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87 - 전남의 돌담9 신안 흑산도(黑山島) 사리(沙里)마을 옛 담장

향토학인 2017. 2. 17. 17:55

인지의 즐거움087


신안 흑산도(黑山島) 사리(沙里)마을 옛 담장
전남지방의 돌담9

 

김희태

 

‘흑산도 사리(沙里)마을 옛 담장’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사리 일원에 소재하며 길이는 약 4,000m, 등록 고시 지적은 79,839㎡(사리 13번지 등 231필지)이다. 등록문화재 제282호(2006.12.04 등록 고시)이다.

 

흑산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속하며 대흑산도라 부른다. 흑산면은 동쪽으로는 목포,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경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진도군, 동북쪽으로는 무안군과 마주하고 있다. 대흑산도(大黑山島), 소흑산도(小黑山島, 가거도), 대둔도(大芚島), 홍도(紅島) 등 10여 개의 유인도와 90여 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로 형성되어 있다.

 

흑산도는 목포항에서 뱃길로 92.2㎞거리이다. 흑산도는 깃대봉(378m)과 문암산(356m)이 중앙에 우뚝하고, 북단 상라산(227m)과 남단 옥녀봉도 200m가 넘는다. 면적 19.2㎢, 해안선 41.8㎞, 일주도로 26㎞, 12개 마을, 1천여 가구, 2천30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흑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소나무와 동백나무 숲이 울창한데다 검게 보였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1872년께 그려진 흑산도지도에는 대흑산도는 군청색, 소흑산(가거)도는 초록색으로 보인다. 손암 정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 서문에는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黑山을 玆山(자산 또는 현산)이라 쓰곤 했다. 玆는 黑과 같은 뜻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흑산은 ‘검푸른 바다 위 큰 섬’이라는 뜻도 있다.(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전라·제주편-, 2010.)

 

흑산도는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논농사는 발달하지 못하고 수산업에 주로 의존하고 있지만, 주거공간 인근에는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밭농사 공간의 경계로서 담장이 있고, 그 농토를 배경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주민의 주거공간과 마을 공동체 공간의 경계표시로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사리마을 옛 담장은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구조로, 담을 쌓으면서 안팎의 담벼락을 약간씩 퇴물려 쌓아 견고한 느낌을 준다.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형태와도 조화를 이룬다. 특히 가옥의 담장과 밭 경계에 있는 담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섬마을의 공간구조와 민속을 보존하는데 옛 담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리마을은 손암 정약전(1758∼1816)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玆山漁譜)』를 정리한 마을이다. 사촌서실에서 향리 자제의 교육도 했다.

 

사리마을의 담장은 바람이 많은 도서지방의 환경에 맞게 강담구조로 견고하고 높게 축조되어 있다. 특히 굽어진 마을 안길과 함께 서로 비슷한 높이로 축조된 담장은 가옥형태와도 조화가 된다.

 

사라마을 담장은 현재 가옥의 담장과 밭 경계에 있는 담장으로 구성된다.  밭 경계의 담장은 가옥이 철거되면서 담장만 남은 옛 가옥의 담장으로 대체로 그 높이가 낮은 편이다. 부분적으로 이축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축조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돌담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안정감이 있다. 즉 담을 쌓으면서 안팎의 담벼락을 약간씩 퇴 물려 쌓은 것으로, 마치 작은 성처럼 견고한 느낌을 준다. 돌을 쌓으면서 작은 호박돌과 길고 평평한 돌을 교차시켜 쌓아 올려 구조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돌담의 쌓기 방법은 허튼층쌓기로 일반적인 형태의 돌담 상부의 폭은 35~50cm내외 이고, 하부의 폭은 90~120cm내외로 하부로 내려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가옥담장의 높이는 가옥마다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나, 평균적으로 140~170cm내외의 분포를 보인다. 또한 도로와 레벨차이가 큰 가옥은 200cm이상의 높이가 있는 곳도 있다.

 

완형 돌담의 기본적인 형태는 호박돌과 길고 평평한 돌을 교차시켜 쌓아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형태의 돌담과 각이 지게 치석된 자연석을 쌓은 형태의 돌담 두 가지 형태가 주를 이룬다. 지대석으로 사용된 하부의 큰 돌들은 원래 돌이 있던 위치를 그대로 살려 돌담이 축조 되었다. 지대석 돌이 놓여 있는 형태로 굽어진 길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사리마을 돌담은 후대로 오면서 가옥 등 건물의 건립과 보수로 시멘트블록 담장이나, 조적담장으로 교체 된 담장, 그리고 시멘트 몰탈을 덧바른 담장, 기존의 돌담위에 블록 담장을 쌓은 담장도 있다.

 

사리마을의 담장은 가옥의 경계를 이루는 담장과 가옥의 빈터나 경작지의 경계를 잇는 담장으로 구분된다. 가옥의 빈터나 경작지의 경계를 잇는 담장의 일부는 건물이 철거되고 담장만 남아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계를 이루는 담장의 높이는 대체로 50cm내외로 낮다.(신안군, 『옛 담장 등록문화재 종합정비 기본계획』-흑산 사리마을․비금 내촌마을-, 2007 ; 문화재청, 『2006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2010)

 

흑산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흑산도 진리의 대봉산[大峰山, 大鳳山] 경사지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이 확인된 바 있다. 패총이란 수렵·어로·채집에 의하여 살아온 옛 사람들이 조개를 먹은 뒤 버린 조개껍데기와 생활쓰레기가 함께 쌓여 이루어진 유적이다. 진리의 패총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도어 신석기시대 후기에 형성된 유적으로 보고 있다.(최성락, 선사유적․고분, 『신안군의 문화유적』, 전라남도․신안군․목포대박물관, 1987)

 

그리고 지금의 흑산면에 속한 가거도에서도 패총(貝塚, 조개무지)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30호(1990.02.24. 지정).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 산4 소재. 발굴조사에서 돋을무늬[융기문]토기편과 눌러찍은무늬[압인문]토기 등이 출토되어 신석기 전기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국립광주박물관, 『신안 가거도 패총』, 2006)

 

이처럼 흑산도를 비롯한 서남해 섬지방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주민 거주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당연히 마을이 형성되고 생활공간과 주건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흑산도에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부터는 많은 주민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지석묘라고도 하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기반식, 碁盤式], 그리고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흑산 진리 고인돌군은 구릉 위에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 2.25m, 너비 1.57m이고 6기의 고인돌 가운데 3기에서는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는 작은 받침돌이 확인되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1994.01.31. 지정). 신안군 흑산면 진리 102-2 소재.
 
흑산 진리 고인돌군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인돌의 전파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고인돌의 축조 기술은 기본적으로 돌을 다루는 기술과 관련되기 때문에, 섬지방의 우실이나 돌담의 축조와도 연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시대에 들어서서는 827년(신라 흥덕왕 2)에 장보고(張保皐, ?~846)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중국 당나라와 교역하면서 흑산도가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주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나주목에 편입되었는데 흑산도는 관아터, 상라산성, 무심사선원 석탑과 석등 등이 전해 오고 있어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해양도시적인 면모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목포대도서문화연구소, 『흑산도 상라산성』, 1999)

 

고려말기 왜구의 침입으로 흑산 주민들은 나주목으로 피난하여 남포강변(현재의 전남 나주시 영산포)에 살아 영산현(榮山縣)이라 한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영산현이 영산군(榮山郡)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나, 왜구의 침입이 뜸한 조선초에는 직촌화 되어 나주목에 속하게 된다.(『신중동국여지승람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나주목에 속했으며 후기에는 흑산진을 설치하여 수군만호를 두었다. 1895년 윤5월에 전국 8도를 23부(府)로 개편할 때 나주부 나주군에 속하게 되며, 1896년 2월에 신설된 지도군(智島郡)에 속하게 된다. 1896년 8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전라남도 지도군에 속한다. 1914년 지도군이 폐지되어 전라남도 무안군 흑산면에 속하였다. 1969년 옛 지도군 일원이 신안군으로 신설되면서 신안군 흑산면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김정호, 『지방연혁연구』 -전남을 중심으로-, 1988.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제1권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사리(沙里)마을은 ‘모래미’ 라고도 부르며 모래가 많은 마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모래+뫼>모래미로 되면서 ‘모래 沙, 마을 村[里]’를 취하여 ‘사촌(沙村)’ 또는 ‘사리(沙里)’라고 한 것이다.

 

사리(沙里)는 기록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에 흑산도로 유배를 온 선화(仙華) 김약행(金若行, 1718∼1788)인 남긴 <유대흑기(遊大黑記)>에 ‘사구미(沙鳩尾)’라는 표기로 처음 보인다. 김약행은 1768년 5월부터 1771년 7월까지 약 3년 2개월 동안 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우이도는 조선시대에 ‘흑산도’ 또는 ‘소흑산도’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흑산도는 ‘대흑(大黑)’ 또는 ‘대흑산도’라 하였다. 유배시절 우이도에 전염병이 돌자, 이를 피하기 위해 대흑산도로 유람을 떠난 뒤 <유대흑기(遊大黑記)>라는 기록을 남겼다. 1770년 2월 10일부터 18일까지 9일 동안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당시 대흑산도 주변의 여러 섬과 중심 마을의 옛 지명․뱃길․명승․유적에 대한 내용, 섬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상황 등 대흑산도의 모습과 사회상이 담겨 있다.(최성환, 유배인 김약행의 <遊大黑記>를 통해 본 조선후기 대흑산도, 『한국민족문화』36, 2010. 3, 139~177쪽 참고.)

 

<유대흑기>에 기록된 마을 이름으로 ‘천구미(淺鳩尾)’․‘심구미(深鳩尾)’․‘사구미(沙鳩尾)’․‘비구미(比鳩尾)’․‘예미촌(曳尾村)’이다. 이들 마을 이름은 바로 뒤 이은 기록(『호구총수』, 1789)에서 구미(鳩尾)가 촌(村)으로 표기가 바뀌면서 천촌, 심촌, 사촌, 비촌으로 기록된다. 예미촌은 그대로 예미촌으로 표기된다. 이렇게 보면 ‘구미’와 ‘촌’, ‘리’ 등은 마을을 표기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구미’는 ‘바닷가의 곶이 길게 뻗고 후미지게 휘어진 곳.’ 또는 ‘오목하게 들어 간 곳’이라는 지형을 뜻하는 말인데, 한자 표기를 하면서 ‘鳩尾’로 표기한 듯 싶다. 뒤에 ‘촌’이라 했다가 ‘리’로 통일한다.

 

<유대흑기>에 뒤 이은 『호구총수』(1789년)의 나주목 흑산도 조에서는 ‘沙村’으로 표기가 확인된다. 『호구총수』는 조선시대 후기 호구자료를 기록한 관찬 자료이다. 이 시기 흑산도에는 13개 촌(鎭下村, 曳尾村, 靑谷村, 淺村, 沙村, 深村, 長島, 比村, 馬村, 井村, 水村, 多勿島, 永山島)이 있었다. 『호구총수』흑산도조에는 350호 920구(남530, 여 380)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앞의 기록인『여지도서』(1759년)에는 흑산도조에는 283호, 남 361구, 여 344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촌(沙村)’ 표기는 1807년(순조 7) 다산 정약용의 사촌서실기,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나주지방흑산도지도(羅州地方黑山島地圖)(규장각소장, 奎 10449)(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선후기 지방지도』-전라도편, 1996.), 1912년 기록에도 그대로 표기된다. 이 시기에는 흑산면에 6개 도서를 포함하여 25개리가 기록되고 있다.

 

      鎭里, 昆村, 馬村, 比村, 深村, 沙村, 淺村, 曳村, 多村, 水村, 梧村, 永山島, 長島, 石村, 竹村, 可居島, 鎭里, 竹頭里, 猪項里, 星村, 比頭里, 小牛耳島, 上苔島, 中苔島, 下苔島(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사리(沙里)’로 표기하게 되면서, 전라남도 무안군 흑산면 사리에 속하게 된다. 이어 1969년에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사리에 속한다.

 

한편, 사리마을은 사미(沙尾) 또는 사미촌(沙尾村)이라는 표기도 확인된다. 손암 정약전이 흑산도 사리에서 유배생활(1801~1816)을 할 때 다산 정약용은 ‘손암에게 받들어 올리다[奉簡巽菴]’라는 시를 짓는데 그 한 구절을 보면 ‘사미(沙尾)’라는 표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 제영의 주석으로 ‘중형이 그때 사미촌(沙尾村)에 살고 있었음[仲氏時居沙尾村]’이라 하여 ’사미촌(沙尾村)‘이라는 표기도 함께 쓰고 있다.

 

사미로 집을 옮겨 살 수만 있다면야 / 但得移家沙尾住
파도라도 갈 길 없다고 울지는 않으련만 / 溟波誰復泣途窮(『다산시문집』제5권 시(한국문집총간)


<유대흑기>를 통해 사리마을 기록을 처음 남긴 김약행 외에도 조선시대 유배인물은 많다. 조선시대 흑산도 유배기록은 68회가 확인(장선영, 조선시기 유형와 절도정배의 추이, 『지방사와 지방문화』 4-2, 역사문화학회, 2001.)되는데, 조선후기 흑산도 유배인물 가운데 손암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리마을과 연고가 있다. 정약전은 사리마을에서 서당[復性齋]을 열고 향리 자제를 교화 한다. 그리고 최익현은 사리마을을 들려가며 제영을 남기기도 한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순조 1) 신유옥사때 신지도(2월)를 거쳐 흑산도로 귀양(11월)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는 흑산도에 머무는 동안 문순득(文淳得)이라는 우이도 사람의 표해 사실을 정리한 『표해시말』(漂海始末, 일명 표해록)과 어류 및 해산물, 섬의 풍속 등을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논어난(論語難)』 2권, 『역간(易柬)』 1권, 『송정사의(松政私議)』 1권이 있다. 표해시말은 문순득이 표류되어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에 들어가서 그 나라 사람의 형모와 의관, 그리고 방언 등을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고,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와 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의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명저로 손꼽히고 있다.

 

정약전은 사촌(현 사리)에서 서재를 마련하고 학동들을 가르친다. 다산 정약용의 사촌서실기를 통하여 그 전말을 알 수 있다.

 

    누에치는 집에 몇 종류의 잠박(蠶箔)이 있는데, 큰 것은 면적이 넓어 잠실(蠶室)의 끝까지 닿고, 작은 것은 잠실의 4분의 1 정도이다. 간혹 잠실을 정(井) 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그 중 한 부분에 잠박을 놓았으나, 누에들은 좁은 상자에서도 오히려 편안히 지내며 여유있게 살아간다. 지나가면서 이것을 보는 사람이 큰 잠박을 보고는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고, 좁은 상자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는 빙긋이 비웃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현부인(賢夫人)이 좋은 뽕잎으로 법에 따라 먹이면, 세 번 자고 세 번 깨어나서 성숙한 뒤에는 실을 토해내어 고치를 만들고 사람들은 이 고치를 켜 실을 만드니, 조그만 잠박의 누에라도 큰 잠박의 누에와 다름이 없다.
    아, 어찌 누에만 그러하겠는가. 세계도 다 잠박이다. 하늘이 백성을 여러 섬에 퍼져 살게 한 것은 누에치는 아낙이 누에를 여러 잠박에 펴놓은 것과 같다. 우리들이 섬을 잠박으로 생각해 볼 때, 큰 것은 적현(赤縣, 중국 이칭)과 대하(大夏, 西域의 한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작은 것은 일본(日本)과 유구(琉球)라고 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것은 추자도(楸子島)ㆍ홍의도(紅衣島)ㆍ가가도(可佳島) 같은 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이 큰 섬을 부러워하고 작은 섬을 비웃는 것은 잠박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실로 박학군자(博學君子)가 있어 옛날 전적(典籍)을 많이 읽은 뒤에 법(法)에 따라 가르치면, 경전(經典)의 뜻을 변석(辨析)하게 될 무렵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러 사람과도 어울리며 나아가서는 성인(聖人)도 되고 현인(賢人)도 되며, 문장학(文章學)을 익힐 수도 있고 경세학(經世學)을 익힐 수도 있을 것이니, 조그만 섬의 백성들도 큰 섬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나의 형님 손암(巽菴)선생께서 흑산도(黑山島)에서 귀양살이한 지 7년이다. 어린아이들 대여섯 명이 형님을 따라 서사(書史)를 배웠는데, 얼마 후 초가집 두어 칸을 짓고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고 방(榜)을 써서 달았다. 그리고 나를 불러 기(記)를 지으라고 하기에 누에치는 잠박으로 비유하여 아뢴다. 가경(嘉慶) 정묘년(1807) 여름에 지음.(정약용,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 『다산시문집』제13권)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에 유거하면서 동생인 정약용이 보낸 온 저술(『상례사전(喪禮四箋)』, 『악서고존(樂書孤存)』, 『매씨서평(梅氏書平)』)에 대하여 세세한 평을 써주기도 한다. 그리고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나주 율정에서 헤어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손암의 묘지명을 정약용이 짓는다. 묘지명을 통해서 손암의 우이도와 흑산도의 섬 생활을 알 수 있다.

 

    공은 섬으로 귀양온 뒤부터 더욱 술을 많이 마시고 오랑캐 같은 섬 사람들과 친구를 하고 다시 교만스럽게 대하지 않으니, 섬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주인으로 섬겼다. 간간이 우이보에서 흑산도로 나와, 내가 방면(放免)의 은혜를 입었으나 또 대계(臺啓)로 인하여 정지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에 가서 기다릴 것이다.” 하고, 우이보로 돌아가려 하니, 흑산도의 호걸(豪傑)들이 들고 일어나서 공을 꼼짝도 못하게 붙잡으므로 공은 은밀히 우이보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첩(妾)과 두 아들을 싣고 우이보를 향해 떠났다. 이튿날 아침 공이 떠난 것을 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와서 공을 빼앗아 흑산도로 돌아가니, 공도 어찌할 수 없었다.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공이 흑산도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정의(情誼)로 애걸하여 겨우 우이보로 왔으나, 이때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형제의 상봉을 저지하니 금부(禁府)에서도 관문(關文)을 보내지 않았다. 공이 우이보에서 나를 3년 동안이나 기다렸으나 내가 끝내 오지 않으니 공은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그 뒤 3년 만에 율정(栗亭)의 길로 운구(運柩)하여 돌아왔으니, 악인들의 불선한 행위가 이와 같았다.(정약용, 선중씨(先仲氏)의 묘지명, 『다산시문집』제15권 묘지명)

 

면암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오불가척화의(五不可斥和議)’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먼저 우이도로 왔다. 그 유배 일정을 보면, 그는 1876년 9월 무안읍에 도착하였고, 9월 10일 다경포진을 출발, 암태, 팔금, 기좌, 도초, 비금을 거쳐 9월 16일에 우이도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이도에 도착한 그는 문인주(文寅周)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언제인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곧바로 흑산도로 옮겼다. 흑산도에 온 그는 처음 진리(鎭里)에서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뒷냇가에는 의두암(倚斗岩)이라는 바위가 그와 연관되어 있다. 다시 면암은 천촌리(淺村里)로 옮겨 지장암(指掌岩)에서 교화에 전념하였다.(이준곤, 흑산도 전승설화로 본 면암 최익현과 손암 정약전의 유배생활, 『논문집』 11, 목포해양대학교, 2003)

 

현재 흑산도 유허에는 “홍무일월(洪武日月) 기봉강산(箕封江山)”이라는 그의 친필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1924년( 閼逢困敦, 갑자) 9월 문하생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4~1931)이 짓고 수암 임동선(守菴 任東宣, 1892~1960)이 쓴 ‘면암최선생적려유허비(勉庵崔先生謫廬遺墟碑)’가 세워져 있다.(김희태, 면암 최익현선생 적려유허비 교감과 역주, 『신안문화』, 신안문화원, 2008)

 

최익현은 사리마을에 들려 시를 남긴다.
 
사촌(沙村) 인가(人家)에서 자다 / 宿沙村人家

 

곳곳마다 봄이 깊어 모든 생물 즐거워 / 春深處處樂群生
그대와 십리 길 오며 나그네 정이 흠씬 / 十里携朋瀉客情
한 해 언약은 갯집에서 다시 찾고 / 浦戶重尋周歲約
달빛은 한밤중에 더욱더 밝구나 / 月光添得半宵明
얕은 언덕 보리 잇닿아 오솔길 묻히는데 / 短原連麥迷通逕
둘린 산이 그늘을 지우니 푸른 성을 짓네 / 列峀交陰翠作城
즐겁다 이미 선경이 가까운데 / 纔喜仙源咫尺在
또 수없는 바닷고기를 보겠네 / 更看海味錯縱橫(『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제1권 시)

 

이 시를 지은 연대는 표기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집상에서 이 시 바로 앞에 “무인년 늦은 봄에 같이 공부하는 서너 사람과 함께 선유봉(仙遊峰) 놀이를 떠나면서 길 가운데서 운자를 뽑아 생(生) 자를 얻다[戊寅暮春 同課徒三四人 發仙遊之行 路中拈韻 得生字](『면암선생문집』제1권 시)라는 제목의 시가 있어, 무인년인 1878년(고종 15) 면암의 나이 46세 때 3월께임을 알 수 있다. 사촌에 들른 것도 이 어간으로 보인다. 손암 정약전이 사촌서실에서 향리 자제를 가르치고 떠난지 60여년이 지난 기록인 셈이다.

 

이 시를 통하여 사촌마을이 경관을 읽을 수 있다. 봄이 되어 만물이 소생하는 정경을 그리면서, 잠을 자게 된 사촌 인가의 주인과 정이 들었다는 점, 그리고 달 밝은 밤에 보는 갯집의 정경, 산밑의 얕은 언덕과 보리 잇닿은 오솔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 보리 잇닿은 오솔길이 지금 남아 있는 돌담 가운데 한가지, 경작지를 경계짓는 돌담과 어울려 있었던 듯 싶다. 이 모든 것이 선경 그 자체라고 읊고 있다.   

 

* 김희태, 전남지방의 돌담, <전남의 민속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11, 164~215쪽

 

 

 

 

 

 

 

신안 흑산면 사리마을과 돌담( 사리마을 돌담은 가옥의 담장 구실을 하는 돌담과 빈터나 경작지의 울 구실을 하는 돌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호박돌이나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였다. 손암 정약전이 유배시 열었던 서당을 복원한 사촌서실[복성재]을 찾은 광주 길손들. 2009.7.11.)

 

신안 흑산면 사리마을 전경(마을 뒤쪽 초가집이 정약전이 열었던 서당을 복원한 사촌서실[복성재]이다.)(200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