤民永世不忘碑, 1885년 세움)가 현전하고 있다. 이 비에 대해서는 1989년 목포대박물관에서 조사한 『장흥군의 문화유적』에 실려 있다. 『장흥읍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宋綺老 通訓 蔭 癸未 二月 到任 甲申八月移拜 光州牧使 有碑閣

   宋綺老 再任 丁亥 潤 四月 晉州=相換到任戊子三月移拜玉川郡守

 

   암각문 2에 새겨진 도곡 송종운이 송기로의 아들이다. 송종운과 함께 암각기문 2에 새겨진 다암 위영복의 문집인 『다암유고』 부록에 ‘四一居士(宋綺老)爲茶嵒斯文書屬焉’라는 글이 있어, 장흥부사로 왔던 송기로, 그의 아들인 송종운, 그리고 다암 위영복이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기로(1830[순조 30]∼1898[고종 35])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문집으로 『송석집(松石集)』 5책이 있다.

 

  다암 위영복과 송기로 부사의 아들 송종운

  - 암각문 2. 同遊 / 茶嵒居士 魏榮馥 / 道谷居士 宋鍾雲 / 癸未 四月 來遊

 

   계미년 4월에 다암거사 위영복과 도곡거사 송종운이 함께 유람한 내용이다. 다암 위영복(1832~1884)은 천관사 사적지인 『지제지』를 편찬한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문집을 편찬한 인물이다. 위영복의 활동 연대로 보면 기문상의 계미년은 1883년(고종 20)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위영복과 송종운이 함께 천관사를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위영복의 자는 방서(芳瑞), 호는 다암(茶嵒)이며 문집으로 『다암선생문집』이 있다. 4권 1책으로 1995년 한국역대문집총서 1475집으로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권 1 시에 ‘與琴陽尹進士(包叔)遊九龍峯’, ‘與春川李進士(奎鳳)登天冠山’등 천관산과 구룡봉 제목의 시가 있다. 권 4 부록에 ‘四一居士(宋綺老)爲茶嵒斯文書屬焉’, 제문에 ‘桂洞護喪所 宋鍾雲(道谷)’가 있어 송종운이 위영복의 제문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송종운(宋鍾雲)의 자는 찬오(燦五), 호는 도곡(道谷), 본관은 은진, 장흥부사를 지낸 송기로의 아들이며 생원 송강로(宋絳老)에 입양되었다. 문집으로 『도곡집(道谷集)』 6권 3책이 있다. 규장각에 소장(奎 15602-v.1-3)되어 있다. 송종운의 생몰년이 일부 자료(http://e-kyujanggak. snu.ac.kr)에서는 1792∼1825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재고를 요한다. 간지로만 계산을 했다면 오히려 1852∼1885년이다.

 

 

    송종운의 글 가운데 <장흥부유각면강회제생문(長興府諭各面講會諸生文)>과<재유제생문(再諭諸生文)>은 7정(政) 가운데 하나인 흥학(興學)을 위한 강회(講會)를 베푸는 데 앞서 강규(講規)를 새로이 정하고 각 면에 훈장을 설치한다는 내용으로 강회일, 훈장의 직무, 강회의 참석자 범위, 서책, 강회 진행, 강석(講席)의 질서, 강회 유사(有司) 선발 등 12항에 걸친 강규가 있다. <호락한설(湖洛閒說)>은 호락시비(湖洛是非)에 관하여 장흥 출신으로 금릉(金陵, 강진)으로 이거한 사인(士人)인 김한섭(金漢燮)과 논의한 내용이다.

 

  장흥 선비들과 인근의 인물들

  - 암각문 3. 魏洪良

 

   위홍량(1881~1961)의 자는 낙범(洛範), 호는 중와(重窩)이며, 처음 이름은 鶴良이다. 본관은 장흥으로 위덕조(魏德祚, 증조]-옥은 위석렬(玉隱 魏錫烈)-춘헌 위게반(春軒 魏啓泮)[父)] 세계를 잇고 있다. 문집으로 『중와유고(重窩遺稿)』가 있다. 3권 2책으로 1995년 한국역대문집총서 474집으로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권 1 시 에 ‘與數省諸名士遊天冠山’, ‘天冠山’, ‘與安參奉(極)登天冠山’, ‘鄭石下(在煜)及諸又宿長川’, ‘翌日登天冠山’, ‘李斯文公淑亨老春章以天冠韻示余忘拙和之’, ‘天風寺夜話’, 등의 천관산 제영이 있다.

 

  - 암각문 4. 九龍 / 金永泰 / □□□ / 高英柱 / 李相泰 / 府西

 

   구룡은 구룡봉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돌이지만 약간 떨어져서 부서면에 연고를 둔 김영태, 고영주, 이상태 등의 인명이 보인다. 부서면은 지금의 장흥읍 서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1757년 관찬 기록인 『호구총수』에는 모두 38개 리가 기록되고 있는데, 지금의 용산면 지역까지를 포함하여 기록하고 있다. 1912년의 기록(『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는 12개 마을이 기록되고 있는데, 영전리, 송암리, 금안리,, 평장리, 대반리, 덕제리, 송산리, 사안리, 연동리, 석동리, 복흥리, 성불리 등이다. 1914년에는 군내면[부내면]과 합해져 장흥면이 되었다가 1940년 장흥읍이 된 지역이다.

 

  - 암각문 5. 魏啓泮 / 金永惠[恩?] / 魏啓芳

 

   위계반(魏啓泮, 1848~1939)의 자는 치주(致周), 호는 춘헌. 위석렬의 아들이다. 문집으로 『춘헌집』이 있다. 6권 3책인데 1995년 한국역대문집총서 473집으로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위게방(魏啓芳, 1871∼1922)의 자는 화경(和卿), 호는 모계(慕溪), 청계공 후손이며 위석환(魏錫桓)의 아들이다.

 

  - 암각문 6. 玄基奉 / 金基權 / 金益儉

 

   정상의 바위면 바닥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학파 현기봉(鶴坡 玄基奉, 1855∼1924)은 영암군 학산면 학계리 출신으로 수천 석의 대지주였으며 영암, 무안[신안], 목포권(주소 목포부 부내면 남교동 8-4)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창립했던 무송 현준호(撫松 玄俊鎬, 1889∼1950)가 그의 아들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김기권은 위홍량(1881~1961)의 문집 『중와유고』에 [挽 小柏金丈(基權)]가 들어 있어 인근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인 듯 싶다.

 

  1898년 천관산 유람기를 남긴 연재 송병선

  - 암각기문 8. 東方一士宋秉璿 / 宋秉瑗 / 尹滋鉉 / 安澤煥 / 梁相曄 / 安成煥 / 金在洪 / 金始中 / 魏啓泮 / 魏赫基 / 魏啓龍 / 魏啓溫 / 金魯鉉 / 魏啓文 / 魏啓學 / 魏啓寬 / 魏秉良 / 魏性奎 / 戊戌□三月二十日

 

   구룡봉의 암각문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이 있는 부분이다. 조선말기-대한제국기의 학자이자 순국지사인 연재 송병선(1836~1905)이 천관산 유람기록을 남기는데 이 시기의 암각문으로 보인다. 끝에 1898년 3월 20일의 연기가 나온다.

 

   유람 기록인 「遊月出山天冠山記」는 연재 송병선(1836~1905)의 문집인 『연재선생문집』에 실려 있다. 한국역대문집총서 290집으로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그리고 『한국력대산수유기취편(韓國歷代山水遊記聚編)』(정민 편, 1996, 민창문화사)에도 실려 있다.

 

   「遊月出山天冠山記」는 1898년 윤 3월 6일에서 16일까지 월출산을 거쳐 천관산을 탐방하면서 남긴 글이다. 삼종제 위옥 송병완, 명중 채봉서, 치장 안성환, 자상 박기진, 윤범 김재홍, 성재 김시중, 향원 여조연, 공범 오석렬, 내옥 이경순, 익중 송홍 등과 동행하였다. 경문 김한목, 안준식 등이 합류하였고 영산진을 지나 영암 대월루, 도갑사, 구정봉을 올랐다가 상견성암에서 잠을 잔 뒤 구림, 만덕산 백련사, 구강포를 지나 장천재를 거쳐 천관산에 오른 일정을 서술하고 있다. 금수굴을 지나 다시 장천재로 내려왔고 여기정을 지난 다음 부춘정, 보성의 목미암, 모후산의 초연정, 곡성의 문성공(안향)유상을 배알하고 귀가한 일정이다.

 

  위계민(魏啓玟, 1855~1923)의 『복재집(復齋集)』에 ‘陪淵齋宋先生登天冠山’이라는 시가 있어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신기마을 앞 바위(고인돌)에 삼괴정을 송연재선생이 명명했다(三槐亭 淵齋宋先生命名 戊戌□三月二十一日)는 각자가 있는데 그 시기는 1898년 3월 21일로서 천관산 구룡봉의 암각문 날짜 다음날이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본관은 은진.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연재(淵齋)이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장흥인물들로는 위계반, 위계룡 등이 문집을 남긴 인물이다.

 

  위계반(魏啓泮, 1848~1939)의 『춘헌집』권1 시 ‘同崔雲齋(永祚)崔畏軒(永卨)登天冠山’ 제영이 있다. 운재 최영조는 조선말-대한제국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의 아들이다.

 

  위계룡(魏啓龍, 1870∼1948) 자는 운여(雲汝)이다. 문집인 『오헌유고(梧軒遺稿)』(7권 2책, 신활자본) 권1 시에 ‘辛丑夏陪寄井邑(亮衍)遊冠山’, ‘鄭栗溪(琦)梁正齋(會甲)梁蓮坡(會龍)裵海隱(淇玉)尹拓軒(在麟)登天冠山次來宿長川齋時余適不家歸見小韻和之’, ‘姉兄小溪金箕洪(榮國)與順天龜村趙士淑(炳寬)黙窩趙道裕(禎燮)寶城樂川李英傳(敎川)來宿俯溪堂翌登天冠暮宿壺谷’ 등 천관사 제영이 있다.

 

  이 기문에는 없지만 암각문 3의 위홍량(魏洪良, 1881~1961)의 문집 『중와유고』에 천관산 일원의 제영[암각문 3 참조]뿐만 아니라 ‘奉和桂陽大父(赫基)龍岡旅座, 聞梧軒族叔(啓龍)見薙禍將迫欲避身于金剛凡我戴髮之人誠發同舟之歎感賦一絶, 挽三希安丈(澤煥), 挽族兄定夫(性奎), 挽桂史族大父(澤基), 挽小柏金丈(基權), 挽竹軒族叔(啓昌)등의 제영, 만사와, ’上梧軒族叔(啓龍)‘, ’答道谷族叔(啓寬)‘, ’祭族叔梧軒(啓龍)‘, ’祭族叔竹軒(啓昌)‘ 등의 서간, 제문이 있어 교류관계를 알 수 있다.

 

  위혁기(魏赫基, 1860∼1944)의 자는 치명(致明), 호는 계양(桂陽0, 다암 위영복의 아들로 다암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위계온(魏啓溫, 1870∼1902)의 자는 치검(致儉), 호는 죽파(竹坡), 청계공 후손이며 위석구(魏錫九)의 아들이다. 연재 송병선과 송사 기우만에게 사사하였다.

 

  위계문(魏啓文, 1865∼1951)의 자는 창여(昌汝), 호는 죽암(竹菴), 10대조는 위덕화(魏德和), 위송(魏松)의 아들이다.

 

  위계학(魏啓學, 1868∼1919)의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계(淸溪), 5대조는 통덕랑 위백신(魏伯伸)이고 위중식(魏重植)의 아들이다.

 

  위계관(魏啓寬, 1873∼1942)의 자는 자율(子栗), 호는 도곡(道谷), 5대조는 통덕랑 위백신(魏伯伸)이고 위영(魏栐)의 아들이다.

 

  위병량(魏秉良, 1879∼1900)의 자는 무원(懋元), 6대조는 위백규(魏伯珪)이고 위계신(魏啓信)의 아들이다.

 

  김노현(1841∼1915)은 광산인이며 호는 소석(小石)이다.

 

  자료의 집대성과 한글화가 이루어지기를

 

  이상에서 천관산 구룡봉에 남겨진 기록과 관련인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2008년 1월~4월사이 천관산 탑산사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것이다.(김희태, 2008, 탑산사의 문헌적 접근, 『탑산사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 장흥군·순천대학교박물관) 이 조사에서는 20여종의 문집류에 실린 28편의 기문류, 59종의 문집류에 실린 230여편의 제영문을 확인한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천관산 천관사 기록을 검토한 적도 있다.(김희태, 1999. 천관산 천관사의 역사와 연혁변천, 『장흥 천관산 천관사』-지표조사보고-, 장흥군·순천대학교박물관 / 김희태, 2002. 장흥 천관산의 역사배경과 시기문자료, 『해석임용주박사화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천관산에 '大佛' 명문이 있다는 기록이나 범자문이 바위에 있다는 기록도 있어 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헌과 기록자료의 조사 수집과 함께 해설 주석작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김희태, 천관산 구룡봉을 찾은 사람들-장흥땅 장흥사람들의 기록을 따라서2-, <장흥문화>30, 장흥문화원, 2008. 168~176 

 

2008년 1월 26일 눈 덮인 구룡봉을 오르다

2008.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