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89
여수 사도(沙島)·추도(秋島)마을 옛 담장
전남지방의 돌담10
김희태
‘여수 사도(沙島)·추도(秋島)마을 옛 담장’은 전라남도 야수시 화정면 낭도리 사도와 추도 일원에 소재하며 길이는 약 850m, 등록 고시 지적은 2,348.4㎡(낭도리 180번지 등 162필지)이다. 등록문화재 제367호(2007.11.30 등록 고시)이다.
여수 사도와 추도는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며, 임진왜란 전후하여 사도에 입도했다는 구전이 전한다. 임진왜란 무렵 성주 배씨가 정착지를 찾아다니다가 사도에 해초류가 많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이 섬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인동 장씨가 많다.
기록상으로는 이순신통제사의 『난중일기』에 ‘개이도(介伊島)’로 기록된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후기 호구와 동리를 기록한 『호구총수』(1789년)에 전라도 순천도호부 소라포면 상도의 42개 동리 가운데 하나로 사도(沙島) 기록이 확인된다.
소라포면(召羅浦面) 상도(上道) ; 長城閭(장성려), 項島(항도), 蘇堤(소제), 司場(사장), 狐頭(호두), 草末(초말), 古城內(고성내), 古城外(고성외), 羅之浦(나지포), 乭古介(돌고개), 亭閭(안정려), 屹浦(흘포), 細浦閭(세포려), 白也島(백야도), 折里島(절리도), 大花島(대화도), 小花島(소화도), 沙島(사도), 狼島(낭도), 斗音方島(두음방도), 早發島(조발도), 長登(장등), 壯尺洞(장척동), 水門洞(수문동), 自乙梅閭(자을매려), 伐九味閭(벌구미려), 堂洞(당동), 西耳山閭(서이산려), 玉笛洞(옥적동), 三利大閭(삼리대려), 梧桐川(오동천), 昌武亭(창무정), 新垈閭(신대려), 城本閭(성본려), 上館(상관), 下館(하관), 竹林閭(죽림려), 新松閭(신송려), 上金谷(상금곡), 下金谷(하금곡), 瓦旨閭(와지려), 梨木九味閭(이목구미려)
1895년 윤5월에 전국 8도를 23부(府)로 개편할 때 남원부 순천군에 속하게 되며, 1896년 2월에 신설된 돌산군(突山郡)에 속하게 된다. 1896년 8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남도 돌산군에 속한다. 1912년 기록에서 돌산군 옥정면에 속한 10개 리 가운데 하나로 사도가 기록된다.
早發島, 狼島, 汝自島, 積金島, 內白日里, 外白日里, 沙島, 獐島, 屯兵島, 白也島(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
1914년월에 돌산군이 폐군되면서 여수군에 편입되었고 옥정면과 화개면과 합해져 화정면이 되고 낭도, 사도, 추도는 낭도리로 합해진다. 1949년에 여천군 화정면 낭도리가 되었다가 1998년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에 속하게 되었다.(김정호, 『지방연혁연구』 -전남을 중심으로-, 1988.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여수라는 지명은『삼국사기지리지』에 “해읍현(海邑縣)은 본래 백제 원촌현(猿村縣)이었으나,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여수현(麗水縣)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반도 지역은 원촌현(猿村縣)이었던 반면, 도서부는 돌산현(突山縣)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여산현(廬山縣)으로 개칭되었다.
사도는 여수항에서 남서쪽으로 27㎞, 1시간 남짓 배를 타고 가는 거리이다. 바다 한 가운데 모래로 쌓은 섬 같다고 ‘사호도(沙湖島)’로 불렀다. 추도, 나끝, 연목, 간데섬(中島), 시루섬(甑島), 진대섬(長沙島)이 사도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놓여있다.
일곱 섬을 합한 면적은 38ha이다. 사도와 추도만 유인도이고, 다른 섬은 무인도다. 사도에는 21가구 46명, 추도에 2가구 3명이 거주한다. 돌미역, 톳을 채취하고, 12집은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954년 개교한 여산초등학교 사도 분교는 1996년 폐교된 뒤,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수련장으로 변했다.
사도가 유명해진 것은 해마다 8∼10회에 걸쳐 진도처럼 물 갈라짐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을 비롯해 썰물 때 추도와 사도 간 약 700m가 6∼7m 폭으로 ‘신비의 바닷길’이 난다. 10여년 전 장채섭 옹이 그린 지도에는 ‘췻등’이라 기록돼 있다. 기암괴석과 모래가 어우러진 섬으로도 소문났다.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퇴적암과 해수욕장으로 주말과 여름 휴가철에 관광객이 많히 찾아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눈에 띄어 거북선을 구상하게 했다는 구전이 있는 거북바위를 비롯해 얼굴바위, 용미암, 명석바위, 장군바위, 젖샘이 있다. 중도와 시루섬 사이 양면해수욕장은 조개더미가 부서져 생긴 ‘쩍모래밭’이다. 지형학 용어로 육계사주(陸繫沙洲·Tombolo)다.
1987년 시루섬 응회암 벼랑에서 측백나무류 목재화석인 ‘규화목’이 발견되었다. 2002년 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는 사도, 추도, 낭도, 목도, 적금도 등 5개 섬 지역의 백악기 퇴적층 일대에서 총 3천800여 점의 공룡발자국화석을 찾아냈다. 특히 조각류 공룡의 보행열이 84m나 발견되기도 했다. 공룡화석 이외에도 규화목, 식물화석, 연체동물화석, 개형충, 무척추동물, 생흔 화석과 연흔, 건열 등의 교과서적인 퇴적구조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추도 세일층은 7천700만년 전, 사도 화석층은 6천5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백악기 당시 대규모 공룡집단 서식지였을 가능성이 크며, 공룡 최후기 시대에 해당함으로써 공룡생태와 멸종에 관련한 자료가 축적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공룡발자국 화석지와 퇴적층은 천연기념물 434호로 지정되었다. 2003.02.04. 지정, 지정구역 190,230㎡,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산115-2 외 소재.(김경수, 여수 사도 -전라도 역사이야기-, 광주일보, 2007.03.09 ; 허민, 여수 화정면일대 공룡화석지,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전라남도․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태학사, 2002)
사도와 추도마을 담장은 돌로만 쌓은 ‘강담’ 구조로써 돌의 크기와 형태는 일정치 않고, 평평한 것부터 둥근 것까지 다양하며 대체적으로 길이가 10cm에서부터 큰 것은 30~50cm정도이다. 큰 돌, 작은 돌이 서로 맞물린 형태로 쌓아진 돌담은 주변풍광과 잘 어우러져 인상적인 도서지방의 경관을 나타낸다.
여수 사도와 추도의 돌담은 외견상 주변의 섬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돌담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주변의 바닷가나 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막돌을 이용하여 쌓는데, 허튼층, 메쌓기로 처마선 까지 높게 쌓는다는 점 등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추도의 돌담은, 자체가 견고한 채로 보존이 아주 잘되어 있고, 넝굴식물 등에 의해서 덮여 있지 않으며, 규모가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마을전체에 집약적으로 형성되어 있고, 주변풍광과 잘 어우러져 인상적인 마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차별적 특징을 갖는다. 도서지방의 생활사와 주택사의 양측면, 그리고 경관의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사도의 돌담은 인근 섬지방의 마을들과 비교할 때, 평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로서는 돌담의 원형을 비교적 많이 남기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도서지방 주택의 외부공간 구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써 가치가 있다.
* 김희태, 전남지방의 돌담, <전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1, 164~215쪽
추도 마을 돌담
섬지방 돌담장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역. 입구의 노거수는 마을의 상징이다. 지금의 선착장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가옥의 돌담. 선창길과 마을길을 함께 볼 수 있다. 사각형의 다듬은 돌로 높직하게 쌓았고 아래 부분은 시멘트와 섞여 있다. 대문 앞의 표지석은 공룡화석지 위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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