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71 - 고탑은 숲속에 보일듯 숨어있네, 장흥 석탑 기행

향토학인 2017. 2. 4. 11:46

인지의 즐거움071

 

고탑은 숲속에 보일듯 숨어있네

-장흥 석탑기행-

 

김희태

 

탑정 塔亭

 

오래된 느티나무 들판에 우뚝하고 老槐挺野原

고탑은 나무숲속에 보일듯 숨어있네 古塔隱林樾

유람하는 길손은 돌아가는 걸 잊고서 游客澹忘歸

맑은 바람과 밝은 달에 부쳐 시를 읊네 吟風且詠月

 

장육재 문덕구(1667~1718)

 

장흥 유치 출신 선비가 길을 나서다 보일듯 말듯 숲속에 있는 고탑을 보고 읊은 시.

그곳으로 가는 마을입구 들녁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우뚝하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긴 유치 26경을 노래한 시 가운데 한 수 탑정(塔亭)

남도불교문화연구회(남불회) 장흥답사(2017.02.04 토) 논의가 시작될 무렵. 달포전 쯤.

석탑기행으로 해 보면 어떨까 말이 오갔다. 장흥에는 7개소(9기)에서 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탑터나 탑재는 4~5군데 더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선인들은 탑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바라 보았나 뒤적여 보았다.

조선후기 장흥 선비들이 남긴 시는 3수. 문덕구, 독우재 이권전(1805~1887), 우곡 이중전(1825~1893) 등. 절에 대한 시는 많지만 탑을 직접 언급해 제목에 들어간 거는 많지 않았다.

수첩에 끄적거려 거칠게 옮겨 가고 있다.

 

1863~65년 사이 나주목사를 지낸 풍야 송정희(豊埜 宋正熙, 1802~1881)

보림사를 들러간 뒤 유람기문을 남긴다. ‘유보림사기(遊寶林寺記)’

그 글에 6~7층의 석탑이 있노라고 적고 있다.

 

문관의 눈으로 보니, 상하층기단, 삼층 탑신, 노반 등 상륜부를 층수로 세었던 것은 아닐까

그 때는 1865(을축) 428. 하루를 머물며 시도 2수를 남긴다.

이 시에서 쌍탑을 언급하고 있다.

유보림사기는 풍야의 <남유록>에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의 필사본.

 

870년 조성, 완형 유지 1,150여년보림사 남북 삼층석탑

 

장흥 석탑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보림사 삼층석탑이다. 남북 쌍탑.

그 사이의 석등을 포함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장흥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표적 성보인 셈이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석조물

870(경문왕 10)에 조성한 탑지(塔誌)가 있다.

1933년 도굴꾼들에 의해 넘어졌다가 1934년에 해체하는 과정에서 탑지 발견.

 

천겁의 세월동안 상륜부까지 그대로 내려와 당 시대의 기준작이라 할만하다.

배례석이나 상륜부도 좀 다르지민 북탑은 어딘지 좀 날렵하고 남탑은 중후하다.

왜 그럴까. 1층 탑신은 두 탑이 같은데, 2, 3층은 남탑이 약간 높고 너비도 더 넓다.

조그만 차이련만 눈으로 들어 올때는 다른 느낌이다. 그것이 아니련가.

 

족보가 확실한 탑이지만, 족보는 신세가 기구하다. ‘탑지’.

탑의 조성과 그 이후의 내력을 기록한 유물. 두 탑에서 다 나왔다. 1930년대 몹쓸 손에 의해 넘어진 뒤 확인된 것. 사찰에서 경찰서, 교육청, 군청, 국립부여박물관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데도, 시대상황이 그리 된 것이다. 경찰서는 유실물 관련으로 군청은 관할 행정 관청인줄은 알겠는데, 교육청과 부여박물관은 어떤 사연인가.

 

문화재업무는 1964년까지는 도 교육위원회(학무국)에서 담당했다. 지금의 교육청. 광주박물관이 건립되기 전에는 전남지역 매장문화재는 발견, 발굴 쪽쪽 국가 귀속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소장관리 했던 것. 광주박물관이 들어서면서 이관되었는데, 이제 국립나주박물관이 있으니 원 소재처와 가까운 전남 나주로라도 와야 하지 않을까. 현장에서 나온 야그이다.

 

보림사 탑지와 관련한 이야기  하나 더.

2001년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阿彌陀如來三尊坐像)이 국가지정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 중요성이 평가된 것. 그런데 조성기문 등은 없던 터에 보림사 탑지의 무위사 불상 조성 내용이 절대 연대 편년에 중요한 기록이 된 것.

 

보물 지정을 위한 전문가 조사를 할 때 동참했는데, 보림사 탑지의 무위사 불상 기록을 제보했던 것. 그 무렵 <보림사중창기>(고경 감수, 김희태·최인선·양기수 국역)<보림사>(최인선·양기수·김희태) 원고를 정리할 무렵이라 바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고경스님께서 감수해서 두 책에 정리한 <보림사 탑지>, <보림사 사천왕상 기문> 등을 원문까지 제공했다.  보림사 탑지에 무위사 불상기록이 있는 것은 찾아 보면 알 수 있지만, 개별 개별 유물의 기록은 그 연결이 바로 안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2개소에 세웠다는 천관산 아육왕탑

 

장흥에는 국보 보림사 석탑보다 훨씬 이전, '전설의 탑'이 있다. 천관산 아육왕탑. 조선초기에 역대 명문장을 모은 <동문선>, 왕명으로 간행한 <석보상절>에 그 연기가 있다. 팔만사천의 사리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2개소에 탑을 세웠다는 것. 천관산과 오대산. 그 탑으로 인해 명명된 탑산사도 있다. 불교 최초태동지로 홍보하고 있다.

 

천관사에는 2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인 고려시대 오층석탑. 삼층석탑이 조성될 무렵, 장보고대사와 천관산 관련된 기록이 <지제산사적기>(천관사 간행)와 <지제지>(위백규 찬)에 보인다.  

 

관산 방촌에는 삼층석탑이 있었으나 손을 타버리고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복원한 탑이 있다. 탑재는 관산읍 옥당리 옥룡사터, 장흥읍 연산리 신흥사, 대덕읍 연지리 탑산사, 장평면 용강리, 용산면 어산리 어동마을, 천관사 등에 있고, 장흥읍 행원리 행원고사(杏園古寺)에도 탑이 있었다는 기록(<장흥읍지>, 1747)이 있다. 

 

'시양쟁이' 생양사터 탑, 불탑과 승탑 사이

 

장흥읍 향양리 생양마을(속칭 시양쟁이)에 있는 이 유적은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 1977년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에 '석탑'으로 나온다. 1985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지원하여 전국 문화유적조사를 하였는데 장흥은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맡았다. 조사책임자는 이해준교수. 이  조사에서는 '석탑'으로 구분했다. 그 보다 훨씬 전 1747년 <장흥읍지>(정묘지) 부동방(府東坊) 고적(古跡)조에 '생양고사는 건산 뒤에 있는데 석탑이 있다.'(生陽古寺 在巾山後 有塔)는 기록이 있다. 

 

1989년 학술지표조사에서는 부도(浮屠)로 보았다. 외형상으로 일반 탑으로 보이나 실은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으로 봄이 옿겠다는 것. 전라남도와 장흥군 지원으로 목포대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조사책임자는 성춘경 당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당시 조사에는 이계표와 김희태 등이 함께 하였다. 선례(先例)로 강원 진전사지탑(탑신 팔각형),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을 들었다.

 

이번 답사에서도 '탑'과 '부도' 사이에서 의견이 분출하였다. 그런데 '탑'인 것은 맞겠다. 둘 다 '탑'으로 불리니.... '불탑', '승탑(부도)'. 

 

'생양(生陽)'이란 고을 동쪽으로 해가 떠 오를 때의 처음 맞는곳이란 뜻에서 이름한 경관지명을 말한다는 양기수회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을 재촉했다.   

 

생양마을 탑을 보기전 들른 축내리 삼층석탑. 오래 전에는 마을 어귀였는데, 언젠가 문중재실이 들어서고 담안에 가두어 졌다. 동네 이름이 '탑동'인 것을 보면 이 곳에 자리한지 꽤 오래인듯 싶다. 재실의 주련에도 '塔洞天開孝子廬' 운운의 시가 보인다.  언덕 건너 생양사 터에서 옮겨 온 것으로 전한다. 그러면 생양사는 쌍탑가람이었을까.  

 

시대의 풍상을 여러번 겪은 등촌리 석탑, 그 '허(虛)' 함

 

장평 등촌리 들녁에 있는 삼층석탑. 그런데로 우뚝하다. 솜씨도 좋다. 그런데 왠지 '허(虛)'해 보인다. 어느 한쪽은 일부 부재가 떨어져 나간 곳도 보인다. 무언가 충격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자료를 보니, '애그니스 태풍'의 피해, '원자리에서 옮겨 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렇군. 그 떨어져 나간 것은 '재해'의 피해로군. 재해는 '자연재해'도 있겠지만 '인재(人災)'도 있으니 그냥 참고하라는 동행자의 설명. 

 

등촌리 석탑을 언덕 위 길에서 내려다보며 '야그'를 나누고 있을 때, 함께 간 딸아이(김우진, 전남대3)가 내 스마트폰은 뺏어 들고 언덕을 내려간다. 같이 가준 것만도 고마운데 사진을 찍겠다니 더 좋은 일. 나도 그랬었을까. 생양사 탑 1985년 사진을 찍을 때가 '늦깍이' 대학 3년 시절이다. 뺏어 간 것은 내 스마트폰이 사진이 더 잘 나오는 폰이어서 였단다. 더 좋은 걸로 바꿔 달라는 걸까. 옇든 딸과의 동행 답사길은 의미가 있었다.

 

이쯤에서 돌이켜 보니 그 '허'해 보인 것은 원자리가 아닌데서 연유했던 것. 무엇이든 제자리가 있다. 자리를 잡고 터를 파고 때를 헤아려 정성을 들여 조성했을 게다. 그리그 천년 세월에 수만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소원을 빌었을게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는 안정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자연재해'라는 핑게로 굴레 지워진 '인재'에 따라 옮기고 보니, 허겁 지겁 하다 보니, 정성을 드리지 못하다 보니, 새로 잡은 자리는 분명 아늑하려니 했지만 '허' 한 것이다. 그 '허'함을 나만 느낀 것일까.

 

그래서 장흥 선비 독우재 이권전(1805~1887)은 '인적 드문 골짜기(虛洞)'의 천년 석탑을 읊지 않았을까?  꼭 등촌 석탑은 아니었을지라도.  

 

석탑 石塔[寺洞有石塔]

돌이 탑으로 머문지 천년세월             石留千年塔

구름가듯 한분 스님 돌아가누나.        雲歸一佛僧

누가 공력을 베푼 것을 아랴만은        也知施功力

인적드문 골짝에 탑만 절로 높직하네 虛洞自凌層

 

* 2017.02.04. 토 남도불교문화연구회 장흥 불교유산 답사 후기(2017.02.09 記)

 

 

장육재 문덕구(1667~1718)의 '탑정' 시 초역. 유치출신으로 유치 26경을 시로 남겼다.

 

장육재유고(문덕구, 필사본) 유치 26경 부분 - 6행의 탑정과 대평, 한천, 서루, 매헌 등이 경관지명이 보인다.

 

독우재 이권전(1805~1887) 석탑

 

장평면 등촌리 삼층석탑(김우진)

단정하고 우뚝하지만 왠지 '허'하다. 자리를 옮긴 탓일까. 재해 탓일까.

 

장흥읍 향양리 생양사지 탑과 김상찬 장흥해설사회장(1985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원으로 전국 문화유적을 조사할 때 장흥은 목포대박물관에서 담당했다. 1985년 여름. 조사책임자 이해준교수. 조사원으로 나선 김희태는 친구 김상찬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 함께 다녔다. 초중을 '자응(장흥사람들의 장흥에 대한 덜 떨어진 발음)'에서 다니고 광주(김상찬)와 서울(김희태)의 고교로 진학했던 두 친구는 고향에서 뭉쳤다. 고교졸업 뒤 포항에서 직장생활하던 한 친구는 고향지킴이가 되었고, 한 친구는 늦깍이로 대학(사학과)에 진학해 20대 후반에 '문화지기'로서 동행한 것. 뒷날 한 친구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되어 전남문화관광해설사회장도 지냈고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다. 한 친구는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여전히 현장을 누빈다. 남불회 답사에서 모처럼 '자응' 문화유산 답사길을 다시 동행했다. 이제 예순즈음이 되었다. 보통 서로 만나면 '어질병이 큰병이 되었다'고 '야그' 하곤 한다. 사진은 그 '어질병'의 실마리가 된 1985년의 길라잡이 길. 풋풋하다. 기념사진인척 찍어 두었지만, 사실은 탑과 크기를 비교하려고 '샷타'를 누른 것임을 그때 몰랐을 게다.

장흥읍 향양리 생양마을(속칭 시양쟁이)에 있는 이 유적은 그 정체성이 모호하다. '석탑'으로 알려지다가 1989년 조사에서는 부도(浮屠)로 보았다. 이번 답사에서도 '탑'과 '부도' 사이에서 의견이 분출하였다. 어떻든 '탑'인 것은 맞겠다. 둘 다 탑으로 불리니.... '불탑', '승탑(부도)'  

 

 장흥읍 향양리 생양사지 탑, 불탑인가. 승탑인가. 논쟁중

 

장흥읍 축내리 탑동 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