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68 - 하늘에서 본 백련사 - 팔국사 배출, 고려 불교계를 이끌다

향토학인 2019. 3. 12. 03:01

인지의 즐거움168


하늘에서본 강진 백련사 - 팔국사 배출, 고려 불교계를 이끌다


김희태

백련사는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백련결사를 일으킨 역사적 전통이 있는 사찰이며 고려시대 8국사를 배출한 학풍과 종풍이 동시에 깃든 절이다. 백련사는 원래 839년 무염이 만덕사로 창건한다. 1232년 보현도량을 개설하여 백련사라 하고부터 온나라에 이름이 났다. 백련결사(白蓮結社)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선결사와 더불어 고려 무인정권기의 불교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불교 개혁 운동 단체였다. 그 뒤 백련사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를 배출하였다.


요세는 지눌의 수선사에 참여하였다가 사상적 입장의 차이로 지눌의 곁을 떠나 1208년(희종 4)에 월출산 약사난야에 머무르면서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되돌아갈 결정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다. 1211년(희종 ) 봄 탐진현의 최표, 최홍 형제, 이인천 등의 청으로 만덕산에 옮겨 살게 되었다. 요세는 문인 원영, 지담, 법안 등에게 명하여 건물 80여칸을 짓게 하는 등 1216년(고종 3)까지 크게 중창한다. 남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1223년(고종 10) 만덕사에 되돌아와서 도량을 크게 드날리게 되었다. 이어 1232년(고종 19) 4월 8일 처음으로 ‘보현도량’을 열어 법화삼매와 정토구생을 닦으며 천태의 법화삼매참의에 의해 오랫동안에 걸친 법화참법을 실천하였다. 요세는 1236년(고종 23)에 진정 천책으로 하여금 ‘백련결사문’을 짓게 하였는데, 이것은 보조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의 유포(1190)와 같은 불교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에 못지 않게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백련사의 보현도량에 대해 강화도의 최씨무인정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1237년 여름에 고종이 요세에게 선사의 칭호와 함께 세찬을 내리기도 하였고, 1240년 8월에 최이가 계환해『묘법연화경』을 보현도량에서 조판하게 하면서 그 발문을 찬한 사실에서 백련사와 최이정권이 밀접한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련결사에 참여한 사회계층은 보현도량 개창 이전에는 강진의 지방토호와 수령데, 개창 이후에는 최씨무인 집정자와 중앙관직자, 새로운 지식인층으로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요세는 참회와 정토를 강조하였다. 교화의 대상으로 '죄의 업장이 깊고 두터워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가 없는 나약한 범부'를 의식하였다.


요세를 이은 백련사 제2세 정명국사 천인은 요세의 불교사상을 계승하여 법화사상과 정토신앙의 융합을 이루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3세는 원완이었고, 제4세는 진정국사 천책이었다. 천인과 함께 요세의 문하로 출가하여 스승의 곁에서 백련결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236년 스승의 명을 받들어〈백련결사문〉을 지어 반포하기도 하였다. 천책 이후 제5세부터는 법맥에 혼돈이 있다. 고려말․조선초에 왜구로 인해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고려시대의 성보로 원구형 승탑(부도)이 있다. 원구형 탑신, 방형 기단, 탑신의 연주문(連珠紋) 등 특이한 기법을 표출하고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이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사적비를 세웠다. 사적비는 귀부와 비몸, 이수로 구성되었다. 특이한 것은 고려 시대 귀부에 조선시대 1681년(숙종 7)에 비몸과 이수를 올린 것. 조종저(1631~1690)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이우(1639∼1693)가 썼다. 전액은 이간(?∼1699)의 글씨. 귀부는 용머리화 되었는데, 앞발의 5발톱과 뒤꼬리를 귀갑 위로 올려 쳐들고 있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6갑문은 귀부의 앞부분과 뒤에서만 나타나고, 비좌를 에워싼 주변에는 인동무늬를 음각하였다. 이수에서 반결하는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689년에는 우암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어 강진의 성자진에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백련사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송시열을 추종하던 많은 유생들이 백련사에 몰려와 우암과 더불어 강학과 창수를 했다.


조선후기에는 지금의 대웅전이 들어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공포는 중앙칸에는 3구, 양 협칸에는 2구의 주간포를 얹힌 외3출목, 내4출목의 다포식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이다.


백련사를 에워싸고 있는 1,500여주의 동백나무 숲도 일품이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소교목으로 ‘산다’ 또는 ‘산다수’, ‘만다라수’라고도 한다. 천연기념물 제 151호이다.


이 산다수 숲길은 다산초당의 정약용(1762~1836)과 백련사의 아암 혜장(1772~1811)선사가 오가던 길이다. 차문화 관련해서도 뜻 깊은 곳이다.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중략)...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


* 출전 : 하늘에서 본 강진-드론으로 담은 강진군 마을-(마동욱), 시와 사람, 2019.3

- 전시 2019.3.12(화)~3.19(화), 강진고등학교 중앙홀, 오프닝 2019.3.12(화) 17:00


백련사(사진 마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