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78
충효 실천의 사적지, 양건당 황대중 정려 유적
-충효의 양건이여 백세토록 높고도 높으리 / 忠孝兩蹇 百世高仰-
김희태
강진 황대중 정려유적(康津 黃大中 旌閭遺蹟)이 2024년 8월 1일 전라남도 기념물[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514-1번지 일원에 있다. 문화유산 지정 가치와 황대중의 행적을 소개한다.
황대중 정려유적은 의병장 황대중(1551~1597)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1795년(정조 19)에 국가 명정(命旌)으로 건립된 충효정려, 임진왜란 당대에 조성한 의마총 구역, 묘소에 세웠던 묘갈명비(1900년 건립) 등 일괄 유적이다. 정려와, 의마총구역, 묘갈명비 등 일괄 유적 ‘사적지(史蹟地)’인데 ‘정려’를 중심으로 하여 ‘정려유적’으로 국가유산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황대중장군은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며, 1795년(정조 19) 어사(御史) 정만석(鄭晩錫, 1758~1834)이 조정에 알려 나라에서는 정려를 명하여 건립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등 관찬기록에 국가 명정 기록이 확인된다. 정려각은 1894(고종 31)년과 1907년에 중수하였다.
양건당 황대중 정려각은 조선시대 지배이념인 유교정신의 실천과 현창, 전승이 이어지고 있는 역사 유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황대중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려는 다른 사람들의 정려와는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점도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은 황희(黃喜, 1363~1452)의 5대손으로 1551년(명종 6) 아버지 황윤정(允禎)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황대중은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내어 약재로 사용하였고 그래서 그가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효건(孝蹇)이라고 불렀다.
신체적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활약하였다. 황대중은 왜적으로부터 강진을 지키자는 금릉창의(金陵倡義)에 참여한다. 강진은금릉의 별호이다. 왜란의 변보가 있자 김억추가 동향의 황대중, 윤현, 이준 등에게 글을 보내어 “강진은 곧 해로로 통하는 인후이니 급히 의병을 일으켜 성산에 결진하여 적의 침입로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황대중의 문집 양건당문집에 금릉창의에 참여한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황대중 등이 곧바로 강진 객사(客舍)에 의병청을 설치하여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인근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그리하여 의사들이 봉기하여 의곡을 원납하는 사람들이 자못 많았다. 강진 외에 영암⋅해남⋅나주 사람들도 합류했다. 이렇게 모인 의병들은 각자 흩어져 고경명이나 김천일 의병진에 소속하거나 관군 또는 수군에 참전하기도 했다.
황대중은 1593년(선조 26) 종형(從兄) 황진(黃進, 1550~1593)과 진주전투에 참전하다 나머지 다리에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 “효건(孝蹇, 효성의 절름발이)이 이제 충건(忠蹇, 충성의 절름발이)이다.”라는 찬탄을 받았다. 황대중은 효와 충을 모두 지킨 충신으로 양건당(兩蹇堂)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불편한 양쪽 다리를 한 채 황대중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전라병사 이복남과 함께 남원전투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아 순절하였다. 황대중이 전투 때마다 항상 함께하고 아끼던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남원전투에서 순절한 주인의 시신을 말 등에 얹었다. 그러자 이 말은 주인을 태우고 300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강진까지 달려온 뒤 고개를 떨구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3일 뒤 결국 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5년 황대중은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795년 장애인 황대중의 충과 효에 대한 행적을 호남 암행어사 정만석이 표창해 주기를 청하자 1795년(정조 19) 정려를 하사받았다. 정만석의 서계와 명정 과ㅏ정의 사료를 인용한다.
○ 강진의 고(故) 참봉 황대중은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5대손입니다. 부모가 병이 났을 때에 허벅지 살을 베어 달여 드려서 효험을 보았지만 그 일로 왼쪽 다리를 절게 되어 사람들이 ‘효건(孝蹇)’이라고 불렀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난리를 당하자 쇠를 제련하여 강철을 만들고 또 산 밑에서 말 한 필을 얻어 타고는 평양까지 쫓아가 호종하였습니다. 계사년(1593)에는 통제사 이순신의 종사관이 되어 진주 전투에 참여하여 뛰어난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때 적의 탄환에 맞아 또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세상에서는 또 ‘충건(忠蹇)’이라고 불렀습니다. 뒤에 남원 전투에 참여하여 힘껏 싸우다가 순절하였는데, 죽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검을 주면서 “이 칼로 왜적 천 명을 찌른 다음 내 시체를 염하여 내 말에 실어 주면 말이 혼자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言]대로 말이 혼자 300리를 걸어서 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 1585~1657, 전라도관찰사)와 이여(李畬, 1645~1718, 영의정), 그리고 중신 서성(徐渻, 1558~1631, 암행어사)과 이명한(李明漢, 1595~1645)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충·효를 드러내어 찬탄한 기록이 있어 이 일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래되면서 사실이 희미해져 포상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실로 성조(聖朝)에 흠이 되는 일입니다.(<일성록>, 정조 19년(1795) 5월 22일 壬申.)
○ 강진의 고 참봉 황대중에게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강진의 고 참봉 황대중은 충과 효를 모두 갖추었는데 아직도 정문(旌門)을 세우고 증직하는 일을 미루고 있는 것은 흠이 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정려하는 은전을 시행하라.(<일성록>, 정조 19년(1795) 5월 28일 戊寅.)
○ 강진의 고 참봉 황대중과 영암의 신술현(愼述顯)에게 정려(旌閭)해 주었다. 어사 정만석이 표창해 주기를 청하자 특별히 시행한 것이었다.(旌康津故參奉黃大中、靈巖 愼述顯閭, 御史鄭晩錫請褒奬特施(<정조실록> 권42, 정조 19년 5월 28일 戊寅).)
이처럼 황대중은 효자, 임진왜란 순절자로 1795년에 충효정려를 받았다. 이순신 종사관 운운의 기록은 검토가 필요하지만, 일성록, 호남절의록에 황대중의 남원전투 참전과 순절, 의마(義馬)의 이야기는 전하고 있다. 장애우로서도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사례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우리역사 속 장애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양건당 황대중은 콘텐츠화되어 있다. 효자이자 충신인 장애인 황대중과 말무덤의 스토리는 강진의 역사자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강진에서 임진왜란 참전 순절자로 조선시대 정려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 황대중이다. 이는 강진과 임진왜란의 역사적 흐름 안에 강진 인물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임진왜란 관련 강진인물은 34인이다. 한 도(道)에서 순절한 인물은 8인, 한 도에서 거의한 인물은 6인, 이순신과 참좌한 인물은 6인 등이다. 황대중과 마응방은 전라병사 이복남과 함께 남원성전투 순절자로 기록되어 있다. 34인 중 1795년(정조 19) 조정으로부터 명정된 인물을 황대중이 유일하다.
황대중은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塚)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남원 백성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셨고, 1612년(광해군 4) 사우를 건립하였다. 무덤은 ‘만인의총’, 사우는 1653년(효종 4)에 사액을 받아 충렬사라 하였다. 남원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 때 남원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 의사(義士)들의 호국의 얼을 모셔놓은 곳이다. 남원 만인의총 (南原 萬人義塚)은 1981년 국가지정 문화유산 사적[제272호]으로 지정되었다.
1612년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으며, 1675년(숙종 원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 1836년(헌종 2) 사헌부지평 오흥업을 추배하여 8충신이 되었다. 그러다 1871년(고종 8) 훼철령에 따라 사우가 훼철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다. 그러나 일제가 제단을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시켰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우를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64년 남원시민들이 주도하여 현 위치에 이전하였다.
남원 충렬사의 봉안 인물 56인은 김경로, 강덕복, 김라복, 김렴, 김부, 김수연, 김응배, 김충남, 마응방, 문기방, 문명회, 박계성, 박기화, 박은종, 서정[진]수, 손공생, 송상장, 송약선, 송진부, 승국한, 신호, 양대박, 오동량, 오욱, 오윤업, 오응정(吳應井), 오응정(吳應鼎), 오흥업, 윤의, 이덕회, 이복남, 이용제, 이원춘, 이춘풍, 이평형, 이해, 임박, 임현, 임혼, 조언호, 조익겸, 전응협, 정기원, 정민득, 최보의, 최준, 태귀생, 태색, 태시경, 태구[우], 태천생, 형련, 김억명, 김억룡, 김억호, 황대중이다. 56인 가운데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록에 책록되면서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은 황대중이 유일하다.
황대중은 정유재란 때의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남원성 전투는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오기 위해 대공세를 퍼부어 남원성을 함락시키며 1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이다. 이때 황대중이 적탄에 맞아 순절하자, 장군의 애마가 눈물을 흘리며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본 병사들이 황 장군의 유해를 거두어 애마의 등에 태워주었다. 말은 적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길을 달려 강진 작천면 구상 마을 황대중장군 고향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굿간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가 황장군 장례가 끝난 3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를 본 유족과 주민들은 말의 시신을 황장군 무덤 근처에 묻어 주었다. 구상 마을 앞에 있는‘ 양건당애마지총’이다. 말무덤으로 가는 고개라는 뜻의 마총등(馬塚嶝)이라는 지명도 전해오고 있다.
정려는 1795년에 명정되어 건립하였고 1894년과 1907년에 중수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로수장 민도리 형식으로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소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팔작지붕으로 위계를 갖추고 있다.
정려각 내부에는 명정 편액(1795년, 忠臣孝子 行貞陵參奉黃大中之閭), 1798년 정려기 편액(이민보), 1894년 명정 편액(증직, 忠臣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行貞陵參奉黃大中), 1894년 정려현판중수기 편액[최익현 찬], 1907년 정려중수기 편액(정의림 찬, 황공정려중수기)의 총 5매가 걸려있다. 건물의 초창은 명정과 함께 1795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건물 자체에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며, 이후 1907년에 중수가 있어 현재의 건물은 중수 이후의 건물로 볼 수 있다.
정려는 여러 편액에 따라 건립과 수리의 내력을 알 수 있으며, 이민보, 기우만, 정의림 등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 일성록의 관찬 기록이 전하고 있어 양건당 황대중 인물의 역사성과 명정 기록 등으로 정려건축의 역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황대중의 묘갈명비는 정려와 같은 경내에 있다. 이 묘갈명은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었고, 제액(題額) 전서(篆書)는 문충공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1561~1637)의 전서 글씨를 집자하였다. 비문 글씨는 안창복(安暢復)이 썼다. 1900년[숭정 기원후 오경자] 4월에 건립하였다. 구대손 동립(東立) 문장(門長) 학율 정묵(學律 程黙) 유사(有司) 경현(景炫) 십일대 종손 백현(伯顯)이 건립을 주도하였다.
묘갈명비는 1592년과 1597년 임진 정유재란 참전 기록, 1894년 증직 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황대중의 인적 사항과 선대의 세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명문을 지었다. 특히 남원성 전투의 실상을 세세히 표기하여 기록사료로서 의의가 크다. 묘소는 정려가 있는 구상마을 뒤에 있다. 명문(銘文)을 소개한다.
몸 바친 건건함이여 匪躬蹇蹇[비궁건건]
《대역》이 드리운 상이네 大易垂象[대역수상]
충효의 양건이여 忠孝兩蹇[충효양건]
본받아 권장하였네 式勸以奬[식권이장]
삼백 년 흘러 垂三百年[수삼백년]
비로소 공과 상이 드러났네 始闡功賞[시천공상]
날래고 사나운 공이 있어 矯矯有公[교교유공]
나라의 의장이 되었네 邦國之仗[방국지장]
충과 효에 정려하고 旌忠旌孝[정충정효]
충렬사에서 제향되었네 忠烈醊享[충렬철향]
지금은 또 어떤 날인가 今又何日[금우하일]
왜적이 횡행한다네 黑齒搶攘[흑치창양]
구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九原有作[구원유작]
망량들을 물리칠 수 있으리 可廓魍魎[가곽망량]
아! 아득히 멀구나 嗚呼邈矣[오호막의]
다만 더욱 아득히 생각할 뿐이라네 祇增緬想[기증면상]
성산의 가파름 星山崢嶸[성산쟁영]
백세토록 높고도 높으리 百世高仰[백세고앙]
학술 보고회(시문학관, 2021.09.30)
현지 조사(2019.09.15) - 황의봉 어르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려각을 둘러보며 지극정성으로 관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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