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69 - 광주와 광산 ; 풍영정, 포충사, 빙월당 -극락강과 칠천- 1990

향토학인 2017. 1. 28. 01:52

 인지의 즐거움069

(민학회답사, 1990.06)

 

광주와 광산 -풍영정, 포충사, 빙월당

-극락강과 칠천-

 

김희태·박순천

 

광산이란 고을 이름은 고려 때부터 광주의 별호로 불려왔습니다. 물론 화평·무진·익양·익주 등 여러 이름도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광주와 광산을 별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 초기인 1914년에 42개면이 15면으로 통폐합 또는 인군 군에 분속되고 난 뒤 1935년에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어 독립되고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불리게 되면서부터입니다. 1986년에 송정시가 분리되었다가 다시 1988년에 광주직할시로 합해져 고려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동안 유지되는 영역이 다시 한 고을로 묶어진 셈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동일지역이라는 의미가 우리들에게 와 닿지 않은 것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탓에 오히려 그 내면과 역사현장을 잘 모르기 때문 아닐까요?

 

예전처럼 사람들이 늦을까봐 버스가 그에 맞춘 듯(?) 좀 늦게 달려와 허덕이면서 출발한 뒤 박선홍회장의 말씀이다. 공예대전에서 조재호 회원이 우수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알렸고 광산지역의 향토사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차행선 광산문화원장, 휴일도 마다 않고 안내에 나서 준 광산구 문화공보실의 양영철 선생의 소개도 있었다.

 

지난번처럼 회원들이 그때 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안내 설명을 하던 것과는 달리 정말 진지하고 답사다운 답사가 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너무 가깝기에 잘 모르고 지나쳤던 광산지역의 역사와 문화현장도 이해가 깊어질 것은 틀림없으리라고 모두들 예견한 듯 싶다.

 

하남공단이 조성되면서 새로 뚫린 운암고속도로를 따라 가다 극락강을 가로지르는 광산대교에 차를 멈추고 풍영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가의 언덕 위에 서 있는 풍영정(風詠亭). 광산김씨 칠계 김언거(1503~1584)가 칠천(현 극락강) 상류에 지었다 한다. 하서 김인후(1510~1560), 퇴계 이황(1501~1570), 고봉 기대승(1527~1572) 등 당대의 명현들이 노닐던 곳이다. 1560(명종 15)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고향에 내려오자 학자들이 몰려든다. 퇴계에게 풍영정 차운시를 받은 때가 1545년이라니 지어진 것도 그 어간.

 

김언거와 칠천의 풍영정

 

한석봉의 신필이라는 第一湖山, 하서의 풍영정 10, 지지당 송흠(1459~1547), 동악 이안눌(1571~1637), 현주 조찬한(1572~1631), 석주 권필(1569~1612), 청사 고용후(1577~?), 기암 정홍명(1582~1650) 등의 현판 50여개나 즐비하다. <광주목지><광주읍지>에는 김인후, 이황, 박광옥, 기대승, 고경명, 이덕형, 소세양 등의 싯귀가 올라 있다.

 

이처럼 많은 명현 문객들이 이곳에 찾아 들어 절경을 노래하고 고담준론을 하면서 얼큰히 한잔되어 해거름 참에 돌아가곤 했던 것이 광산8경 가운데 하나인 風詠晩歸로 남은 듯 싶다. 지금은 쇳소리 내며 달리는 경전선 열차의 기적소리, 도로의 차들, 농기계의 굉음들로 어지럽다. 요즈음의 광산8경은 風詠轟音으로나 비겨야 하지 않을지.

 

몇가지 전설도 있다. 김언거가 귀향하자 여러 사람이 정자를 지어주어 12채나 되었다 한다. 이 가운데 풍영정의 현판 글씨를 당시의 기인으로 무주 구천동에 살던 갈처사에게 받기 위하여 3~4년간에 열세번이나 찾아 갔다고 한다. 결국 글씨를 받아 오지만 새기기 전에는 꺼내보지 말라는 다짐을 소홀히 하고 오던 길에 펴 보다가 ()’자가 날아가 버려 이 글자만 다른 사람에게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임란 때 열두채의 건물에 불이 났다. 풍영정에 불이 붙자 현판 글씨가 날아가 오리가 되어 극락강에 떠올랐다 한다. 왜장이 이상히 여겨 불을 끄니 오리가 다시 날아와 현판 글씨로 변했다는 신이한 내용이다강원도 소금장수 총각과 이 마을 장씨문중 처녀와의 애닯은 사랑이야기도 있다.

 

이 정자가 있는 신창동은 옹관묘지가 발굴되어 잘 알려진 선사유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 양회채씨가 발견하여 1963년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발굴하였다. 53기의 소형옹관이 집단적으로 발견되었는데 영산강유역 옹관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서 기원전후 1~2세기에 해당된다.

 

극락강역과 하남교를 지나 황룡강 줄기를 바라보면서 호남선 철도와 나란히 달려갔다. 신룡동의 새말(신촌)에 이르러 5층석탑과 돌부처를 찾아 마을 입구에서 차를 내려 20분 남짓을 걸었다. 외딴 곳이긴 하지만 빼어난 탑이다. 광주 지역에는 5층석탑이 많은데 그 생김새도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서구 구동(성거사지)의 서5층석탑, 동구 지산동(백천사지)의 동5층석탑, 국립광주박물관 경내의 장운동 5층석탑 등.


신룡리석탑은 기단부 중석과 지대석 일부 및 상층기단 면석 2매를 신제로 보완하여 19819월 해체 복원하였다. 이때 1층 탑신 중앙의 사리공에서 4각 방형의 금동사리함·사리병·금동연화편(2소형목탑(7) 등이 나왔다. 총 높이는 5.3m에 이르며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한다. 곁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얼굴은 손상이 심하고 하부는 묻혀 있다.

 

문화재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가끔 여러 사람이 찾아와 아주 귀한 탑이라고 말합디다. 꼭 그 사람들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광산지역에서는 매우 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훌륭하게 보존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와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도 하고 건의도 한다고들 맨날 말하지만 지나면 함흥차사랍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이곳 유적의 허름한 모습을 새겨 두시어서 좋은 건의들을 많이 해 주십시오.

 

처음엔 밭작물을 밟을까봐 저어하면서 경계를 하던 이곳 주민 기하석씨(63)의 말이다. 우리의 답사도 그냥 왔다만 가는 일회성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여러 회원이 하였다.

 

신룡동은 원래 광주군의 소고룡면 지역인데 1914년 신촌·용동·촌동 구룡리 일부를 병합하면서 불리운 이름이다. 앞의 석불 석탑 외에도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네 번이나 옮긴 너부실 빙월당

 

신촌마을 입구에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 의해 고마산 남쪽 기슭에 세워졌다가 기정룡에 의해 중수된 뒤 이건된 낙암정, 용동마을에 고봉의 생가터와 묘소, 행주기씨 낙남 선조인 덕성군 물재 기진의 제각인 오남재와 유허비(1957, 기근섭 지음, 김규태 글씨)가 있다.

 

물재는 고봉의 부친이며 기묘명현 복재 기준(1491~1521)의 형이다. 이 마을에는 고봉이 세상을 뜬지 7년만인 1578(선조 11)에 월봉서원이 세워진다. 15년 쯤 지나 임란의 피해로 20여리 떨어진 망월봉 아래 동천(비아 산월)으로 옮기고 1654(효종 5) 호남 유생들의 발의로 청액상소를 올려 이듬해 월봉으로 사액 받기에 이른다. 이때 청액 상소는 청사 고용후가 지었다.

 

1871(현종 12)에 이 고장 출신 충주 박씨 눌재 박상(1474~1530)과 사암 박순(1523~1589), 1673년에는 광산김씨 김장생(1584~1631), 김집(1574~1656)을 추배하였다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헐린 뒤 임곡의 너부실(廣谷)에 중건하고 있다.

 

호남사림의 최고봉으로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사칠이기론의 변론 이후 제자로서보다는 동등한 학자로 대우했다는 고봉선생이건만 그를 뫼신 사우는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지난해엔 산사태가 나서 장판각이 허물어지고 담이 무너졌으니 너부실의 빙월당(월봉서원 강당으로서 1947년 이건, 광주 기념물 9)을 찾은 후학들도 마음이 착잡해진다. 입구에는 고봉의 아들 기효증이 시묘살이 하던 위치에 정자도 건립되었다 한다.

 

빙월당을 나서 사호동과 용진산을 건너에 두고 황룡강 본류가 흐르는 임곡교를 지난다. 사호동은 원래 함평군 오산면 지역으로 황룡강가여서 사호라 했다. 1914년 광주군 임곡면에 편입되었던 이곳의 원마을인 새고개(원 사호)’는 지난해의 수해로 마을 전체가 이주하는 고통을 겪었다.

 

용진산에는 광양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금광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용진사(상원사)라는 절이 있었다 한다. 조선초기 나주로 유배온 삼봉 정도전(1342~1398)이 용진사 관련 기문을 짓는데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이 절터에 1917년 건립된 용진정사는 대한제국기의 학자 후석 오준선(1851~1931)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며 면암 최익현, 김태원 등의 유학자들이 찾아들며 항일의병활동을 했던 근거지이다. 광주 문화재자료 제11호인 용진산 마애여래좌상, 1601년 죽림처사 박경이 건립한 가학정도 황룡강을 굽어 보고 있다송산교 건너에는 오자치 석마로 알려진 용마바위와 근래에 세운 용마암 기적비가 있다.

 

선암동에 이르러 3층석탑을 찾았다. 도로변의 박현주 효자와 열부 창령조씨의 기적비의 사연 또한 의미 있다. 이 비는 비면이 원래 도로 쪽을 향했는데 사고가 많이 나 비면을 마을 쪽으로 돌리면서부터 사고가 줄어 들었다 한다. 이 마을의 박만석씨 집 마당에 위치한 3층석탑도 그런 영험이 있었다 한다. 1층탑신과 1·2·3층의 옥개석, 상층 기단석 일부, 상륜부의 노반만이 남아 있는 이 탑은 힘깨나 쓰던 모 인사에 의해 송정중학교 뒤 가마골 공원으로 옮겼다가 주민의 진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옮겨가고부터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30여명이나 까닭없이 죽었고 마을 앞 백일홍은 몇 년 째 피지 않았는데 다시 옮겨 놓은 뒤 이런 이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효자비나 석탑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역할하고 있는 듯 싶다.

 

선암동은 조선시대에는 선암역이 있던 역촌이기도 하다. 길 건너의 원선암구장터로 불리우는 곳으로 선암장터는 대한제국기 의병의 보급루트이며 정보교환 장소였다. 인근의 어등산은 의병의 격전지로서 이름높다. 이 고장 출신인 의병장으로는 양진여·양상기 부자, 오성술·이기손·오상렬·이금재·최군선·황덕초·김원국 등을 둘 수 있다.

 

현대문학사의 대들보 박용철, 민중의 광대 임방울

 

불화란 불교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으로 불탑·불경·불상과 더불어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불화 가운데 하나인 탱화는 주로 벽면같은 데에 걸도록 하는 그림을 말하며 불경을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장엄용·예배용·교화용으로 분류되며 대상으로는 불상·보살상·나한상·신장상·독성 등이다. 그리는 사람은 화사·화승·편수·금어라 한다. 광산에는 탱화장 송복동옹(80)인간문화재’(광주 무형문화재 3)이다.

 

송옹은 10세때 전북 순창 구암사에서 조선조말 탱화의 거장 박석초 스님 밑에서 사사하여 문고산·이만호·김일섭 등과 교류하였으나 모두 타계하고 송옹만이 전수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의 탱화장의 맥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셈이다. 어렸을 적 얻은 병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예술혼은 육체적인 상처쯤은 초월한지 오래이고 선정의 경지에서 신들린 듯 만들어내며, 그의 아들 송광무(35)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한지에다 목탄으로 초를 뜨고 다시 붓으로 선명하게 그린 뒤(초화), 옥양목(또는 견직물)을 붙이고 그 위에다 아교를 먹여서 본을 뜬다(초채). 초채한 그림에다 다시 명암을 그리며 마지막으로 두 번 채색을 하여 완성한다. 송옹의 대표작으로는 전북 내소사, 고창 상원사, 장성 백양사 불화 등이다.

 

송정리의 별미로 잘 알려진 비빔밥과 쌀막걸리로 늦은 점심을 먹고 용아 생가로 향했다. 소촌동 뒷산자락 아늑한 곳에 널직히 자리잡고 있는 박용철(1904~1938) 생가에 이르니 절로 시심이 솟는 듯 싶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그가 지은 떠나가는 배의 한 구절처럼 서른 다섯이라는 짧은 삶은 살다 갔지만 외국문학을 번역 소개하고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 문학동인지를 간행하여 순수서정시운동을 펴면서 우리나라 시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우리고장 강진 출신 영랑 김윤식(1903~1950)과 함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용아가 문학으로 광산을 빛냈다면 소리로 날리던 이는 국창임방울(본명 林承根, 1904~1961)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응어리진 한을 깊고도 구성진 소리로 서리서리 풀어 주었던 임방울. 그는 분명 식민시대 한을 풀어준 민중광대였다. 그는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당대 명창 김창환(1854~1927)의 피를 이어 받아 박재실(춘향가·흥부가), 공창식(), 유성준(1873~1944, 수궁가·적벽가) 등에게 소리를 수학한 뒤 1929년 조선명창연주회에서 쑥대머리를 불러 명창의 반열에 오르고 타고난 미성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송정공원에 1986년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극락교를 지나 세하동의 만귀정(晩歸亭)에 이르렀다. 흥성장씨의 낙남 선조인 장창우(張昌雨)가 후학을 가르치던 옛터에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1934년 중건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중정자로 1940년에 장안섭이 지은 습향각(襲香閣), 1960년에 광산군민이 송정읍장 장안섭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성금으로 세운 묵암정사(默菴精舍가 있다.


연못가에는 '취석(醉石)'과 '성석(醒石)'이 새겨진 석재, 만귀정시사(詩社)창립기념비(1939년 송광세 지음)도 있다. 만귀정에는 현와 고광선(玄窩 高光善, 1855~1934)의 중건기(1934년), 겸산 이병수(謙山 李炳壽, 1855~1941)의 중건상량문(1934년), 장안섭의 중수기문, 만귀정 주인의 팔경 등 시, 기문 현판도 많다.


아동문학가로 파란 달무리란 아동문집을 낸 바 있는 이 정자의 주인 장재철(66) 선생이 술상을 차려 놓고 일행을 반긴다.

 

 

호남의병의 선봉장 고경명

 

전국의 민속놀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남성적이고 치열한 놀이라는 대촌 옻돌마을의 고싸움 놀이현장과 조선 세종 때 전라감사 김문발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향약을 실시했다는 부용정을 거쳐 포충사에 이르렀다.

 

60세의 노구로 호남의병의 선봉장이었던 제봉 고경명(1533~1592)과 그의 두 아들 종후(1554~1593)·인후(1561~1592), 부장인 문화유씨 유팽로(1554~1592)·순흥안씨 안영(?~1592) 등을 모시는 사액 사우이다. 대원군의 훼철령 때 헐리지 않은 전라도의 유일한 사우이다. 1976년 성역화 사업이 완료되어 호국안보와 도의교육의 수련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물관인 정기관(正氣館)에는 마상격문·사우가(祠宇歌현판·교지·목판 493·출병도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구 사우 아래에 충노(忠奴)(鳳伊, 貴仁)의 비도 있다. 주인이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자 주인을 섬기던 노비 역시 따랐던 것이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제봉선생을 일컬어 남쪽에 시인이 많지만 제봉이 으뜸이며 임진란 때 남쪽에 의병이 많았지만 전후 조정에서 포상하는데 으뜸으로 정하였다라 하면서 선생의 문무겸전을 높이 평하였다.

 

제봉선생의 후손인 고영두 부회장의 삿갓배미에서 모심기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자택에서 베풀어진 만찬으로 답사를 마쳤다.(19906월 답사, 주제 : 영산강문화유적조사)


*박순천(호남향사회원), 나두야 간다, <금호문화> 19907월호, 금호문화재단 ; <民學의 즐거움>-광주민학회 답사기 모음집-, 광주민학회, 1992. 320~328

*광주민학회 초창기 연구간사(김희태)와 간사(박순천) 역을 했다.


제봉 고경명선생 증시(贈諡) 교지

1643년(인조 21) 3월 28일 '忠烈'의 시호가 내려진다. 둘째줄 숭정대부~일곱째중 대제학까지는 증직(贈職)이고, 이 증직 벼슬의 고경명에게 내려진 시호이다.

1976년 포충사 정화계획서(당초)의 경내 배치도와 포충사 전경(전라남도 자료)

포충사는 사액 사우로 조선시대 1601년 건립 이래 지금까지  유서가 이어진다. 1976년 당초에는 원래의 사우를 정비할 계획으로 정화사업을 추진했으나 뒤에 신사우를 건립하기로 변경되어 1980년에 준공한다. 준공식도 1980년 5월로 예정했다가 7월로 미뤄졌다. 

고봉 기대승선생을 모신 월봉서원 빙월당의 주련.

정사나 문장은 모두 말단이라는 것. 인성론(人性論) 중심의 한국 성리학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 주는 사칠논변(四七論辯)의 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