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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의 즐거움383 - 향촌사회의 문화공동체 공간, 서재와 고택, 장흥 열호재(悅乎齋)

인지의 즐거움383 향촌사회의 문화공동체 공간, 서재와 고택, 장흥 열호재(悅乎齋) 김희태 장흥 열호재(悅乎齋)가 2024년 10월 4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열호재는 19세기 초반 건립 유서가 있고, ‘열호재’ 또는 ‘환앵정’이라는 명명 유래 기록이 있고, 향촌서재로 많은 전적이 보존되어 있고, 병사나 어사를 지낸 관인이나 인근 선비들의 시문이 전하고, 건축적인 특징이 드러나며 복합적인 문화공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함께 지정하였다. 문화유산 명칭 ‘열호재’는 계서 백진항(1760~1818)이 중수하면서 서쪽은 ‘열호재(悅乎齋)’, 동쪽은 ‘환앵정(喚鶯亭)’이라 편액을 한 기록이 확인되어 명칭으로 삼기로 하였다. ‘열호재’는 사랑채의 ‘재..

인지의 즐거움 2025.02.09

인지의 즐거움382 - 임진왜란 시기 전공을 세운 위대기 장군의 투구

인지의 즐거움382 임진왜란 시기 전공을 세운 위대기 장군의 투구 -2019년 국립박물관 전시, 2024년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지정- 김희태 위대기 장군 투구(魏大器 將軍 鬪具)는 위대기 장군이 임진왜란 때 쓰고 싸우던 투구이다. 이 투구는 철판을 두들겨 만들었으며 투구의 둘레는 놋쇠판으로 붙이고 투구의 앞과 면위에는 어떤 장식이 있었으나 떨어지고 붙였던 부위에 놋쇠못만 있으며, 투구의 뒷부분은 녹슬어 큰 구멍이 뚫려있다. 투구의 조이게 끈을 매었던 부위는 놋쇠를 두들겨 붙여 만들었다. 위대기 장군(1555~1611)은 장흥읍 행원리에서 태어나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전공을 세웠다. 왜병이 금산에서 웅치(..

인지의 즐거움 2025.02.09

인지의 즐거움381 - 1585년 국왕이 발급한 장흥 출신 마하수의병장의 임란 이전 고신(告身)

인지의 즐거움381 1585년 국왕이 발급한 장흥 출신 마하수의병장의 임란 이전 고신 교지(告身 敎旨) 김희태 마하수 고신 교지(馬河秀 告身 敎旨)는 마하수에게 1585년(선조 18)에 중훈대부 행 선공감 주부(中訓大夫行繕工監主簿)를 임명하는 내용의 사령장으로로 국왕이 발급힌 문서이다. 장흥군 향토문화유산 제26호로 지정(2024.07.11.)되었다. 크기는 세로 50.0㎝, 가로 60.0㎝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敎旨馬河秀爲中訓大夫行繕工監主簿者萬曆十三年四月二十二日[施命之寶]1585년 마하수 고신 교지 중훈대부(中訓大夫)는 문신 종3품 하계(下階)의 품계명이다. 행(行)은 행직(行職)의 의미로 품계가 벼슬에 비해 높으면 벼슬 앞에 ‘행(行)’자를 붙인다. 품계가 벼슬에 비해 낮으면 ‘수(守)’자를 붙..

인지의 즐거움 2025.02.09

인지의 즐거움380 - 연못[靜潭]과 고택, 문사들의 교류처, 장흥 무계원(霧溪苑)

인지의 즐거움380 연못[靜潭]과 고택, 문사들의 교류처, 장흥 무계원(霧溪苑) 김희태 장흥 무계원(長興 霧溪苑)은 장흥고씨가에서 누대를 거쳐 경영한 경승지로서 고택과 함께 경관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2021년 12월 2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850년경 정담 고언주가 연못을 조성하여 정담(靜潭)이라 명명한 기록은 「정담명(靜潭銘)」에서 유래와 연원이 확인된다. 고택은 1852년 중수하고 1899년[己亥] 상량하여 민가 목조건물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고 가구 구조가 튼실하고 치목의 수법이 뛰어나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다.  무계원은 고택과 함께 정담 연못 주위에 배롱나무 군락 및 수목과 연못 내부의 섬에 식재된 나무의 경관, 고택 주변에 늘어선 팽나무와 느티나무의 자태, 대나무숲 등 ..

인지의 즐거움 2025.02.09

인지의 즐거움379 -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노라, 곡성 정재건 순절유적

인지의 즐거움379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노라-자정수지(自靖遂志) 실천한 애국 현장, 곡성 정재건 순절유적 김희태 “망국의 신하된 자의 의리란 구차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내 맹세컨대 ‘명치(明治)’의 세상에서는 살아 있지 않겠다. 따라서 9월 4일 신시에 칼을 베고 죽으리라.(亡國之臣 義不可以苟生 吾誓不在於‘明治’之世 故九月四日甲辰申時 伏劍而死) 1910년 ‘경술 국치’를 당하여 자결 순국하면서 남긴 글이다. 그 주인공은 곡성의 소송 정재건(小松 鄭在健, 1843~1910) 선생, 저 글의 제목은 ‘고결동지(固訣同志)’, 뜻을 같이 하였던 동지들에게 사별의 마음을 굳히고 남긴 글. ‘명치(明治)’는 당시 일본 왕을 말한다. 저 글을 남기고 자결 순국한 그곳이 아직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지..

인지의 즐거움 2025.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