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8 - 100년전의 1장(丈) 5척 9층탑, 어디로 갔나 -장흥 행원리 절터와 ‘깨복쟁이’ 친구들, 그리고 향토사-

향토학인 2017. 5. 3. 15:35

인지의 즐거움108

 

100년전의 1장(丈) 5척 9층탑, 어디로 갔나
-장흥 행원리 절터와 ‘깨복쟁이’ 친구들, 그리고 향토사-

 

김희태

 

⓵행원리 탑은 방형 9층으로 높이는 1장(丈) 5척(尺)이고 5층에서 7층까지 운형(雲形) 조각이 있고 완전하며 고려시대 해원사(海院寺) 건립(191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⓶191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에 행원 9층탑이 있다는 기록이 있구만. 높이는 1장 5척. 꽤 높직했던 모양이여. 지금 절터에는 흔적이 없고... 9층이라 했지만  아마 5층같애. 작년부터 행원 절터 다시 가본다 하면서 아직 못 갔고... (김희태)(2017.03.08)

 

⓷고생 많네. 남아있는 문서부족으로 더 고생이 많네. 기록보존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히 느껴진다네. 보람있는 일과 평생의 성취에 격려를 보내며 나 또한 이런 일에 혼을 불살라 볼 걸 하는 후회도 들 때가 있다네. 전혀 맞지도 않는 극점, 아니 대척점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보내버린 세월들이 후회스럽기도 하네. 그건 그렇고 내가 도와 줄 것이 없어 미안한 맘도 들고 하네. 사실 행원이 고향이지만 실망스러울 때가 많아. 자라면서 이러한 관련 사료에 대해 어른들로부터 들어 본 적이 없다네. 김씨(광산)와 위씨(장흥)가 많이 사는 마을인데, 동네의 뿌리라든가 역사적인 가치의 발견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을 보질 못했다는 거지. 그 원인으로 빈곤과 교육부재를 들고 싶네. 이렇게도 자료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자네모습에 감탄할 뿐이네. 비록 일제의 기록문서지만 귀중하다 여겨지네. 나도 이제야 알아 부끄럽네. 발전과 건승을 비네.(김선이)(2017.03.08)

 

⓸친구, 오랜만일세~ 그곳은 우리 가문 문중 산인데 어렸을 적엔 관리하는 산직이가 살던 곳이고 지금은 흔적만 있고 산세가 정말 아름다운 명당으로 지금 바로 요사체가 들어선다 해도 부족할 것이 없는 명당이고 절터였을 것이 분명하다네. 현재 자연산 녹차 밭이 주변을 수놓고 있어 한 기업체에 녹차 밭을 임대차계약 해주고 년간 문중 고정 수입원이 되고 있다네, 친구께서 관심을 갖는 곳이라서 고향에 내려갔다 현장탐사를 해봤는데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된 비자나무가 장중하게 서 있다네. 고려 성종 때 "백림사"라는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그 후 조선초에 교리 "김협"이라는 사람이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단으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네. 전문가도 아닌데 넘 장황하게 썼구먼.. 그 이상의 기록은 모르겠고 장흥 행원리 "백림사"절터나 사찰기록을 찾아 보시면 어떠실지...(김희순)(2017.03.08)

 

⓵, ⓶, ⓷, ⓸ 네 개의 글. 문서에 있고 오간 글 같으니 요즘말로 하자면 ‘팩트’다. 1919년과 2018년, 100년 사이 네 개의 ‘팩트’. 그런데 잘 연결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 하나씩 풀어보자.

 

⓵은 장흥읍 행원리 절터의 탑 기록. 1919년. 절 이름은 해원사(海院寺). 장흥읍 행원리 절터 자료를 찾던 중 100여년전 문서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이 문서를 작성한 때(1919년)까지도 행원리 절터에는 1장 5척 높이(약 4.5미터)의 완형 석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1919년 그 이후 어디로 갔을까? 언제쯤 행원마을을 떠났을까? 혹시 누가 알고 있을까? 전해진 이야기라도 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 이같은 궁금증을 알아 보고자 해서 보낸 글이 ⓶. 2017년 3월 8일.

 

⓶는 ⓵의 기록을 확인하고 행원리 출신 친구들에게 혹시 어렸을 적에 절터에서 탑이나 탑재를 보거나 들었던 적이 있는가 물어 본 글이다. 문자나 카톡을 이용하여 1919년 문서 사진도 보냈다. 보낸 사람은 김희태. 받는 사람은 김선이, 김희순, 위선동, 위화복. 자응(장흥)초등학교, 중학교 등기 동창들. 말하자면 ‘깨복쟁이’ 친구들이다.

 

⓶의 글 문자와 사진을 보고 친구들은 처음에 당황했으리라. 또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렸을 게다. 특히 일본어가 표기된 1919년 문서 사진을 보고는 ‘나 한테 어쩌란 말인가’, ‘머. 지가 좀 안다고 자랑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을법하다. 친구들은 ‘들어 본일 없는 동네 일’, ‘떠난지 오래인 고향 동네의 옛 야그(이야기)’, ‘밸로(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향 일’, ‘먼가 들은 것도 같고, 찾아보고 싶은 일’, ‘어른들에게 여쭤 봐야지’ 등등 여러 생각을 했을 터. 거기에 ‘당황스러움’과 ‘고개 갸웃거림’이 함께 했을게다. 두 친구로부터 답이 왔다.

 

⓷의 글. 김선이 친구. 목포에 산다는데, 가까이 있으면서도 대면은 못하고 전화로, SNS로 이따금 소통을 하고 있다. ‘글’을 무척 즐겨쓰는 친구. ‘카페’나 ‘밴드’에 올린 일상사 글을 보노라면 작가급이다. 서예도 수준급이다. 기록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두 성씨(위씨, 김씨)로 이루어진 동네의 특성, 동네의 뿌리에 관심을 좀 더 두었으면 하는 바램, 본인도 이런 일을 해 볼 걸 하는 생각도 했었다는 말과 함께 격려말도 들어 있다. 일제의 기록문서이지만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선이’친구가 언급한 내용, 그런 것들에 하나씩 살이 붙으면 그게 동네(행원)의 역사가 된다. ‘마을사’, 바로 향토사라는 것이다.
 
⓸의 글. 김희순 친구. 수도권에서 생활한다는 것 말고는 근황을 잘 알지 못했고 만난지도 오래다. 그런데 ‘희순’ 친구와는 작년에 한번 통화를 한적이 있다. 2016년 10월 23일. 또 다른 장흥 친구(임건창)의 어머님 영전에 재배올리고 광주 오던 길.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뱅뱅돌던 ‘행원리 절터’와 ‘탑’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앞의 행원친구들과 해설사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어른 들께 알아 보겠다’(위선동), ‘들은 적이 없다’(김선이), ‘절터는 있는데 탑은 없을 것’(김상찬)이라는 답신 문자가 왔는데, ‘희순’ 친구는 전화를 한 것.

 

‘탑은 본적이 없는데, 절터는 문중 산에 있네. 큰 비자나무도 있고. 아버님이 행원 사시는데 동네 옛 일을 아실 터이니 연락드려보게. 구순이지만 건강하시네.’ 알려준 대로 전화를 드렸다. 김선장 어르신. ‘누구신가’, ‘희순이 친굽니다.’, ‘그래. 반갑네, 먼일인가.’, ‘행원 마을유래나 절터를 알고 싶어서요. 한번 가겠습니다.’, ‘오. 절터. 혼자 찾기는 어려울거여. 함께 가보세. 오면 연락해.’,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⓸의 글. 의외로 많은 ‘문화정보’를 담고 있다. 명당터로 보이며 자연산 녹차밭이 무성한 곳. 지금은 광산김씨 문중산. 어렸을적까지 산직이가 살았고 녹차밭은 기업체에 임대하고 그 임대료는 문중의 고정 수입원.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 수령 비자나무. 현지 안내판에는 고려 성종 때 “백림사” 절이 있었고 조선초기에 교리 김협이 단을 쌓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던 곳이라는 기록.

 

무엇 보다도 고향 들른 길에 현지를 한번 다녀왔다고 한다. 고향의 옛 일에 대해 문자를 보낸 친구의 관심으로 본인도 흥미가 느껴져 현지까지 탐문했던 것. 이것 또한 바로 향토사 연구 기법 가운데 하나이다. 현지를 중시하고 탐문과 제보를 통해 하나씩 확인하는 것. 그리고 살을 붙여가며 조사하고 정리하는 것. 그렇게 정리를 하여 축적되다 보면 옛터(절터)-마을(행원리)-읍면(장흥읍)-군(장흥군)으로 확대가 된다.

 

지금 장흥문화원에서는 <장흥읍지>를 발간중에 있다. 장흥군의 지원으로 장흥군내 읍면을 다 마치고 이제 마지막으로 ‘장흥읍’ 차례이다.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김상찬친구와 협의하면서 자료를 정리 중에 행원리 절터와 탑을 추적하고자 ‘깨복쟁이’ 친구들에게 연락했고,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은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이니 열 살도 못되 만난 친구들. 이제 환갑줄이다.

 

우리들이 살아 왔던 터, 생활해 오면서 듣고 경험했던 것, 그 모든 것이 향토사 대상이다. 그리고 향토사의 주체가 바로 우리들이다. ‘자응’에 기반을 둔 다른 친구들도 고향의 현장과 자료에 관심을 가져보고, 무어라도 있으면 연락을 바란다. 그건 <장흥읍지>, <면지>, <장흥군지>의 기초자료가 된다. 친구들의 건승을 빈다.

 

* 다음 글은 <장흥읍지(총설)>(장흥문화원, 2018) 문화유적(불교유산편) 원고로 작성되었으나 실리지는 않아 여기에 소개한다.

 

□ 행원리사지(杏園里 寺址)

 

  ○ 소재지 :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 산42-1번지

  ○ 연혁
     행원리 사지는 고려시대부터 절이 있었던 곳으로 절 이름은 ‘해원사(海院寺)’ 또는 ‘백림사’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절터에는 높이 1장 5척(약 4.5미터)의 탑이 있었다는 기록도 확인되어 비교적 규모가 큰 절이라고 보여진다.

 

  1747년 간행된 <장흥읍지(長興邑誌)> 부동방(府東坊) 고적조에는 “杏園古寺 在杏園 有石塔(행원고사는 행원에 있고 석탑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9년의 <유적 및 유물 소재도 보고>(遺蹟及遺物 所在道報告)>1(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장흥군편에는 “석탑 : 부동면 행원리소재, 방형 9층, 높이 1장 5척, 하단 직경 6척, 제5층에서 7층까지 구름무늬(雲形 조각), 완전, 고려 해원사(海院寺) 건립”의 기록이 있다. 1919년 당시까지 완전한 석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동방(府東坊, 부동면)은 조선시대 장흥도호부의 동쪽(예양강 동쪽) 지역의 면이름으로 ‘부동(府東)’이라 했다. 부동면은 1936년 장흥면과 합해졌고, 장흥면은 1940년 장흥읍으로 승격되었다.

 

○ 유적현황
  행원리사지는 북동쪽으로 난 행원4길을 따라 약 500m 정도 들어가면 광산김씨 행원문중 건물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서쪽 산길을 따라 약 200m 정도 진입하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지는 계곡부의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고, 사지 일대에는 600년 정도 된 비자나무가 있다. <한국의 사지>(2011) 조사당시 비자나무 앞에는 ‘고려 성종 때 백림사라는 절에 심었고, 조선 초에 김씨가 입향하여 절을 신흥관서로 옮겼다.’라는 설명판이 있다. ‘백림사’라는 사명은 문헌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추정사지에는 광산김씨 행원문중 묘와 대나무 군락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 자연산 차밭도 있다. 묘역 앞쪽으로는 석축 1기가 확인되는데, 이 석축은 사지와의 관련보다는 민묘 조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민묘 아래 대나무군락 일대에서는 두께 2㎝의 어골문, 집선문, 수파문 와편과 청자편, 백자편이 확인된다.

 

○ 성격
  행원리사지 구역은 민묘 조성 등으로 인해 사지 관련 유구의 확인을 할 수 없고, 사역의 범위는 비자나무 앞 설명판으로 보아 비자나무가 심어져 있는 곳까지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지는 창건과 관련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파악할 수 없지만, <장흥읍지>(1747년)의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중엽 이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만일 비자나무 앞 설명판에 보고된 백림사라는 절이라면 이 사찰은 조선초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찰의 운영시기는 조사구역 내에서 수습되는 유물의 양상과 <장흥읍지>, 비자나무 앞의 설명판을 감안했을 때 고려후기부터 조선초기로 추정되고, 수파문 와편과 백자편은 사찰 관련 유물이기 보다는 광산김씨 묘역과 관련된 유물로 파악된다. 1919년까지는 완형의 석탑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행원리사지 추정지는 민묘와 도로 조성 등으로 지형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고, 매장유구의 잔존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 참고문헌 : <유적 및 유물 소재도 보고(遺蹟及遺物 所在道報告)>1(1919년,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사지> 현황조사보고서 하, 2011, 153~154쪽
· 제보 : 김선만(행원리, 90세), 김선이, 김희순(60세, 행원리 출신)

 

 

1919년 <유적급유물 소재도 보고>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표지

 

1919년 조사기록 장흥군편. 맨 왼쪽에 부동방 행원리 소재 방형 9층 석탑 기록이 보인다.

 

1747년 <장흥읍지> 부동방 고적조 기록.

가운데쯤 '杏園古寺 在杏園 有石塔(행원고사 : 행원에 있고 석탑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행원리 절터 전경. 오른쪽 윗 부분에 노거수 비자나무가 보인다.

 

행원리 절터의 광산김씨 묘역

 

행원리 절터 수습 유물

(불교문화재연구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