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7 - 섬진강과 영산강의 미술, 1998

향토학인 2017. 4. 30. 14:09

인지의 즐거움107

 

섬진강과 영산강의 미술, 1998

 

김희태

  

당대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미술품

 

山自分水領이라 했듯이 강줄기와 산자락을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물의 흐름을 따라 사람이 모여 들고 자연 물자가 운송집결되면서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자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이 있고 그 생활모습이 문화로 투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때, 미술품은 당대의 역량이 결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과 견문과 경험이 사회경제적 배경과 어울어져 가능했다는 것이다.

 

영산강유역에서 눈여겨 볼 고대의 미술품은 나주 반남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국보 297)이다. 1917년에 확인된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삼국시대의 관모(冠帽)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금관은 자 모양인데 반해 나주 금동관은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이같 은 미술품을 창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은 대형독무덤[甕棺墓]으로 대표되는 영산강유역의 독자적인 고분을 들 수 있다. 두개가 합쳐진 합구식 옹관은 그 길이만도 4미터에 달한다. 이처럼 거대한 토기를 구워낼 수 있었던 기술과 예술적 감각, 40미터에서 60미터에 이르는 대형 고분을 조영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들에 의해 그 같은 신비의 금동관 세공기술은 자연스레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관모, 나주 금동관

 

이곳 고분과 이웃한 나주 복암고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옛 백제권에서는 4개소(무령왕릉, 익산 입점리 고분)가 확인되었으니 영산강유역에서만 2개소에서 출토된 셈이다.

 

다음으로는 이보다 앞선 시기의 문화적 역량을 들 수 있다. 시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전남지역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支石墓]이 약 2만여기가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노동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치권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함평과 화순의 청동유물 또한 중요하다. 1971년 발견된 화순 대곡리 돌널무덤[石棺墓]의 청동유물은 한국식동검 3, 팔두령 2, 쌍두령 2, 잔무늬거울 2점 등 11(국보)이었다. 권위의 상징이며 주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이들 유물로 보아 그 주인공은 사제자로 추정된다.

 

함평 초포리의 돌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 4, 잔무늬거울 2, 간두령 2, 쌍두령 2, 무기류인 동과 1점과 동모 2점 등 모두 2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87년의 일이다. 이를 사용하는 주인공은 의기와 병기를 바탕으로 주민에게 강제력을 구사하는 지배계급의 최고 권력자로 제정을 관장하는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돌에 불어 넣은 생명력, 살아 숨쉬는 사자상

 

석조건축은 섬진강 수계인 지리산 화엄사의 4사자 3층석탑이 손꼽힌다. 특히 희노애락을 표현한 네마리의 사자는 그대로 살아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돌에도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었던 선인들의 미적 감각. 신비의 예술이라 할만하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월출산의 성풍사지 5층석탑이 주목된다. 통화 27(1009)의 절대연대가 확인된 탑이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백제계 석탑이 출현한다. 담양의 읍내리 석탑과 나주의 송제리 5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한 가닥인 지석강 상류의 천불천탑 운주사. 국내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석조 불감, 와불, 원형다층석탑 등 친근하고도 소박한 조형성을 엿 볼 수 있다.

 

석조 조각으로는 우리나라 부도탑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두작품. 영산강 수계의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영산강 유역의 넓직한 들판을 닮은 듯 안정감 있고 섬세함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섬진강 수계의 연곡사 동부도는 어떤가. 지리산의 산세를 닮은 듯 높직하고 귀꽃 하나에까지 정교한 조각기술을 알 수 있다.

 

불교회화사에 있어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작품을 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괘불 가운데 가장 연대가 앞서는 나주 죽림사 세존괘불탱. 1622년의 일이니 375년이 지났어도 그 자태는 선명하다. 화엄사의 영산회괘불탱은 두번째로 연대(1653)가 앞서면서도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 불화가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밝고 화사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영산회상의 진리로 가득찬 환희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화와 서양화의 거장을 배출한 강

 

근대에 이르러 뛰어난 작가가 배출된 지역이기도하다.


의재 허백련(18911977)과 남농 허건(19071987)은 진도에 태를 묻었지만, 의재는 영산강의 샛강 광주천이 발원하는 무등산에서, 남농은 그 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의 포구인 목포의 유달산 아래에서 남화의 전통과 그속에 내재된 여기(餘技)와 사의(寫意)의 정신을 형상화 했다. 물론 의재는 전통적인 남화를 한국 현실에 맞게 적극적으로 토착화 시켰고, 남농은 그 전통 위에 현대적 감각을 도입시키며 개성을 중시하는 화풍을 조성했다는 평가도 있긴 하다.

 

이들보다 훨씬 앞서 활동한 학포 양팽손(14801545)은 영상강의 샛강인 드들강[지석강] 상류 능주에서 태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가 그의 작품으로 밝혀져 있는데 안견의 화풍을 따른 득의(得意)작이다.

 

섬진강 갈래에서 활동한 작가로는 화순 남면 사평출신으로 동복에 거주한 사호 송수면(18471916)이 있다. ‘송나비로 불리울만큼 화접(花蝶)도에 뛰어났다.

 

서양화가 오지호(19051982). 섬진강 수계인 동복에서 태어나 영산강 가닥인 광주에서 정착하였다. 한국 근대미술의 여명기에 구상회화의 당위성을 밝히면서 민족예술의 구심체로서 회화적 의미를 명철하게 밝힌 화가로 꼽힌다. 무등산을 사이에 두고 섬진강 수계와 영산강 갈래가 나뉘니 어쩌면 두 강의 자양분을 모두 받은 것이 아닐까.

 

*<문화예술> 199810월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진설명

1. 영산강 유역의 나주 반남 신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관모이다.

2.영산강유역의 화순 도곡에서 출토된 청동 팔주령(八珠鈴)

3. 섬진강 유역의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 우리나라 석조 탑파 건축의 걸작품이다.

4-1 영산강 유역의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4-2 섬진강 유역의 구례 연곡사 동부도와 함께 석조 조각의 극치를 보여준다.

5. 섬진강 수계의 동복에서 출생하여 영산강 갈래의 무등산에 정착한 구상회화의 선구자 오지호의 작품 계곡’(1978년 작)

6. 진도에서 출생하여 영산강 유역 무등산에 정착한 의재 허백련의 작품 高士聞香

 

*1998년에 쓴 글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간행하는 <문화예술>에 청탁을 받았는데, ‘미술이라는 단어에 저어하다가 전남의 문화자원홍보라는 차원에서 승낙하였다. 전통시대 미술을 다뤄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감기한에 가까스로 원고를 보냈는데, 제대로 도달이 안된 것. 당시는 인터넷 등이 원활하지 않은터라, 보낸게 에러가 났던 것. 그런데 그 사실을 외국 여행중에 연락 받은 것. 원고를 보내고 고인돌 세계유산 등재 추진과 연관해 프랑스(유네스코 본부, 까르낙 거석문화유적 등)와 영국(스톤헨지 유적 등)을 방문했는데 프랑스에서 전화를 받았다. 전후 사정을 말하고 귀국하여 부랴 부랴 고속버스편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마나 또 사정이 있었고, 결국 항공편으로 발송. 훌쩍 20년이 지나고 지금은 원고가 실린 그 책마저 집안 서재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때 통신으로 보낸 원고 초안과 덧붙인 글이 보관되어 있다.

 

○○ 선생님 案下

건승하신지요? 罪百謝하옵고 사진과 원고 보냅니다. 버스편으로 사진 먼저 보내려고 갔는데 조금 늦었더니 접수를 않는다고 해 원고는 통신으로 보내고 사진(원고 출력물 포함)은 비행기편으로 보냅니다. 원고 내용은

- 공예 - 고대

- 건축, 조각(석조) - 통일신라, 고려

- 불교회화(괘불) - 조선시대

- 서양화, 한국화(오지호 허백련 등) - 근대

등으로 간략히 시대흐름(고대근대)과 유형별(공예, 건축, 조각, 회화)로 써 보았습니다. 참고하셔서 편집하시기 바랍니다.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사진은 반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듭 용서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희태 드림 1998.09.22.


나주 신촌리 금동관, 국보 제295호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관모(冠帽)이다. 1997년, 출토된지 80년만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1917~18년 사이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국 중요유적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나주 반남면 신촌리 7호 고분에서 출토된 것. 당시 조사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알려지고 있다. 금동관은 국가 귀속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한 탓으로 '전남 나주'라는 '문화 주소'가 확실하지만 소재지와 소유자가 서울로 되어 있어 나주시청이나 전남도청에서는 문화재 지정신청 마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간의 변칙으로 추진하기로 '지혜' 아닌 '지혜(?)'를 모았다. 나주문화원 등 문화기관단체에서 문화부(국립중앙박물관)와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건의하고 행정기관에서는 국가문화재 지정 추천 형식으로 서류를 제출하자고 한 것. '전남 나주 '라는 연고가 있기에 직접적인 신청은 아니더라도 '건의'와 '추천'의 형식을 취하는 일종의 '성동격서' 작전. 결국 허수룩한 것 같았지만 작전은 성공하였고, 80년만에 국보로 지정된 것. 당시 이끌어 주신 박경중 나주문화원장님, 허수룩한 지혜이지만 하나씩 실천했던 나주시청 김종순, 윤여정 두 학예사님, 지역 일이라면 거들어 준 윤여정 학형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해는 금동관 출토 100년! 더 큰 울림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