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6 - 망향정에서 적벽 아래 잠긴 터전을 보다 ; 2000.07.03

향토학인 2017. 4. 23. 19:24

인지의 즐거움106

 

망향정에서 적벽 아래 잠긴 터전을 보다.

-<망향정유래기>, 2000.07.03-

 

김희태

 

산자수려한 赤壁 경관과 물 맑은 생명수 同福湖를 바라보는 자리에 望鄕亭을 세운 큰 뜻은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존하며 고향을 그리며 문화를 생활화하는데 있다.

 

同福은 원래 백제 때부터 豆夫只縣이라는 고을이 있던 유서깊은 곳으로 신라 경덕왕 때 동복현으로 고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독립된 고을로서 기능했다. 1914년에 동복군의 7개면이 和順郡과 합해지면서 同福, 二西, 北面, 南面 4개의 면으로만 남게 되었다.

 

동복에는 섬진강 수계인 동복천을 중심으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찬란한 문화유산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서면의 적벽이 으뜸이다. 노루목(獐項), 滄浪, 勿染, 寶山 네 곳의 적벽은 천연자원으로서도 빼어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풍광을 노래하였다.

 

특히 한산사의 저녁종소리(寒山暮鐘), 금모래에 내리는 기러기 때(金沙落鴈), 학여울에 돌아가는 돛대(鶴灘歸帆), 선대의 활쏘기 놀이(仙臺觀射), 적벽의 밤 낙화놀이(赤壁落火), 부암 앞의 고기잡이 구경(浮巖觀漁), 고소대의 맑은 바람(姑蘇淸風), 설당의 밝은 달빛(雪堂明月) 등 노루목 적벽 중심의 八景詩가 으뜸이다.

 

산과 물이 어울어진 뛰어난 풍광은 자연그대로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생활과도 뗄 수가 없어 또 다른 쓰임새가 있었으니 광주권 상수원으로 변한 동복호가 그것이다.

 

1969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이서면 보산리 卵山·寶巖, 월산리 月坪·長月·京山, 서리 西村, 도석리 石林·石洑·傳道, 장학리 獐項·鶴堂, 창랑리 滄浪·勿染 북면 瓦川里 瓦村마을이 물에 잠겨 정든 선대 터전을 떠난 주민들은 매년 호수를 보면서 望鄕拜를 올리는 것으로 失鄕의 아픔을 감내해 왔다.

 

다행히 張斗錫선생을 비롯한 망향정건립추진위원회에서 주도하고 전라남도의 지원과 광주광역시화순군의 협조에 힘입어 5칸 건물을 세우고 望鄕亭이라 이름했으니 그 뜻이 장엄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제 이곳이 다시금 자연과 인간의 조화속에서 새로운 문화터전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하면서 건립유래를 적어둔다.

 

<망향정유래기>

200073일에 쓴 글이다. 17년이 지나 다시 읽어 본다. 마침 화순 적벽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2호로 지정(2017.02.09.)됨에 따라 보존 관리 활용에 대한 논의자리(2017.04.14.)를 마련한 뒤 자료 정리하던 차.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파일을 찾아보니 다행인지 저장되어 있었다. 이십여년 전의 이 글. 어디에 실리지도 않았고, 망향정에 현판으로 새기지도 않았고, 그저 개인의 자료로만 남아 있다. 누구의 글로 보아야 할까.

 

사연인즉 이렇다. 더위가 한창이던 20007. 천하절경이라던 적벽이 물에 잠겨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이 망향공원을 조성하고자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정자를 세우게 된 것. 이름은 망향정으로 하고, 전남도지사 명의의 망향정기’ 작성 의뢰차 당시 문화환경국장실을 방문하였다. 해관 장두석 선생과 몇 분 어르신들. 새로운 일이면 늘 불려 갔던 터라 국장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경과를 경청하고, 자료를 뒤적여 글을 썼던 것.

 

정자는 이미 지어졌고 준공식 날짜도 정해졌는데, 서예가가 글씨를 써서 새겨야 하니 시간을 다툰다는게 당시 사정. 바로 작성해 검토를 끝낸 뒤 건립위원회 앞으로 팩스를 보냈다. 그 분들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현장에 한번 가보고 경관과 풍정을 둘러보고 망향의 의미도 담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여의치 않아 글을 먼저 쓴 것.

 

그때 적벽 동복호 망향정 관할인 화순군수, 동복호 상수원 혜택을 보는 광주광역시장에게도 기문을 요청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광주광역시장은 <실향민위로기>, 전라남도지사는 <망향정유래기>, 화순군수는 <망향정기>로 글의 내용을 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하여 그 어른들도 동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망향정유래기> 1,000자쯤의 글을 쓴 것.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기관장 명의의 글은 일종의 공공기록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어렵다고 할까. 어쩌다 보니 축사, 발간사, 환영사, 대회사 따위 많은 글의 초안을 쓰곤 해 왔다. 관련 업무 담당 계장, 과장, 국장, 비서실을 거쳐 마무리되는데, 초안이 그대로 오면 사실 좀 마음이 놓인다. 늘 부끄럽기는 하지만.

 

<망향정유래기>도 초안 그대로 검토가 끝났다. 현장을 가서 그곳의 감성은 다 담지 못했을지라도 문화(적벽 경관과 풍물), 역사(동복현, 마을 유래), 생활(상수원), 망향(수몰 이주민)의 의미를 담고자 했다. 또 누구나 쉬이 이해할 수 있고 행정가의 글이란 점도 고려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앞에서 초안 개인 자료로만 남았다 했는데, 여기에도 또 사연이 있다. 글을 보내고 나서 몇 달 뒤 당시 국장이 조용히 부르더니 미안해. 말 못했는데 이해하고 넘어 가자구하면서 전말을 말한다. 망향정건립추진위원회에서 이미 글을 지어 서예가가 글씨를 써 서각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전남도에 기문 작성을 요청했던 것. 당시 국장도 나중에 알았고, 그 어른들도 좋은 글인데하면서 미안해 하더라는 것. 그때 서로 소통을 잘 했다면 이 부끄러운 글은 쓰지 않았을텐데....

 

그런데 이십여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보니 이 또한 하나의 자료가 될법하다. 당시 썼던 초안의 끝에는 “2000己卯 7全羅南道知事 ○○○ 삼가 짓다.”로 맺었다. 내부 검토까지 끝나 요청한 추진단체에 보내진 것이니 분명 내 글이 아닌 기관장의 공공기록물이다. 그런데 실리지도, 새겨지지도 않았고, 망향정 현장에는 다른 글이 새겨져 있으니 개인 초안 자료에 머물고 말았다. 누구의 글이라 해야 할까.

 

*2017414일 명승 화순 적벽의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관계기관 및 전문가들이 적벽 유상(遊償)을 한 날

- 화순 심홍섭동학이 보내 온 도지사의 <망향정기> 현판 사진을 실마리로 옛 기억을 끄집어 내 200073일 쓴 <망향정유래기>를 다시 보며 몇 줄 적다.


망향정기 현판


<망향정유래기> 작성 당시 보고자료(2000.07)

전라남도지사는 <망향정유래기> , 광주광역시장은 <실향민위로기>, 화순군수는 <망향정기>를 내용으로 하도록 제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