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4 - 나주 서성문 안 석등, 석당간, 석탑 명칭 - 문화유산 원형찾기4

향토학인 2017. 4. 6. 03:19

인지의 즐거움104

 

 

<나주 서성문 안 석등>, <동점문 밖 석당간>, <북망문 밖 삼층석탑> 명칭 - 문화유산 원형찾기4

 

 

김희태

 

 

1990년 대한민국 국보 제103호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서울에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31년 광양에서 떠났으니 환갑이 되어 광주로 환안(還安)된 것이다. 제자리 광양으로 가지는 못하고. 그 무렵 함께 이전해 달라는 지역의 요청에 든 대상은 ‘나주 서문 석등’이었다. 광양 석등보다 앞서 1929년 나주를 떠난 유물. 그러나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는 대답만이 돌아 왔을 뿐.

 

그런데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들어서면서 옮겨 갔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원자리로 환안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늘 염두에 두고 있다. 문화재 원형 보존 관리. 처음 만들어진 제자리에 있어야 할까. 지정될 당시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게 맞을까.

 

 

2010년, 또 한번의 계기가 있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칭부여기준 논의를 하면서 문화재명칭이 바뀌었다. 나주 ‘서문’, ‘동문’, ‘북문’ 등 일반 명칭으로 표기된 문화재명이 ‘서성문’, ‘동점문’, ‘북망문’ 등 고유명사로 부여 된 것. 이제는 ‘문화주소’ 가 더 확실해 진 것. 그만큼 돌려 달라 강조할 수도 있을 터. 아니 돌아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과정과 문화재명칭 변경과정을 정리해 본다. 2010년 국가문화재(석조 건조물) 명칭변경 지정예고에 따라 문화재청에 제출한 의견에다가 몇가지 자료를 덧붙여 정리한 내용. 윤여정 학형의 <나주 서성문 안 석등 유출과 이건>(<향토문화>35,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16)에 부록으로 실은 글이다.


‘유출’이란 용어가 자극이 되었던지 돌아올 '기미'가 보인다. 2011년 전남에 국립나주박물관이 들어 선 것도 큰 계기이다. 돌아 오는 날 기꺼이 나서 맞으리라. 환안고유문(還安告由文)을 올리리라.

 

 

 

등감의 향불이여! 천년을 타오르소서

 

羅州 石燈 還安告由文

 

癸酉 發願 羅州 西城

己巳 流出 域外 香火

丁酉 某月 原鄕 還安

全羅 千年 羅州 慶事


南贍 高麗 羅州 中興

聖壽 天長 百穀 豊登

錦邑 安泰 富貴 恒存

願以 燈龕 永獻 供養

 

己巳 臘月 聖燈 强出

慶福 三十 國寶 榮譽

民官 誠力 願願 還元

國立 博物 大願 移安

 

燈龕 香火 千年 恒享

全南 藝香 萬年 登天

錦邑 安泰 永遠 無窮

一國 衆民 世世 福德

 

나주 석등 환안고유문 


계유년(선종 10, 1093) 발원하여 서성문 안에 세웠는데

기사년(1929) 유출되어 89년간을 타지에서 향화 올렸네

정유년(2017) 4월에 원래 터자리 나주로 다시 모시니

전라 천년 전남과 천년 고도 목사 고을 나주의 경사로세

 

남섬부주 고려국 나주목 중흥리 흥룡동에 석등세워

황제의 만수무강과 모든 곡식 풍년들기를 기원하고

나주(금읍)의 안녕과 태평, 백성들의 부귀가 꾸준하기를

원하고 또 원하면서 등감을 마련해 영원히 공양을 바쳤네

 

기사년(1929) 12월에 성보 석등마저 강제로 반출하여

경복궁에 머문지 32년 다행으로 국보지정 영예 따랐네

민관이 힘과 지혜 모아 옛터로 돌아오길 원하고 원하니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나주박물관 큰 원 세워 돌아왔네 


등감의 향불이여! 천년을 타오르소서

전남의 예향 향기여! 만년을 피어 오르소서

나주의 안녕태평이여! 영원토록 무궁하소서

온 나라의 중생 민인이여! 세세토록 복덕을 누리소서

 

서문 석등 - ‘국보’로 지정했다가 보물로 재지정

 

 

 

‘나주 서문 석등(羅州西門石燈)’은 1960년 6월 2일 국보 제547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북궁내. 고향 나주에서 강제로 옮겨 간지 32년만이다. 지금은 ‘보물’이지만 1960년 처음 문화재지정 때는 ‘국보’였다. 그런데 지금의 ‘국보’와는 개념이 다르다. 1955년 문교부에서 ‘보물’이라는 용어를 ‘국보’로 일괄 개명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지정 유형문화재는 모두 ‘국보’라 한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문화재 지정 관련 법률’이다. 1960년 당시 지정고시 관보(제2593호 ; 대한민국전자관보[http://theme.archives.go.kr])에 따르면 ‘조선보물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 제一조에 의하여 국보로 지정된 사항을 동령시행규칙 제一조에 의하여 고시한다.’는 문교부장관(이병도) 명의의 고시문이다. ‘조선보물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은 일제시기 1933년에 제정된 법령인데 광복 뒤 15년이 지난 1960년에 지정하면서도 일제기 법령을 따르고 있으니 의아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기에도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다. 제헌헌법 제10장 제100조의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는 규정에 따라 일제기의 법령이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재 관련해 일제기 법령이 ‘청산’된 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1962년 1월 10일 법률 제961호)되면서다. 이 법에 따라 ‘보물’ 용어를 다시 썼고, 새로 남한 중심의 목록을 재지정한다. 이미 훼손된 문화재는 지정목록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나주 서문석등’은 보물 제364호로 재지정된다. 1963년 01월 21일이다.

 

 

 ‘나주 서문석등’ 문화재지정명칭은 지금은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안 石燈)’이다. 2010년 12월 27일 변경한 명칭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칭 부여기준을 마련하고 전국의 국가지정문화재 명칭을 변경한데 따른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명칭변경 지정예고(2010.11.01. 관보 제17373호)를 할 때에는 ‘나주 서문 석등(羅州 西門 石燈)’으로, 기준에 따라 띄어쓰기만을 하였다.

 

그런데 명칭변경 지정예고 기간중(30일간) 나주시와 전라남도에서는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심의(2010.11.24.)를 거쳐 원 소재지의 역사지명을 포함하여 ‘나주 서내리 석등(羅州 西內里 石燈)’(전라남도) 또는 ‘나주읍성 서성문안 석등(羅州邑城 西城門 內 石燈)’(나주시)으로 표기해야 된다는 의견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이와 함께 원 위치인 나주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출하였다.

 

문화재청에서는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안 石燈)’으로 명칭을 변경 지정 고시하였다. 변경 사유는 ‘한글 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 고증에 따라 서문을 서성문으로 변경하고, 서성문 안쪽에 있었으므로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밖 石幢竿, 보물 제49호, 당초 명칭 – 나주동문외석당간, 변경예고명칭 – 나주 동문 외 석당간),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望門 밖 三層石塔, 보물 제50호, 당초명칭 – 나주북문외삼층석탑, 변경예고명칭 – 나주 북문 외 삼층석탑)도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들 세 가지 국가지정문화재의 명칭변경에 조선시대 역사지명이 포함된 것은 나주시와 전라남도의 의견 제출에 따른 것이다. 당시 제출된 의견을 소개한다. 이는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심의자료를 참조하였고, 문화재청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건축문화재분과, 2010.12.26) 회의록에도 그대로 실렸다. 그간 힘을 모아준 윤여정, 김종순, 윤지향 동학께 고마움을 전한다.


  

보물 제49호 나주 동문 외 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o 예고 명칭 : 나주 동문 밖 석당간(羅州 東門 밖 石幢竿)
o 전남도 의견 : 나주 동점문 밖 석장(羅州 東漸門 밖 石檣)

o 나주시 의견 : 나주읍성 동점문 밖 석장(羅州邑城 東漸門 밖 石檣)

o 변경 명칭 :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밖 石幢竿)

 

 

□ 동문⇒동점문[기준 4조 ②-1)

 

o 문화재 명칭은 고유명사를 사용하도록 한 한 기준에 따라 소재 위치를 표기하는 명칭에도 고유 이름으로 해야 한다. 나주읍성의 동문의 정식 이름은  ‘동점문(東漸門)’이다.

 

o 또한 국보 남대문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원 이름으로 다시 부여 했듯이, ‘동문’이라는 막연한 방향표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과 명분이 있는 ‘동점문(東漸門)’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해야 한다. 

 

o 고증자료

 

조선후기 나주목지도의 나주읍성과 사대문 명칭(1872년, 규장각 소장지도)
원이름 남문- 남고문(南顧門), 서문- 서성문(西城門), 동문- 동점문(東漸門, 오른쪽), 북문- 북망문(北望門)
고유명사를 사용하도록 한 한 기준에 따라 소재 위치를 표기하는 명칭에도 '서문', '동문', '북문' 등 막연한 방향표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과 명분이 있는 고유명사를 사용해야 한다.   

 

 □ 석당간(石幢竿)⇒석장(石檣)[기준 4조 ②-1)

 

o 조선시대 초기 나주목 관련된 고기록에 ‘석장(石檣)’으로 표기하고 있어 기록상의 명칭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o 보물 49호는 고려시대 유물이지만 당간과 연관되는 역사 기록은 찾기 어렵고 조선시대 초기에 국가에서 왕명으로 간행한 관찬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석장(石檣)’ 기록은 아주 중요함으로 이를 문화재명으로 삼아야 한다.

 

o 석장(石檣)은 고려시대의 유물이지만, 바로 뒤이은 시기인 조선 전기의 왕명 편찬 관찬 지리서에 표기되고 있어 이 당시 국가에서 공인한 명칭을 따를 필요가 있다.

 

o 특히,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전기의 석조 건조물은 기록상으로는 거의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명칭이 어떻더라도 나주만은 나주 석장(石檣)으로 표기 해 주어야 한다.

 

o 원 명칭을 고증에 의해서 찾을 경우 부여한다는 명칭 부여 기준과도 맞다.[기준 4조 ②-1)

 

o 기록 1 : 석장(石檣) : [나주읍성]동문 밖에 있다. 전설에, “이 주를 처음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이것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한다. 문 안에도 목장(木檣 나무 돛대)이 있다.[石檣 在東門外 世傳 初設州時 術者建此 以表行舟之勢 門內 亦有木檣]<신중동국여지승람> 권35 나주목 고적조)

 

 

o 기록 2 : 1872년 나주목 지도 동점문 밖에 석장(石檣)이 그림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위 지도 오른쪽 문 윗쪽)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권35 나주목 고적(古跡)조 석장(石檣) 기록(첫줄)

 

 

 

보물 제364호 나주 서문 석등(羅州西門石燈)

 

o 예고 명칭 : 나주 서문 석등(羅州 西門 石燈)

o 전남도 의견 : 나주 서내리 석등(羅州 西內里 石燈)

o 나주시 의견 : 나주읍성  서성문안 석등(羅州邑城 西城門 안 石燈))

o 변경 명칭 : 나주  서성문안 석등(羅州 西城門 안 石燈)

 

□ 서문⇒서내리(西內里)[기준 4조 ②-1)

 

o 문화재 명칭은 고유명사를 사용하도록 한 기준에 따라 소재 위치를 표기하는 명칭에도 고유 이름으로 해야 한다. 나주읍성의 서문이 소재한 곳은 ‘서내리(西內里)’였다. 지금도 ‘서내동(西內洞)’이라는 법정동으로 남아 있다.

 

 

o 보물 제505호 담양읍석당간(潭陽邑石幢竿)을 담양 객사리 석당간(潭陽 客舍里 石幢竿), 보물 제506호 담양읍오층석탑(潭陽邑五層石塔)을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潭陽 南山里 五層石塔)으로 원 소재지 행정지명을 쓰는 명칭부여 기준과 같다.

 

 

o 다만, 나주는 1981년에 시로 승격[법률 제3425호, 당시 금성시]되었기 때문에, 시 승격 이전이며 석등이 현 위치로 이전되기 전의 원 위치 행정지명인 ‘서내리(西內里)’를 명칭에 포함하여 역사성을 반영하는 것이 타당하다.

 

 

* 나주 서문리 석등은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간 것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개관시 현 위치(서울 용산구)로 이전. 가능하다면 원위치인 나주 지역으로 이전도 고려 해야 한다.

 

 

o 고증자료
나주 서내동은 조선시대에 나주목 서부면 서문내리 또는 서내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시 서내리, 주사리(州司里), 명당리(明堂里)와 함께 서문정(西門町)으로 합해지며 뒤에 다시 서문리라 하였다가 1981년 나주시[당시 금성시]로 승격되면서 서내동이 됨.

 

나주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내용(<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
나주군 서부면 西內里는 州司里, 明堂里 일부와 합해져 西門町이 된다.(끝줄) 서내리가 서문 석등이 1929년 '유출'되기 전 원래 있었던 곳이 '서내리'이다.   

 


보물 제50호 나주 북문 외 삼층석탑(羅州北門外三層石塔)

 

 

o 예고 명칭 : 나주 북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門 밖 三層石塔)
o 전남도 의견 :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望門 밖 三層石塔)

o 나주시 의견 : 나주읍성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邑城 北望門 밖 三層石塔)

o 변경 명칭 :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望門 밖 三層石塔)

 

 

□ 북문⇒북망문[기준 4조 ②-1)

 

o 문화재 명칭은 고유명사를 사용하도록 한 한 기준에 따라 소재 위치를 표기하는 명칭에도 고유 이름으로 해야 한다. 나주읍성의 북문의 정식 이름은  ‘북망문(北望門)’이다.

 


o 또한 국보 남대문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원 이름으로 다시 부여 했듯이, ‘북문’이라는 막연한 방향표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과 명분이 있는 ‘북망문(北望門)’이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해야 한다. 

 

o 고증자료 : 1872년 나주목 지도

 



‘서성문’ 석등, ‘동점문’ 석당간, ‘북망문’ 삼층석탑, 제 이름을 찾다. 

 

 

‘나주서문석등’을 명칭으로 하여 일제기에 유출(1929년)된 뒤 1960년 국보 지정, 1963년 보물 재지정하여 관리 해오던 국가지정문화재(보물) 명칭. 2010년 12월 27일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안 石燈)’으로 변경 고시(문화재청 고시 제2010-133호, 관보 제17413호)된다.

 

 

종별 지정
번호
당초 문화재명 변경 문화재명 변경사항 변경
고시일
보물 49 나주동문외석당간
(羅州東門外石幢竿)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
(羅州 東漸門 石幢竿)
한글 맞춤법(띄어쓰기) 적용 및 한자어 한글로 순화()
동문을 고증에 따라 동점문으로 변경
2010.
12.27.
보물 50 나주북문외삼층석탑
(羅州北門外三層石塔)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
(羅州 北望門 三層石塔)
한글 맞춤법(띄어쓰기) 적용 및 한자어 한글로 순화()
북문을 고증에 따라 북망문으로 변경
보물 364 나주서문석등
(羅州西門石燈)
나주 서성문 안 석등
(羅州 西城門 石燈)
한글 맞춤법(띄어쓰기) 적용
고증에 따라 서문을 서성문으로 변경하고, 서성문 안쪽에 있었으므로 이를 반영
보물 505 담양읍석당간
(潭陽邑石幢竿)
담양 객사리 석당간
(潭陽 客舍里 石幢竿)
행정지역 명칭 표기 부기 및 한글 맞춤법(띄어쓰기)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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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심의자료, 2010.11.24
- 윤여정, ‘나주 서성문 안 석등 유출과 이건’, <향토문화>35,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16

 

 

 

나주 서문 석등 명칭변경에 대한 전라남도 제출 의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건축문화재분과 회의록, 2010.12.26. 2010년도 제14차).
전라남도에서는 전라남도문화재위회 심의를 거쳐 원 소재지 행정지명을 포함하여 '나주 서내리 석등'으로(위), 나주시에서는 '나주읍성 서성문 안 석등'으로(아래) 의견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석당간'이나 '석탑' 사례와 같이 '나주 서성문 안 석등'으로 변경 지정 고시하였다. 그리고 전남도에서는 서문 석등을 원위치인 나주 지역으로 이전을 검토해 달라는 의견도 함께 냈다.

 

 

 나주 서문 석등 국보 547호 지정고시 관보(일부)(1960.06.02일자)

소재지는 서울 종로구 1번지 경복궁이다. 이때 '국보'는 지금처럼 '보물 중의 보물'이라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국가지정 유형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분류했다. 1955년에 '보물'을 '국보'로 개명한 것이다. 요즈음의 '보물'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재분류하여 1963년 보물 364호로 다시 지정된다.

 

* 고유문의 89년은 89년째 되는 해(만 88년)라는 뜻에서 표기한 것이다.

* 2017년 5월 11일 15시 국립나주박물관으로 되돌아 온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의 제막 점등식이 열렸다.

* 2017년 6월 22일 13시 50분 배람하면서 고유문을 읊조렸다. <2017 마한문화 아카데미 강좌>(주제 : 전남의 세계유산 등재추진현황과 전망) 참석차 방문길. 14시부터 시작된 강의에서 석등 환안(還安) 고유문(告由文)을 공유하고 해설을 곁들였다. "세계유산"보다도 더 흥미로워 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석등 환안 고유 마당밟기 한마당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