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66 - 강이 맑아 물고기 헤일만 하고, 드들강과 운주사, 1990

향토학인 2017. 1. 12. 14:00

   인지의즐거움 066

(민학회답사,1990.04.15) 

 

 

강이 맑아 물고기 헤일만 하고

-드들강과 운주사-

 

김희태

 

다릿가의 하얀 돌이 사랑스럽고 

난간 밖의 푸른 대가 어여뻐라.

강이 맑아 물고기 헤일만 하고

뜰이 고요하니 새와 서로 친하네.

 

이 시는 물고기 헤일만 하게맑은 능주천의 경치를 읊은 조선왕조 초기의 문신 죽재 안침(竹齋 安琛, 1444~1515)의 시 일부이다. 강가에 있던 청흥정(淸興亭)에 올라 읊었던 것.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능성현조에 등재 되어 있으니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1498(연산군 4)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498.10~1499.11 관찰사 재임.

 

500여년이 지난 지금은 곳곳이 많이 더럽혀졌지만 푸른 대와 맑은 물을 찾아 광주민학회의 영산강답사 세 번째 길을 드들강(지석강·능주천)으로 나섰다.

 

강이 맑아 물고기 헤일만 하고

 

드들강은 화순군 이양면 증리 쌍봉사 계곡의 계당산(桂堂山, 해발 580. 2m)이 그 발원지다. 이 산 너머는 보성군 복내면 계산리로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 수계이다. 이곳 발원지는 한국하천연구소가 조사한 것으로 그 이전의 기록은 서로 다르다.(세종실록지리지; 능성 쌍봉,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 여점 북쪽, 화순군지: 이양면 고치 중턱, 한국지명총람; 청풍면 이만리 봉미산과 남계봉 등)

 

이 강은 영산강의 하류까지 3백리 길(127.5km)이고 본류와는 1백리(34.5km)남짓에 나주 금천에서 합류한다. 물론 가는 길에 크고 작은 하천을 아우른다. 그 이름도 곳곳의 절경과 역사현장에 스미어 여러 가지이다.

 

우선 전체적으로 지석천 또는 능주천으로 불리우지만 이양면 강서리 예성산 아래 송석정에서는 양자강(楊子江) 또는 용강(龍江)으로, 이십리를 흘러서 능주 잠정리에 이르러서는 충신강, 다시 1.5km쯤 흘러 관영리 영벽정가에 이르러서는 영벽강으로 불리운다.

 

이 영벽강이 능주면 원지리에 이르러 화순천과 합해진다. 화순천은 동면 건지산(240m)에서 시원하여 물통골과 만연폭포를 지나 흘러든다. 다시 도곡면 평리에서는 천태산 골짝에서 흘러드는 정내(淨川)와 화학산(華鶴山, 613.0m)에서 발원하여 나주호를 거쳐 모아드는 대초천의 물과 만난다.

 

화순에는 천년 세월 사이 세 개의 이 있었다. 드들강 상류의 물갈래로 보자면 능주천(지석천)에는 능주목(綾州牧, 증선현), 화순천에는 화순현이 각각 독립된 행정단위였다. 무등산 북쪽 동복천은 보성강을 지나 섬진강으로 합해진 물갈래 탓이었던지 지금과는 다르게 따로 이 물줄기에 동복현(同福縣)이 있었다. 하천과 평야를 중심으로 인간생활의 중심지가 만들어졌던 셈이다. 이 세 지역은 1914년에 병합되어 현재의 화순읍이 중심이 되지만 예전에는 서로 독립되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지금도 유림들은 세 곳의 향교로 따로 출입한다.

 

화순은 원래 잉리아(仍利亞:백제), 여미(汝湄:통일신라)라 하다가 고려초기(940)에 화순으로 불리웠으며 여빈(汝濱), 해빈(海濱), 오성(烏城), 산양(山陽), 서양(瑞陽)의 별칭이 있다.

 

능주는 이릉부리(爾陵夫里:백제), 능성(陵城:통일신라·고려)이라 하다가 1632(조선 인조 10)에 능주() 구씨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의 딸인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급성장 한다. 능주를 중심으로 생활했던 성씨집단은 구()씨 외에 정(), (), (), (), ()씨 등이 우리나라의 성씨 사전이라 할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인다. 능주는 죽수부리(竹樹夫里), 이릉부리(尔陵夫里), 연주부리(連珠夫里) 등으로 불린다.

 

동복은 두부지(豆夫只:백제)라 하다가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구성(龜城), 옹성(甕城), 복천(福川), 나복(蘿葍)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이들 세 지역은 1047년에 복순현(同福+和順)과 능주(능성)로 갈려 있다가 1416년에는 동복과 능주가 서로 엇바꿔 순성(和順+陵城)현이 되었다. 아예 고을 자체가 없어졌다가 복구되기도 한다. 지방 세력들의 영고성쇠와 더불어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함평의 초포리 돌널무덤에서 청동기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19877)까지만도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많은 청동유물이 한꺼번에 발견된 곳이 화순 도암면 대곡리 유적(구재천 집)이다. 팔주령 2, 쌍두령 2, 세문경 2, 한국식 동검 등 모두 11점이었고 묘곽의 크기는 길이 216cm, 너비 80cm쯤이었다. 1973년의 일로 현재는 국보 143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는 화순지역이 선사시대부터 선진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함평 초포리나 화순 대곡리 유적이 모두 영산강 물줄기인 점도 주목할만하다. 청동기유물은 높은 온도에서의 합금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고도로 발달한 기술축적 아래에서 가능하다. 그만큼 영산강 유역 주민들의 우수한 문화를 대변해 준다고나 할까······.

 

 

풀리지 않는 운주사의 비밀

 

이제 지석천의 물길 따라 선인들의 향취를 더듬어 보자.

전통사회에 있어서 우리 국민정신을 크게 지배해 왔다고 여겨지는 불교는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깊은 산골에 있는 경유가 많아 볼거리나 이야기거리가 많다. 화순지역에도 많은 사찰과 불교문화재가 있다.

 

 

구산선문의 사자산파를 형성했던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주석한 쌍봉사가 지석천의 최상류에 자리한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목조삼층탑이 있었고(1984년 불탄 뒤 1986년 복원) 지금까지 전해지는 부도 가운데 가장 절묘하고 아름다운 최대의 걸작 철감선사탑(국보 57)도 있다.

 

도암으로 들어서면 천태산의 개천사와 천불동의 운주사가 있다. 산이나 마을 이름부터 천태종과 연관이 있을 법한 개천사 입구의 목장승이 무심한 표정으로 일행을 반긴다. 벚꽃이 만개한 길따라 정연한 계단을 오른다.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천불이 있어 개천사 천불, 운주사 천탑이라 했다오. 저 산등성이에 탑도 있었다고들 하던데······

 

법주사에서 왔다는 희안(63) 노비구니의 말이다. 지금은 허름한 법당과 부도 5, 토굴 1개소의 소규모 사찰이다. 주변의 비자나무 숲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운주사는 광주민학회의 창립과 더불어 치른 첫 번째의 학술답사(1986928)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그해 126일에는 금호문화회관에서 운주사의 모든 것을 주제로 민학회 모듬이야기판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곳은 다탑봉(多塔峰), 천불동(千佛洞)으로 불린다. ‘천불천탑과 도선(道詵)풍수비보전설이 깃든 곳, 용화 미륵세계와 민중불교의 성지로도 말한다. 태밀(台密, 天台系 密敎)사상, 칠성신앙, 무당의 기도처 등 많은 학설과 추정이 있어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인 곳이다.

 

이미 국가 사적 제 312호로 지정되었고 경내에는 연화탑·5층탑·9층탑 등 20여기의 탑(2기는 보물로 지정)과 석조불감(보물 제 797), 누운부처(臥佛좌불·입불 등 떡 주무르듯 새겨 모신 각양각색의 상호를 한 70여구의 부처님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되는 청동불도 출토되었고, ‘운주사(雲住寺)’명 기와조각도 발굴되어 요즈음은 배 형국에 돛대와 사공으로 조성하면서 불리웠다는 운주사(運舟寺)’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1983년부터 4차에 걸쳐 학술발굴도 실시(전남대 박물관)하였고 정화사업도 했지만 아직도 신비스럽기만 한 이곳의 비밀은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창견연대·조성배경·참여세력·사상과 경제력 등, 종합학술조사를 분야별로 하여 최종보고서가 작성중이니 이를 기대해 볼 밖에 없지만.

 

천불동과 천태산을 중심으로 십리나 이십리 남짓의 거리 안에 이름난 사찰들이 많다. 화순관내만 보더라도 만연사·용암사와 규봉암을 비롯한 무등산의 사찰들, 나주 다도쪽의 운흥사와 불회사, 장흥쪽으로 가면 구산선문인 가지산의 보림사 등.

 

능주에 다다르면 강이름도 바뀌고 유적들도 즐비하다. 잠정리의 삼충각, 능주천을 충신강으로 불리우게끔 한 곳이다. 1593(선조 26)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이 고장 출신 해주최씨 최경회(1532~1593)와 남평문씨 문홍헌(1539~1593), 1555(명종 10) 을묘왜란(달량진사변) 때 해남에서 순절한 창령조씨 조현 등 세 분의 충신각이 있다. 암벽을 적당히 이용해 세운 것으로 1685(숙종 11)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곳 정려각과 경전선 철로 주변에는 능주목사·현감의 선정·불망비가 암면마다 그득하다. 특히 주목할 곳이 성화(成化) 21년 명문이 새겨진 도로 수축에 관한 암각이다. 성화는 중국 명나라 현종 연간의 연호(1465~1487)로 성화 21년은 조성 선종 16(1485)이다. 이 무렵에 이곳 충신 강변에 도로를 놓으면서 시주자 명단을 새긴 것이다. 대시주는 능성 구씨로 장사랑(將仕郎)이던 구용연(具龍淵) 부처이다.

 

화순에서 삼십리 거리의 남정리는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의지가 서린 곳이다. 능주현의 터자리이기도 한 이곳에서 정암은 유배와 절명시를 남기고 달포만에 사약을 받았다. 조선 중종 때 왕도정치 실현을 내세우며 개혁정책을 폈지만 끝내는 보수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기묘사화(1519)때 밀려나 설흔여덟의 젊은 꿈이 스러지고 만 것이다. 헌종 때 세운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비문을 짓고 민유중(1630~1687)이 전서, 송준길(1606~1672)이 비문을 썼다. 경내에는 강당과 영정각, 그리고 유배생활 당시의 초가도 복원되어 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락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으며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며

내 일편단심 충정을 밝게 비치리

 

전라도 광맥, 화순 탄광

 

 

화순 능주면 소재지인 석고리에는 능주의 터자리답게 아문(衙門)이 지금도 남아있어 죽수절에아문(竹樹節制衙門)’이란 현액이 걸려 있다. 능주의 옛 이름인 죽수부리에서 그 뜻을 취한 듯 하다. 지금은 돌로 다시 깎아 세웠지만 이웃한 관영리의 장승과 당산제는 역시 마을과 고을의 액맥이·수호 역할을 했음직 하다.

 

 

다시 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가면 영벽정에서 시심이 절로 돋는다. ‘영벽상춘(映碧賞春)’이란 능주 8경의 하나인 영벽정을 찾는 민학회의 봄나들이가 딱 맞아 떨어지니 이 또한 영산강 답사의 좋은 결과를 미리 점지해 주는 듯 하다. 영벽정은 능주의 또 다른 이름 연주부리(連珠夫里)‘에서 유래한 듯 한 연주산(聯柱山) 아래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나 학포 양팽손(1480~1545)등의 시구절에도 등장하여 그 오랜 유서를 알 수 있다. 고종 연간에 불탄 뒤 1873년 능주목사 한치조가 중건한 이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중층정자이다. 지금도 시인·묵객은 물론 태공이나 피서객까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쓰레기 때문에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고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부터 알려진 자랑거리로 화순천변의 백암리 옹기가 있다. 마을 이름도 원료인 백토에서 유래된 듯 하며 점촌이란 땅이름도 있다. 강진 칠량과 더불어 유명한 이곳 옹기는 김장철만 되면 장사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플라스틱제품에 밀려 겨우 명맥만 유지된다고 한다. 한때 50호 중 40호 가까이가 옹기를 구웠던 영화(?)는 사라지고······.

 

 

화순에는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석탄층이 고루 퍼져 있다. 주로 동복면, 동면, 한천면, 이양면, 청풍면에 걸쳐 광맥이 이어져 있다. 10여개의 탄광에서 광부 삼천명쯤이 한해에 80만 톤에 가까운 양의 석탄을 캐내어 산업철도인 화순선을 타고 전라도·경상도지방으로 실려 나간다. 이곳의 석탄은 30년쯤은 더 캘 수 있다고 하며 규석·석회석·납석 등의 다른 지하자원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이제 지석천은 화순천과 만나 영산강 본류로 흘러든다. 드들강과 영산강 본류와의 합수지점은 뒷날로 답사를 미루고 벽라리의 미륵, 참샘(차천)과 진각국사. 최영의 전설, 산 네 모퉁이에 우물 10개가 있었다는 산산(蒜山, 현 남산), 하늘을 나는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면서 넘나들었다는 너릿재를 지났다.

 

지금은 같은 군내이지만 물갈래가 달랐던 동복천의 물길따라

 고을 따라 널린 유산들도 또 다른 틈을 내야 할 것이다. 반쯤은 잠겼지만 물색과 산빛이 어우러진 창랑의 물염적벽과 장항적벽, 김삿갓의 시혼(詩魂), 한올 한올 땀이 배인 동복 삼베, 좌도굿의 신명나는 쇠가락 - 한천농악 등······.

 

 

이 모두를 이해해야만 화순 또는, 우리 남도민들의 생활과 풍습을 이해할 수 있을 터이고, 그것이 우리 민학인의 나들이를 보람되게 하리라(1990년 4월 15일 답사, 영산강문화유적조사3)

 

*김희태, 드들강과 운주사, <금호문화> 19904월호, 금호문화재단 ; 광주민학회, <民學의 즐거움>-광주민학회 답사기 모음집-, 1992. 304~311

 

*안침의 시 원문(<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능성현 누정 청흥정)

능성천고지(綾城千古地) 瀟洒一亭新(소쇄일정신) 白愛橋邊石(백애교변석) 靑憐檻外筠(청련함외균) 江淸魚可數(강청어가수) 庭靜鳥相親(정정조상친) 起向紅塵去(기향홍진거) 還爲役役人(환위역역인)

 

 

운주사터 옛 경관(1917년 <전남사진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초간본 1481년) 능성현 누정조와 불우조. 누정조에 봉서루, 영벽정, 청흥정이 보인다. 관영 정자(관아)이다. 영벽정 앞의 '신증' 표기는 1530년 신증본 간행 때 증보한 내용임을 말한다. 안침이 청흥정을 방문한 것은 전라도관찰사 재임 때의 순행(巡行)관 관련이 있어 보인다. 1498년께. 불우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고 석불, 석탑이 각 1천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천사도 산명이 천불산이다.

 

 

 

 

 

 

 

 

 

 

 

 

 

 

광주민학회 영산강유적조사3-드들강과 운주사- 답사 자료집(1909.04.15)

당시 연구간사(뒤에 기획위원) 역을 하면서 간략하지만 많은 자료를 담으려 하였다. 진행중에는 설명까지 주로 하였다. 답사기는 <금호문화>에 실었고, 뒤에 답사기 모음집으로 간행되었다. 답사기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썼는데, 1990년 영산강유적조사 형식으로 연속답사를 할 때에는 5회를 계속 썼다. 명의는 달리했다. 연구간사(김희태)와 간사(박순천) 명의로 각 2회, 제3자나 명의로 1회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