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70 - 하늘에서 본 정수사, 조선후기 16동의 전각이 즐비하다

향토학인 2019. 3. 12. 03:49

인지의 즐거움170


하늘에서 본 강진 정수사, 조선후기 16동의 전각이 즐비하다


김희태

 

청자 도공의 도량

승병대장이 나온 절

고금도 관왕묘 수호사찰.


정수사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로 기록이 전한다. 정수사의 사적기라 할 『호남좌도금릉현천태산정수사여지승람』에 “신라 애장왕 원년(800년)은 당 정원 십오년 을유인데 도선국사가 두 절을 창건하여 하나는 묘적(妙寂), 다른 하나는 쌍계(雙溪)라 했는데 본사의 옛 이름이다.”는 기록이 있다. 왕력과 간지, 승려 등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창건 연기를 전해 주고 있다.


이어서 “묘적사는 천개산(天蓋山)에 있고, 법당 한 개소가 있는데 천불상을 봉안했고 요사 두 개소가 법당 좌우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구로 인해 불에 타 개건하지 못하고 터만 있어 이로 인해 바위에 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천개산 중턱이고 천불상을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바위에 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 했다는 기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묘적사와 쌍계사는 정수사의 옛 이름이다. 정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 소속 절집이다. 대웅전이 조선시대의 건조물로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시왕전, 나한전, 응향각, 설선당, 적묵당, 동·서별당, 청풍루 등 16동의 전각이 있었다. 『정수사여지승람』에 원색 그림으로 남아 있다. 다른 전각들은 석수현 큰스님이 원력을 세워 정진한 인연으로 회향된 것이다.


정수사 경내 영역은 크게 4단 정도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단은 입구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삼청루 전면의 마당과 수경당이 위치한다. 두 번째 단은 삼청루와 대웅전 사이의 안마당으로 삼청루의 중앙 칸으로 누하진입을 하거나 삼청루 좌측면의 낮은 계단으로 진입할 수 있다. 안마당 주위로는 좌측에 봉향각, 우측에 천불전이 있다. 이 좌우측으로 골짜기를 따라 일렬로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가로로 길게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세 번째단과 네 번째단은 대웅전 배면인 북쪽방향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새 전각들이 자리한 곳이다. 대웅전의 뒤쪽으로는 선방, 약사전, 심검당 등이 서향 또는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바로 뒤쪽으로는 산신각, 좌측으로 선방, 약사전, 심검당, 심검당의 뒤쪽으로 청우당이 자리한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지형에 따라 남서향하였으며, 대웅전의 좌우에 있는 요사채와 나한전만이 대웅전을 향하여 남향, 북서향하고 있다.


정수사 1200년의 역사, 통일신라때부터 창건 연기가 있고 고려 청자 유적과도 인연이 깊다. 천년 비색 고려청자 도공들의 수호원찰이다. 임진정유왜란을 맞아서는 큰 피해를 입지만 스님들은 왜적과 대항하여 절을 지켰다는 구전이 있다. 이른바 ‘의승병’인 셈이다.


1561년에 조성한 부처님은 왜란의 어려움을 뚫고 보존되어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1648년에 다시 조성한 부처님과 함께 대웅전에 모셔진 세분 부처님, 석가여래삼불좌상은 2014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제 1843호로 지정되었다. 향좌측의 불좌상이 1561년, 중앙과 향우측의 불좌상이 1648년에 조성되었다.


1561년 존상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조각승 태보(太宝)와 사담(思淡)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 1648년 조산은 화원 승일(勝日) 등 7명의 조각승이 참여한다. 정유재란으로 정수사가 피해를 당한 시기에 불상 2구로 피해를 입어 뒤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불상 조성 방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 받았다.


나한전 나한상도 1684년에 조성한 명작이다. 대법당 앞에 1708년 명문이 있는 괘불 지주가 있고 이 무렵 제작된 괘불탱도 있다. 일부가 유실되었지만 2012년 고색복원 모사작업을 하였다.


정수사 스님들은 왜란이나 호란 등 국난을 당해서는 승병으로 나서기도 한다. 승병대장이 나오기도 한다. 운계 천기대사이다. 18세기 후반들어 국가에서 정한 세금도 못낼 정도로 어렵게 되었지만 스님들은 상소를 올려 고금도 관왕묘(關王廟)의 수호사찰이 된다.


정수사는 스님, 신도만이 아니라 시인, 묵객, 선비들도 학문과 수양, 강회, 유람을 위해 찾아 든다. 다산 정약용도 강진 유배시절 정수사를 찾는다.

 

손님 편하게 웃옷 풀고 대하고    解衣便客禮

먹을 것 주면서 불심 넓힌다네    施食廣禪心

법을 지키는 자면 뛰어난 제자라  護法須高弟

공로 새긴 비가 전음에 서있네    鐫功在殿陰

 

정수(淨水)라는 이름 따라 맑고 깨끗한 물이 중생들 마음 바다의 번뇌의 흐림을 다 없애줄 것 같다.


* 출전 : 하늘에서 본 강진-드론으로 담은 강진군 마을-(마동욱), 시와 사람, 2019.3

- 전시 2019.3.12(화)~3.19(화), 강진고등학교 중앙홀, 오프닝 2019.3.12(화) 17:00



사진 : 마동욱



조선후기 정수사 경관(정수사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