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71 - 하늘에서 본 월남사, 옛탑은 촌락의 담장과 서로 의지하고

향토학인 2019. 3. 12. 04:15

인지의 즐거움171 -


하늘에서 본 강진 월남사, 옛탑은 촌락의 담장과 서로 의지하고

    

김희태

 

월남사(月南寺)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강진현 불우조의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다. 고려의 스님 진각(眞覺)이 처음 세웠으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잘 알려져 있다. 이규보(1168~1241)가 지은 비가 있고 진각국사[慧心, 1178~1234]가 세운 절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월남사는 창건을 고려 중기로 보았다.


당대 문장가 이규보의 비문에 “문하시중인 진양공 최우(崔瑀)가 두 아들을 스님에게 보내어 참례하여 모시도록” 했고, “상주물(常住物), 자구(資具), 다향(茶香), 약품, 진수, 명과, 도구, 법복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이 제공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더하여 국왕 강종이 “만수가사와 마납(磨衲, 법복), 차와 향과 보병(寶甁) 등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있다.


물론 이때는 진각국사가 송광사(수선사)에 주석할 때이지만 당대의 실질적인 집권자와 국왕까지도 상주물을 하사할 정도로 큰 스님인 진각 혜심의 비석이 월남사에 있고 이와 함께 석탑도 있어 ‘고려 진각국사 월남사 창건설’은 기정 사실이 되어 왔다.


그런데 근래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가고 있다. 강진군(군수 이승옥)의 꾸준한 지원과 월남사(주지 법화)의 협조, 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한성욱)의 정밀조사와 학술연구가 바탕이 되고 있다.


우선은 백제시기의 와당과 평기와가 확인된 점.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때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월남사 창건을 통일신라 이전으로 볼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셈이다. 오백년이 훌쩍 앞당겨 졌다.


이와 함께 중국의 『속고승전』과 고려시대 간행된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현(慧顯, 慧現, 570~627경)스님의 수행 입적처 달라산(達拏山)이 월출산으로 비정되고 월남사가 큰 구실을 했을 것으로 연결할 수 있다. 혜현스님의 수행시기와 월남사 확인 백제 와당의 제작 추정 연대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송계사(松溪寺)’ 명문기와 출토도 중요하다. ‘송계사(松溪寺)’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 가운데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던 진경대사 심희(855~923년)가 888~892년 머무르며 수행한 광주 송계선원으로 보인다. 월남사 사명 이전에 송계사 또는 송계선원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도 월남사에 들렸을법하다. 대각국사문집에 “보월산 백운원(寶月山白雲院)”, “보월산 용암원(龍巗院)”, “보월산 사자사(師子寺)” 시가 있다. 보월산은 월출산이다. 백운원은 지금의 백운동, 용암원은 국보 마애불상이 있는 구정봉 하, 사자사는 지금의 천황사. 이들 사찰의 중심 도량이 월남사였다 할 수 있으니, 당연히 대각국사는 월남사를 중심으로 월출산을 유상, 수행했을 것.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1132년)에도 월남사 스님 승명이 나온다. 진각국사 창건설 보다 100년이상 앞선다.


월남사의 상징적 성보. 진각국사비와 삼층석탑.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는 왕명으로 이규보가 앞면 비명병서를 짓고 김효인(金孝印)의 글씨이다. 액서도 정안(鄭晏, 鄭奮, 제액)의 글씨. 뒷면 음기도 서문은 왕명에 따라 최자(崔滋)가 지었고 탁연(卓然)의 글씨. 이를 새기고 비를 세우는 사람도 확인된다. 총괄은 영암군 부사, 현장 감독격인 입비차사원은 승평군 부사와 도강군 감무, 현장 실무책임자는 영암 군리가 담당한다. 강진 땅이지만 영암군의 월경처로 관리되었기에 영암군 부사가 총괄한 것.


진각국사가 입적[1234년]한 뒤 승탑은 송광사에 바로 세워지지만, 탑비는 세워지지 못하고 1250년이 되어서야 월남사에 세워진다. 비몸은 절단되고 곳곳이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동문선』(글자수 1,871자)에 실려 있다. 앞면은 탁본문(1,942자)도 전해진다. 음기도 많은 부분이 판독되었다. 특히, 고경스님(송광사 성보박물관장)의 정진으로 120여 자가 새로 판독되었다.


월남사 삼층석탑은(보물 제298호)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이다. 일반적인 백제계 석탑과 달리 옥개석의 낙수면이 여러 층단으로 조립되어 있다. 석탑 조성시기는 892~905년 사이, 고려초, 12세기, 1210~1234년 사이, 고려 중기 이후 등 여러 학설이 논의중이다.


2014년 정밀 구조 안전 진단 결과, 기단부 파손과 속 채움석 유실로 보수정비가 시급한 등급으로 판정. 2017년 4월에서 9월 사이 기초부를 제외한 석탑 부재 전체를 해체를 하였고 물성검사와 비파괴검사 등 과학적 조사나 손상도를 평가 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초기에는 대선사(大禪師)도 배출되지만 중기로 들어서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시인 백호 임제(1549∼1587)가 노래한 월남사 경관.

 

여기가 바로 옛날 그 월남사련만 / 이젠 안개와 노을속에 적막만이 / 산은 벌써 노을 빛 비치는데 / 물은 절로 아침 저녁 보내누나 / 옛탑은 촌락의 담장과 서로 의지하고 / 낡은 비석돌은 다리로 놓여 있네 / 귀중한 보배가 하나도 없으니 / 흥망성쇠를 애써 물어 무엇하리

此昔月南寺 煙霞今寂寥 山曾映金碧 水自送昏朝 古塔依村塢 殘碑作野橋 一無元寶訣 興廢問何勞

 

월남사 석탑이 다시 제자리에 들어서는 날, 좀 더 명쾌하게 석탑과 진각국사비의 내력을 포함하여 월남사를 중심한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상이 밝혀지리라.


* 출전 : 하늘에서 본 강진-드론으로 담은 강진군 마을-(마동욱), 시와 사람, 2019.3

- 전시 2019.3.12(화)~3.19(화), 강진고등학교 중앙홀, 오프닝 2019.3.12(화) 17:00




사진 : 마동욱


사진 : 마동욱

사진 : 민족문화유산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