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67
(민학회답사, 1990.05)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이 배 떠 있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김희태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제
흥양의 돋는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네
모든 것이 가득하여 원숙하고 평탄하다
조선조의 전라도 각 고을 이름을 은유로 비겨 읊조리던 「호남가(湖南歌)」의 첫 구절이다. 첫 대목의 ‘함평(咸平)’은 ‘모든 것이 가득하여 원숙하고 평탄하다’는 뜻으로 태평성대를 말함이리라. 이 글자를 고을명으로 하고 있는 함평 역시 태평성대를 누릴만한 곳임에 틀림없다. 땅을 생활기반으로 했던 우리 선조들에게 기름진 농토야말로 더 없는 태평성대의 필요조건이었던 까닭에 함평의 너른 들과 이를 적셔주는 가닥가닥의 물줄기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함평천지로 시작되는 호남가에 비유된 뜻을 살펴보면 ‘광주(光州)’는 밝은 땅, 빛고을, ‘흥양(興陽)’은 해돋는 언덕, ‘영암(靈巖)’은 신령스런 바위를 뜻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생활의 여러 면에서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 의미는 주로 윤리와 도덕이 세워지는 태평한 시절로서 이상세계를 담았다. 오늘날 도덕이 먹칠되고 인륜이 곤두박질되는 여러 사회현상이 어서 빨리 바로 되어 백성들이 태평하게 살 날이 되기를 바라면서 5월 민학회 나들이를 함평천지로 나섰다. 입하가 지나서인지 여름날이 다 된 듯 한 날씨였다.
5월이 되어 수묵회전(희재 문장호), 현대서각전(효천 조정숙) 등 회원들의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는 소개가 있을 즈음 구진포터널을 지난다. 영산강의 본류가 지척이고 호남선 철도가 바로 옆이다. 배가 드나들적만 해도 뱃길, 찻길, 기차길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멀리 앙암도 보인다.
고막원에 이르러 일행이 합류한다. 함평 향토문화연구회 리현석 회장, 김광철 사무차장과 그의 두 공주님, 함평 향문회의 회보인 「咸鄕」 창간호, 수정 윤제(守貞 尹濟, 562~1645)와 송돈 윤정우(松墩 尹挺宇, 1603~1690) 부자의 유고인 「교재집」이 돌려졌다. 귀한 자료이다.
함평 향문회는 고전국역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여 1986년에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정호인), 「해상록(海上錄)」(정희득), 「만사록(萬死錄)」(정경득) 등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이곳 선비들이 돌아와 쓴 일기를 국역 발간했다. 이어 1989년에는 호남 사림의 종장격(宗匠格)인 곤재 정개청(1529~1590)의 「우득록(愚得錄)」 국역본을 펴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건만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그들인지라 민학회의 나들이도 한껏 달아 오른다. 뜨거운 날씨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고막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돌다리에 다다른다. 허름한 듯 하지만 천년 세월을 버텨왔다. 투박하면서도 간결함이 한층 멋스럽다.
고려시대에 무안 법천사 스님 고막대사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다리는 폭풍우로 인한 급류가 휘몰아쳐도 끄덕 없다 한다. 나락을 말려도 돌틈새로 빠지지 않을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판석, 개구쟁이 녀석들이 놀다 떨어져도 전혀 다친 적이 없는 곳, 여름엔 모기가 얼씬도 하지 않아 쉬기 좋은 곳 등 영험스런 구전도 전한다. 전국에 무지개꼴의 홍교는 많이 있지만 이 같은 돌다리는 썩 드물다.
고막천 석교가 있는 이 부근은 조선시대에 원(院)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원이란 공무 집행중인 관리의 숙소에 해당한다. 현재의 민가가 들어선 곳이 터자리라 한다. 여러 가지 영험과 곁들여 남북으로 오가는 관인·행인·농부들의 북적대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한데 한가로이 노니는 세 마리의 소와 빨래하는 아낙이 기다릴뿐······.
이곳은 영산강 지류 가운데 하나인 고막천 하류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도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나산 출신 박봉혁(1873~1936)이 1911년에 지은 ‘기성가(箕城歌)’에도 ‘古幕院 南見하니 어염선이 滿浦하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큰 포구였으리라.
함평의 물갈래는 크게 이곳 고막천과 함평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함평천으로 나뉜다.
함평천은 영광군 군남면 대덕리 상광암의 선바위산(해발 250m)계곡에 있는 약수샘이 발원지이다. 이 천의 총 길이는 27.5km로 신광천·대동천·엄다천·학교천·무안천을 아우르며 엄다면 영흥리 사호에서 합류한다. 함평천에 적셔주는 너른 들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쌀 생산지이며 ‘함평천지’가 유래한 곳이기도 하다. 함평천은 기록상으로는 이제천·학천·토교천·대천·영수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이 배 떠 있네
이번에 주로 답사했던 고막천은 장성 삼서면의 태청산에서 발원한다. 이 하천의 총길이는 29.6km로 용암천(월아 용암~정산), 금석천(월야 월악~금석), 해보천(해보 금계~대창), 삼서천(장성 삼서면 대곡~월야 정산), 산내천(해보 산내~상곡), 석지천(나산 용두~나산리), 월봉천(나산 우치~덕림), 평능천(나산 송암~나산리), 구산천(나산 원산~덕림)을 아우르며 학교면 석정리에서 영산강 본류와 합류한다.
영산강 본류 중 고막천이 합류하는 석정리에서 함평천이 흘러드는 엄다 영흥리(사호)사이의 이십리 남짓(8.5km)을 사호강(沙湖江) 또는 곡강(曲江)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에는 대굴사(大崛寺)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초기에는 24년간(1408~1432) 전라도수군처치사영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많은 시인 묵객이 찾아들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무안에 속한 곳.
푸른 강 천만 이랑에
외로이 배 떠 있네
산봉우리는 붉은 해를 보내고
바다 밑에 흰 달 맞이 하네
물가에 가득한 모래 서리 같고
공중에 연한 물결 눈 같네
고기잡이 젓대소리 서너 곡조에
갈대 사이에서 절로 처량하구나
(김극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원래 함평에는 함풍현(咸豐縣)과 모평현(牟平縣)이 서로 독립된 고을로 있었다. 함풍현은 백제때 굴내(屈乃)현으로 통일신라 때 함풍이라 고쳤다. 현재의 함평읍과 손불·신광·대동면 일원으로 주로 함평천 유역이다. 모평현은 백제때는 다지(多只)현, 통일신라때는 다기(多岐)현이라 하다가 고려 시대에 모평으로 불렸다. 현재의 나산·해보·월야 일대로 고막천 유역이다.
즉 함평천에는 함풍현, 고막천에는 모평현이 터를 잡고 있었던 셈이다. 물줄기를 따라 생활공간이 만들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이는 지난번의 답사에서도 알 수 있었다. 화순쪽에서는 보성강 갈래인 동복천에 동복현이, 영산강 가닥인 화순천에는 화순현, 드들강(지석천, 능주천)에는 능주목(능성)이 있었다.
장성쪽 역시 황룡강 본류가 지나가는 중심부에는 장성군, 극락강 상류에 진원현, 고막천 상류인 삼서쪽의 삼계현 등을 들 수 있다. 강과 인간생활과의 밀접한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조선초기(1409)에 함풍·모평 두 현이 합해지면서 한 글자씩 따서 함평이라 했다. 이 시기에 현재의 전북 옥구에 있던 전라수영이 대굴포(학교면 곡창리 대곡)로 옮겨온다.(1408년), 10년 뒤에는 전라도의 수군본영이 남쪽으로 옮겨 온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육군본영 또한 남쪽으로 옮긴다. 즉 광산에 있던 전라도병마절제사영이 1417(태종 17)년에 현재의 강진 병영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강진의 두 현(도강·탐진)은 강진으로 합해진다. 남쪽지방 왜구의 효율적인 견제를 위해서였을 게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확립돼 감을 뜻하는 것으로도 추정되지만 당시 이 지방 세력 동향과 곁들여 연구해 봄직하다.
날씨 탓인지 도시의 찌든 생활 때문이었던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동면의 철성산성에 올랐다. 고희 노객에 예닐곱 아동까지 모두가 산마루에 올라 헐어진 성벽 위에 섰다. 온 산에 정금이 가득하고 철 늦은 철쭉이 활짝 반긴다. 오르는 도중에 삼림욕을 한다는 시간벌이 작전도 있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았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문헌전거는 없다. 조선초기까지도 무안현에 속한 땅으로 당시에는 ‘철성(鐵城)’으로 불렸음도 나타난다. 주변의 너른 평야, 수많은 고인돌과 고분 따위 유적의 분포에서 강성한 세력집단이 철성산을 중심으로 영위했으리라는 것은 얼른 짐작이 간다. 간단한 제수를 마련하여 산성제를 지냈다. 동문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산신령이시여!
신령님이 계시는 이곳 철성산성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저희들 모두가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도 신령님의 은혜입니다. 돌아가서도 천년 만년 보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제주인 이명한 선생이 즉석에서 올린 고유문이다. 초헌 최석곤, 아헌 조정숙, 종헌 리현석.
예부터 ‘악해독(嶽海瀆)’이라 해 전국의 큰 산과 바다에서 국제를 지냈고 각 고을에서는 명산대천에 제를 지냈었다. 우리 민학회의 바위문화 조사 첫 지역이었던 영암 월출산에서는 통일신라때 ‘소사(小祀)’라는 국제를 지냈고, 영암 시종의 남해당(南海堂, 당시는 나주)에서도 고려 때 국제를 지냈다. 철성산의 성이 백제 때 쌓아졌다는 속설을 따른다면 그 무렵 언젠가부터 이 산을 중심으로 살던 집단들이 이곳에서 제를 지냈을만 하다. 천년 세월이 지나 민학회에 의해 그 정성이 모아졌으니······.
하산길은 몸도 가볍고 마음도 싱그럽다. 대동면 향교리의 함평향고를 지나 읍내에 이르렀다. 함평향교는 원래 내교리 대화촌에 있었으나 1627(인조25)~1631년 사이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의 배치가 특이하여 대성전이 앞에 있고 강학구역인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이다. 서울의 성균관과 나주향교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함평의 별미라는 비빔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무냉채로 갈증을 채운 뒤 일정을 재촉했다.
함평 노적봉 고분은 왕족의 무덤
도내에서는 유일한 함평공원의 척화비(斥和碑), 기산영수(箕山潁水)로 잘 알려진 영수정(영파정, 관덕정), 해보리 절터에서 옮겨온 군민회관 앞의 석불입상, 함평의 진산인 기산에 둘러져 있는 기산성(읍성)······ 이 모두를 자세히 답사치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잣고개[城峙]를 넘어 ‘노적봉’ 고분으로 향했다.
이곳은 신광면 유천리·함평읍 장연리·대동면 금산리·손불면 궁산리 등의 경계지점이다. 22호 국도를 따라 한시간 남짓이면 영광으로 이어진다.
「우리 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매달 가족 동반으로 문화강좌나 유적순례를 합니다. 이곳 고분도 회원들이 답사하면서 찾은 것인데 보기 드문 대형입니다. 길이는 40x50m이며 절두 방대형으로 넓이는 600평에 이릅니다. 정상부에는 백제석실분 계통으로 보이는 판석이 드러나 있습니다. 봉분에는 즙석분형식의 이음돌이 둘러져 있습니다. 학계에서도 귀중히 평가하지만 보다 자세한 정밀 실측조사나 더 나아가 발굴조사까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원 나름대로 정리하여 책자로 간행할 예정입니다.」
리현석 회장의 열띤 설명이다. 이미 지상보도를 통해 소개(무등일보. 5월 12일)한 백형모 기획위원도 ‘왕족신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주변의 지명 또한 유심히 살필만 하다. 우선은 이곳 고분이 ‘노적봉’이라는 것에서 사람의 힘이 더해진 듯한 느낌이고, 장연리의 장고산(뗏동)은 해남의 전방후원형 고분인 장고봉고분을 연상 시킨다. 괸들재(고인돌), 바우배기(박힌바위), 초장골(초분터 ?), 공동매(공동묘), 미출(사랑골, 쌀이 많이 난다 함), 숯골, 탑동, 구수랑개(구주포), 당묏산봉아리, 사기점터 등.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리도 채 못되어 서해 바다로 연결된다. 바닷길을 통한 이동과 교류······잊혀졌던 역사의 한 장의 밝혀질 만 하다는 기대감이 민학인의 가슴에 잠겨왔다.
노천 김대규 회원의 ‘호남가’를 들으며 ‘큰자식을 얻으려면 해뜨기 전에 벌초해야 한다’는 구전 때문에 보존이 잘된 나산면 삼축리 평능고분, 정면 7칸반 겹집인 초포리 이규행 가옥, 30여점의 청동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영산강유역 청동기 문화의 우수성이 입증된 초포리 유적, 문장 3.1만세운동터와 기념탑, 1만호의 집단이 살았을만 하여 이름했다는 예덕리 만가촌(萬家村) 고분군, 정유재란 때 월야의 진주·동래 양 정씨 문중 부녀자들의 정절을 기린 8열부정려각을 지나 외치리에 이르렀다.
월사 정일순회원의 친정집에서 촌닭에 찹쌀죽·묵은김치·함평미나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씩 들이켰다. 6월 답사에도 많은 참여를 바란다는 안내가 있을 즈음 해는 서산에 기울어 버린지 오래였다.(1990년 5월 답사, 주제 : 영산강)
*김희태, 함평천지 늙은 몸이, <금호문화> 1990년 6월호, 금호문화재단 ; 광주민학회, <民學의 즐거움>-광주민학회 답사기 모음집-, 1992. 312~319쪽
*김극기 시 원문(<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무안현 산천 대굴포)
碧江千萬頃(벽강천만경) 孤棹自橫絶(고도자횡절) 峯端送紅日(봉단송홍일) 海底迎白月(해저영백월) 滿岸沙似霜(만안사사상) 連空浪如雪(연공낭여설) 漁笛三四聲(어적삼사성) 葦間自凄咽(위간자처인)
동여도(東輿圖, 김정호, 1861년) 함평 부근도.
함평은 읍치 바로 곁을 지나는 함평천과 지도의 가운데 쯤 아래로 흐르는 고막천을 중심으로 고을이 형성되었다. 함평천은 함풍현(백제 때 굴내현), 고막천에는 모평현(백제 다지현, 신라 다기현). 두 고을이 합해져 함풍(咸豊)과 모평(牟平)에서 한글자씩 따 함평(咸平)이라 이름한 것이 1409년이다. 고막천을 따라 내려가면 평릉(平陵)이 보인다. 평릉 앞의 o 표기는 조선시대 후기의 면(面) 이름이다. 거대한 고분(陵)이 있어 면 이름까지 유래된 것 같다. 더 내려가면 왼쪽에 철성산이 보이는데 이곳에 남아 있는 산성을 올랐다. 고막교, 고막포를 지나면 영산강 본류와 만난다. 강이 호수 같이 넓어짐으로 사호강(沙湖江)이라 불렀다. 함평천과 합류하는 대굴포에는 대굴사가 있었고 조선 초기에 전라도 수군본부가 있었다. 더 내려가 굽어 도는 곳에서는 곡강(曲江)이라 했고 굽어 돌아가는 곳의 넓어진 여울(灘)이 몽탄(夢灘)이다. 지형을 뜻하는 굽다의 '굽'이 굽(曲)여울(灘)>굼>꿈(夢)으로 변해 몽탄(夢灘)으로 표기가 되면서 후대에서는 '夢(꿈)'을 먼저 해석하는 설화로 변하였다. 고막포, 대굴포는 조선시대 무안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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