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16 - 방호 김희조(1680~1752)의 시(詩) '임계탄(壬癸歎)'

향토학인 2016. 4. 13. 20:14

인지의즐거움 016

     (20070801)

 

방호 김희조(1680~1752)의 시(詩) 임계탄(壬癸歎), 2007

 

 

김희태

 

  “자네가 소개한 자료 가운데 청태라는 단어가 있는데 한자로 어떻게 쓰는 글자인가?”

  “푸를 청(靑)자, 이끼태(苔)자를 썼던데, 왜 그러나.”

  “청태전에 대한 기록을 찾고 있는데, 청태란 표기가 있어서 기대하고 연락한 걸세”

  “그래, 나도 청태전의 기록을 찾아 봄세.”

    

  더위가 시작할 무렵 2007년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법조인 생활을 하면서도 짬짬히 고향의 향토문화에 대한 글을 열정적으로 써 나가고 있는 친구의 전화였다. 차에 대한 자료와 기록을 찾다가 연락한 거란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두 단어, 하나는 해산물로서 반찬으로 사용하는 청태(靑苔)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 약용 음료로서 청태전(靑苔錢)이었다.

 

  필자가 소개한 글은 존재 위백규선생이 지은 <사자산동류기(獅子山同遊記)>였다. 이 기록은 존재선생이 일행들과 함께 사자산을 유람하고 나서 쓴 글이다. 그 내용 중에 존재선생 일행이 준비해간 음식물로서 ‘청태’가 나온다. 그 소개 글에는 한글로만 표기했던 터라, 기대를 가질법도 했다.

 

  이를 계기로 장흥땅 장흥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서 공부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 번째로 방호 김희조선생의 시 <임계탄>과 그의 문집인 <방호집>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몇 년전 <장흥문화> 25호에 가사 <임계탄>이 소개된 바 있다. 조선시대 후기, 18세기 초엽[1732년, 1733년]의 재해 현상과 향촌사정을 가사로 형상화 한 내용이다. 이 가사는 이미 이형대의 논문, 18세기 전반 농민현실과 임계탄( <민족문학사연구>22, 2003)과 임형택의 편저, <옛노래, 옛사람들의 내면풍경>(소명출판, 2005)를 통해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그리고 <임계탄>의 작자와 관련하여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부친인 영이재 위문덕(1704~1784)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흥문화> 26집에 누가 임계탄을 썼는가 제하의 박형상 변호사 글에서는 간암 위세옥(1689~-1766)을 가사 <임계탄>의 작자로 추정하였다. 존재 위백규를 병계 윤병구에게 연결시켜준 스승이었다.

 

  그런데 가사 <임계탄>과 달리 동일한 제목의 시 ‘임계탄(壬癸歎)’을 방호 김희조선생의 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가사 <임계탄>이 지어진 시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방호 김희조(放湖 金喜祖, 1680~1752)선생은 본관이 영광으로 자는 경선(慶先)이다. 김순(金洵, 1654~1709)의 아들이며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시를 잘했다. 1713년(영조 39) 소과에 입격하였고 성균관에 있을 때, 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 모든 유생들이 다투어 도피하여 공관(空舘)의 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 하는 5명의 유생(鄭鳳徵, 曺弘業, 趙德禧, 柳용, 朴淳愚)과 직임을 나누어 성묘(聖廟)를 수호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들 여섯 선비는 충신이라 찬사를 받았다.

 

  이 해(1728년) 영조가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올바른 인재를 발탁하라는 요지의 봉사(封事, 만언소)를 올렸으며 문장은 물론 경륜과 절의로서도 추앙을 받았다. 만년에는 장흥 향리에 돌아와 산수를 벗하며 수 많은 시작을 남겼다. 그의 시는 자연 풍광이나 교류인물과 차운한 시도 많지만, 임계탄(壬癸歎)과 당시 사회폐단 아홉가지를 읊은 구폐시(救弊詩)는 사회의 어려움을 적시한 것이다.

 

  <방호집>은 2권 2책의 활자본으로 1829년 후손인 김채규, 김종진 등이 주도하여 1832년경에 간행하였다. 방호집의 체재는 다른 문집들과 약간 다르다. 권수에 방호시집서 3편(1831년 鄭在勉, 1832년 金尙學, 1832년 金益洙)이 있고 별도로 「방호집서」(1829년 金德鉉)가 있다.

 

  이어 목록이 유별로 간략히 있으며 권1에 오언절구(28편), 오언율시(23편), 칠언절구(71편), 칠언율시(136편), 육언절구(3편), 오언장편(1편), 고사(5편)가 있고, 권2에 소(1편), 서(8편), 제문(2편)  그리고 무신란때의 수관사적(守舘事蹟)이 첨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문집류에서 보이는 부록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권1에는 다양한 형식의 시 270여편이 실려 있다. 이들 시 가운데에는 장흥․강진․화순일대의 산천을 읊은 것이 많아서 주목되는데 이중「夫山八景」(김숙환, 부산팔경, <장흥문화> 제11호, 장흥문화원, 1989. 189쪽~195쪽 소개)을 비롯하여 수인산(修仁山), 부춘정(富春亭), 일림사(日林寺), 화방사(華方寺), 죽림정(竹林亭), 만덕사(萬德寺), 금능사(金陵寺), 만덕루(萬德樓), 만경루(萬景樓), 사인암(舍人岩), 도림사(道林寺), 도갑사(道甲寺), 보림사(宝林寺), 천관산(天冠山), 송석정(松石亭), 죽림사(竹林寺) 등등 오늘날도 이름 있는 유적들을 비롯하여 누정, 사찰 등에 대한 시가 많다.

 

  방호 김희조의 시 가운데 현실 사회의 비판에 대한 내용도 있다. 당시의 현실을 관조하면서 깊은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 시 ‘임계탄(壬癸歎)’은 18세기 초반 재해 등에 의한 향촌 현실이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외우 최한선 교수의 도움을 받아 국역한 글을 옮겨 본다.

 

  임계탄 壬癸歎

 

  눈을 돌려보니 궁벽한 시골에 연기 끊겼는데

    回看烟火絶窮閭   회간연화절궁려

  살아갈 이치 막막하여 수염만 만지작 거리네

    生理茫然但撫髥   생리망연단무염  

  청보리 베어와 방아 찧어도 죽 만들기 어렵고

    靑麥出舂艱作粥   청맥출용간작죽

  시든 채소 솥에 끓이지만 간도 맞출 수 없구나

    黃蔬入鼎乏調鹽   황소입정핍조염

  도연명의 한달에 아홉 번 먹음이 되레 부유하고

    淵明九遇猶云富   연명구우유운부

  진중자의 오얏 세 번 삼킴이 청렴이라니 우습구나

    仲子三咽可笑廉   중자삼인가소렴

  아, 나는 이미 이익에 두루 밝은 자가 아니거늘

    嗟我已非周利者   차아이비주리자 

  흉년에 죽게 되도 진실로 아무런 혐의가 없도다

     凶年見殺固無嫌  흉년견살고무혐 

   

 

 

 

  그 시상. 먼저 앞의 네구절. 눈을 돌려 여기를 보나 저쪽을 보나 향촌의 마을 경관은 궁벽하기만 하다. 때가 되어도 밥짓는 연기마저 오르는 곳을 볼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도 돌아 보고 또 아무리 살펴 보아도 살아갈 이치는 막연하고, 홀로 허름한 집안 구석에 앉아 수염만 쓰다듬을 뿐. 체면도 필요하지만 먹고 살 방도도 중요한데... 들판에 설익은 청보리 베어 와서 방아를 찐다 한들 죽마저 만들기도 어렵다. 알곡이 덜 여문 흉년인지라. 집 뒤켠 논서밭에 가 봐야 시든 채소. 솥에 끓여 봐야 흐물랑, 간마저 맞추기도 어려운데 어찌할 거나.

 

   다음 네구절. 도연명의 열흘이 세 번되도록 아홉 끼니밖에 먹지 못했다는 가난한 생활의 그 궁핍함이 오히려 부유해 보이는 구나. 진중자가 굼벵이 먹은 오얏을 세 번이나 삼키면서 청렴함을 지키려 했다는 고사가 오히려 우습기만 하다고 한탄한다. 아, 한탄 뿐이다. 나는 이미 이익에 두루 밝은 사람이 아니다. 가난이나 궁핍을 몰라하고 없이 사니 청렴과도 가깝다고 위안 삼을 뿐. 지독힌 이 흉년에 굶어 죽게 된다한들 참으로 나에게는 아무런 혐의가 없다.

 

   ‘연명구우(淵明九遇)’는 중국 진(晉)나라 도잠(陶潛, 365~427, 호 연명)의 ‘삼순구식(三旬九食)’를 말한다. 그의 시〈의고(擬古)〉9수 중 제5수에 “동방에 한 선비가 있으니 입은 옷이 항상 완전하지 못하네. 한 달에 밥은 겨우 아홉 번 먹고 갓은 십 년 만에 한 번 쓴다네.(東方有一士 被服常不完 三旬九遇食 十年著一冠)‘ 하였다. ‘삼순구식’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가난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중자의 오얏’은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하편에 실린 고사를 비유한 것. “진중자(陳仲子, 중국 전국 시대 齊나라 사람)는 어찌 청렴한 선비가 아니리오. 오릉(於陵) 땅에 있을 때 3일 동안 굶어서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는데, 굼벵이가 반 넘게 먹은 우물가의 오얏을 기어가서 주워 먹으니 세 번 삼킨 후에 귀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陳仲子居於陵 三日不食 耳無聞目無見 井上有李 螬食實者過半 匍匐徃將食之)”라는 내용.

 

  그리고 칠언율시 가운데의 「糴糶之弊」등 9개조의 폐단 지적은 그중 주목되는 것이다. 그의 현실인식과 사회모순에 대한 재야시인으로서의 이 술회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기강문란과 사회경제적 곤핍을 잘 대변하고 있고, 재야비판지식인으로서의 면모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가 거론하는 당시의 폐단들은 조적․학교․붕당․이서․관서․군정․남초(담배)․염문․추노 등의 9개조였다. 이 구폐(救弊)의 형상화는 2권에 있는 만언소와 짝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방호집> 권2의 만언소는 영조의 구언교에 응해 올린 장문의 봉사소로서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이후 사회모순을 타개하려는 영조의 요구에 답한 것이다. 그는 이 만언소에서 당시의 난국을 타개하는 요체를 인심을 모으고(結人心), 인재를 거두며(收人才), 군정을 수리하는 것(修軍政)으로 요약하고, 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수십개 항에 이르는 민폐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만언소는 그의 경세론을 집약한 것으로 실학자적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권2의 서문으로는 「동약계 서문(洞約契序)」와「천관산 탑산암 중수 서문(天冠山塔山庵重修序)」,「보림사 대광적전 중수서문(宝林寺大光寂殿重修序)」가 수록되어 있다, 동약계서는 1734년 부산의 7개 마을 사람들이 결속하여 만든 것으로 양란 이후의 향촌사회 구조변화에 대응하는 사족들의 면모를 읽게 하는 자료이다. 이 시기에 유주기 장흥부사[현감]의 주도로 주현향약이 실시되는데 서로 비교하면 당시 향촌사회의 운영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천관산탑산암 중수서는 천관산의 불교유적에 대한 자료이며, 보림사대광적전 중수서는 보림사의 대적광전(문집에는 대광적전)의 중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병사(전라병사)의 도움이 있었음을 적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불사에 민과 관이 합세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권2의 끝에 수록된「수관사적(「守館事蹟)」은 무신란때 성균관을 수호하던 육의사(김희조, 정봉징, 조홍업, 조덕희, 유용, 박순우)의 자․호․본관․거주지, 그리고 수관시(守舘時)의 완의(完議)를 첨부한 것이다.

 

  <방호집>은 조선후기 장흥출신 재야지식인 김희조(1680~1752)의 사상과 시문을 수록한 것으로서 특히 그의 거주지였던 장흥․강진․화순 등 전라도 서남해안지역의 산천과 당시 사정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사회 비판적인 현실인식의 면모를 조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만언소나 구폐(救弊)를 형상화한 칠언율시는 바로 그의 실학적 면모가 집약된 내용으로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상순상민막장(上巡相民瘼狀) 등 상서, 간암 위세옥(1689~1766)의 만언소, 그리고 존재 위백규(魏伯珪, 1727∼1798)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실학저술과 비교, 검토될만한 의미있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 <장흥문화> 29호-장흥땅 장흥사람들의 기록을 따라서 1 -, 장흥문화원, 2007.12.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