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77 - 작은 뜰 단풍 잎에 비 내리고, 백련사를 찾은 이들이 남긴 시문

향토학인 2024. 12. 27. 01:39

인지의 즐거움377

 

작은 뜰 단풍 잎에 비 내리고, 백련사를 찾은 이들이 남긴 시문

 

김희태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혜일·성임·김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강진현 불우조 백련사(白蓮社)항에 혜일(慧日), 성임(成任, 1421~1484), 김뉴(金紐, 1436~1490)의 시가 실려 있다. 모두 4수로, 혜일의 시가 2, 전인(前人)으로 표기된 시 1, 그리고 성임과 김뉴의 시이다.

 

혜일이 두 번째 백련사를 들렀을 때의 시를 보면, 어느 해 가을 지금쯤인 듯 싶다. ‘작은 뜰에는 단풍 잎에 비 내리고[小庭紅葉雨]’라 읊었다.

 

머물고 떠나감이 다만 인연에 달렸으니 去住但隨緣(거주단수연)

도 한 해를 이럭저럭 보내고 騰騰又一年(등등우일년)

작은 뜰에는 단풍 잎에 비 내리고 小庭紅葉雨(소정홍엽우)

고요한 방에서는 백단향의 연기로다. 靜室白檀煙(정실백단연)

평상이 차가와 새벽 공부 게으르고, 榻冷慵晨課(탑랭용신과)

창은 밝은데 낮잠이 오네. 窓明得午眠(창명득오면)

어찌 늙은 눈으로, 豈期垂老眼(기기수노안)

다시 백련사를 볼 줄 기약하였겠나. 復對社中蓮(복대사중련)

 

전인으로 읊은 이가 표기된 시는 만경루(萬景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는데 풍경소리만 절로 난다. 시절은 봄인 것 같다.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는데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客來聞磬聲 鳥向花間鳴]라 하였다.

 

백련사 경치도 좋고, 白蓮名社勝(백련명사승)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萬德一山淸(만덕일산청)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門靜鎖松影(문정쇄송영)

객이 와서 풍경 소리 듣는구나. 客來聞磬聲(객래문경성)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帆從海上去(범종해상거)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鳥向花間鳴(조향화간명)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坐久忘歸路(좌구망귀로)

티끌 세상 전혀 생각 없네. 殊無塵世情(수무진세정)

 

성임은 절 문 동쪽에는 숲이 짙게 붉어라[深紅萬樹寺門東]‘라 읊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살이 바다 너머 비추니 백련사 입구 숲이 붉게 보였음일까. 아니면 붉게 핀 동백 숲의 경관을 반조함일까.

 

 

찬 바람 찬 눈 속에 꽃이 피니 花發嚴風朔雪中(화발엄풍삭설중)

절 문 동쪽에는 숲이 짙게 붉어라. 深紅萬樹寺門東(심홍만수사문동)

사시에 봄빛을 홀로 차지하였으니 四時獨占三春色(사시독점삼춘색)

조물주도 여기서는 공평치 못하구나. 造物於今却未公(조물어금각미공)

 

성임은 조선전기 전라도관찰사(1464), 형조판서(1466), 공조판서(1471), 지중추부사(1466, 1482)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안재(安齋)이다. 1447년 식년 문과(병과) 급제했다. 신숙주의 추천으로 성균관에서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식견이 풍부하며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다. 중국의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모방하여 고금의 이문(異聞)을 수집, 태평통재(太平通載)를 간행하였다. 문집으로 안재집(安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김뉴는 명월루에 올랐다. 멀리 바다를 돌아보면 한나절동안 다과 속에 시편이 흥겹다.

 

명원루 높아 눈앞이 새로우니, 明遠樓高眼界新(명원루고안계신)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겨울이네. 遙看滄海鏡無塵(요간창해경무진)

울 옆의 긴대 바람에 소리내고, 倚墻脩竹風前響(의장수죽풍전향)

난간 앞의 그윽한 꽃 눈속의 봄이라. 近檻幽花雪裏春(근함유화설리춘)

나그네 시 읊어 시편(詩篇)은 흥겨운데, 客子詩篇堪遣興(객자시편감견흥)

중은 다과를 내어 사람을 만류하네. 山僧茶果鮮留人(산승다과선류인)

한나절 동안 놀다 돌아오니, 登臨半日還歸去(등림반일환귀거)

이로부터 구름안개 꿈속에 자주 드네. 從此雲嵐入夢頻(종차운람입몽빈)

 

김뉴는 조선전기 전라도경차관(1365), 이조참판(1480)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이다. 1464(세조 10) 춘장 문과(병과) 급제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해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室錄)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가 컸다. 1470(성종 1) 완성 단계에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교하였다.

 

깊은 밤 댓가지가 바람에 일어나, 전라도 관찰사 구봉령

 

전라도 관찰사 구봉령도 만덕사를 찾는다. 만덕사 스님의 시축에 차운한 오언율시(五言律詩)가 그의 문집인 백담집 속집(1)에 있다.

 

만덕사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다(萬德寺僧軸次韻)

 

금능[강진 별호]의 만덕사 金陵萬德寺(금릉만덕사)

빼어난 경치 소문 그대로라네 奇絶愜前聞(기절협전문)

일천 봉우리 달은 바다 빛이고 海色千峯月(해색천봉월)

일만 골짝 구름은 가을빛이네 秋光萬壑雲(추광만학운)

지은 시 영취[부처]에 부끄럽지만 題詩愧靈鷲(제시괴영취)

소원 이루려 홍군에게 청해보네 如願乞洪君(여원걸홍군)

깊은 밤 댓가지가 바람에 일어나 半夜竹枝起(반야죽지기)

그 소리 아득히 북두성을 흔드네 響搖星斗文(향요성두문)

 

소원 이루려 홍군에게 청해보네[如願乞洪君]는 신에게 빌어 본다는 말이다. 홍군(洪君)은 팽택호(彭澤湖)의 수신(水神)인 청홍군(靑洪君)을 말한다. 그에게는 인간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여원(如願)이라는 비녀(婢女)가 있었는데, 구명(歐明)이라는 사람이 청홍군에게 여원을 달라는 청을 하여 얻은 뒤에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수신기(搜神記)에 나온다.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은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순행차 강진현에 왔다가 만덕사를 들른 것 같다. 구봉령은 1583(선조 16) 6월부터 15844월까지 열달간 전라도관찰사를 지낸다.

 

성근 개똥벌레 어지러운 풀에 붙었고, 석주 권필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백련사에서 밤에 앉아 회포를 쓰다(白蓮寺夜坐書懷)오언율시와 백련사. 정덕용과 임자신을 방문하다(白蓮寺 訪鄭德容 林子愼)오언절구 2수를 남긴다.

 

백련사에서 밤에 앉아 회포를 쓰다 (白蓮寺夜坐書懷)

 

절은 고요해 중은 막 선정에 들고 院靜僧初定(원정승초정)

산은 맑으니 달빛이 더욱 많아라 山晴月更多(산청월갱다)

성근 개똥벌레 어지러운 풀에 붙었고 踈螢依亂草(소형의란초)

어둑한 새는 깊은 가지에 모였어라 暗鳥集深柯(암조집심가)

씩씩하던 뜻은 외로운 검만 남았고 壯志餘孤釰(장지여고일)

곤궁한 삶의 시름에 단가를 부르노라 窮愁且短歌(궁수차단가)

서울에는 형제들이 있건만 京華有兄弟(경화유형제)

소식이 어떠한지 모르겠구나 消息定如何(소식정여하)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백련사 강학과 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 1655~1723)백련사어록 은 강진의 인문학 유산으로서도 중요하다. 백련사어록(白蓮社語錄)1689(숙종 15) 218일께 광주에 있던 선암역(仙巖驛)에 도착한 우암 송시열을 맞이하여 강진 백련사에서 강론과 수창을 하는 229일까지 기록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바 있다. 백련사에서 스승과 제자가 화운한 시를 읽어 보자.

 

백련사에서 우암 노 선생과 헤어지다(白蓮寺奉別尤菴老先生)(박광일, 손재집1)

 

장기의 가시울타리 속 처음 제자되어 蓬山棘裏始摳衣(봉산극리시구의)

이때부터 소생은 가르침을 받았지요 從此愚蒙荷指揮(종차우몽하지휘)

오늘 뗏목 타고 바다로 떠나시는 자리에 此日乘桴浮海處(차일승부부해처)

책 싸 들고 함께 가지 못해 한스럽네요 携書恨不得同歸(휴서한부득동귀)

 

만덕사에서 박생[광일]의 시에 차운하다(萬德寺次朴生[光一])(송시열, 송자대전2)

 

당년의 장한 뜻은 갑옷 차림하고서 當年壯志鐵爲衣(당년장지철위의)

창 잡아 해 향해 내두르려 했었지 擬把金戈向日揮(의파금과향일휘)

임금수레 홀연 하늘나라로 떠났으니 龍馭忽然天上去(용어홀연천상거)

울며 남긴 편지들고 고향에 돌아갔다네 泣將遺札故山歸(읍장유찰고산귀)

 

창 잡아 해 향해 내두르려 했었지[擬把金戈向日揮]는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노양공(魯陽公)이 한()나라와 싸우는데 해가 저물자 창을 잡아 휘두르니 해가 90리를 물러났다는 말이 있다. 공시집(公是集)에 나온다.

 

저 헤어짐을 뒤로 그분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송시열은 백련사를 떠나 제주도로 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1689년에 67일 정읍에 도착하여 8일 후명(後命,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그래도 강진은 송시열의 종강지지(終講之地)로 이어진다.

 

만덕사에서 노닐고 김생(金生)의 필적을 보다, 홍양호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강진현감으로 부임하는 조홍진에게 보내는 송서(送趙學士寬甫[弘鎭]之任康津序)나는 일찍이 탐라에 곡식을 운반하는 일로 사명을 받들고 강진과 해남 사이에 가서 도솔암(兜率菴)에 오르고 한라산 안개를 바라보며 만덕사(萬德寺)에서 노닐고 김생(金生)의 필적을 보았다. 토지는 비옥하여 백곡(百穀)이 빨리 익고, 산에는 시랑(豺狼)과 범이 없고 나무에는 동청(冬靑)이 많으니 남쪽 지방의 낙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믿을만 하였다.”라 하여 만덕사에 들른 내용이 나온다.

 

조홍진(1743~1821)의 본관은 풍양(豊陽), 자는 관보(寬甫)이다. 1783(정조7)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강진 현감에 제수된 것은 1796(정조20) 1220일이다. 정조는 괴산 군수 조홍진과 강진 현감 송문술(宋文述)을 상환(相換)하고, 조홍진은 표류인 문제의 처리를 위해 즉시 사조(辭朝)하도록 하였다.

 

절 다락 당도하니 내 집과 같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백련사와 바로 이웃한 다산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다산학이 집대성된 곳이기도 하다. 18년간(1801~1818)의 강진 유배살이 가운데 네 번째 거처인 이곳에서 보내면서 아암 혜장 등 스님들과 백련사를 오가면서 교유와 강론을 한다.

 

다산시문집(5)에 나오는 산행잡구(山行雜謳)20[318] 가운데 동백나무, 김생 글씨, 이광사 편액, 사적비를 시어로 삼은 부분을 옮긴다.

 

산길 걸어 피곤하던 참에 山路行方困(산로행방곤)

절 다락 당도하니 내 집과 같네 禪樓到似家(선루도사가)

야들야들 누른 잎 나무들이 嫩黃千萬樹(눈황천만수)

교교한 꽃보다 훨씬 더 낫네 全勝寂蓼花(전승적료화)

 

언덕 여기저기 동백나무들 夾岸山茶樹(협안산다수)

아직도 더러더러 붉은꽃이 보이네 猶殘睕晩紅(유잔완만홍)

어떻게 해야 비단장막을 가져다가 那將錦步障(나장금보장)

연화풍 못 들어오게 막아볼까 遮截楝花風(차절련화풍)

 

문에 주련은 김생의 글씨이고 門帖金生筆(문첩김생필)

누각 현판은 도보가 쓴 것인데 樓懸道甫書(누현도보서)

세대가 멀어 가짜일까 의심하지만 世遙疑有贋(세요의유안)

무게있는 그 이름 허전이 아니라네 名重覺無虛(명중각무허)

 

옛날 비는 왜놈이 깨버렸어도 倭奴昔破碣(왜노석파갈)

공자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지 公子尙留名(공자상류명)

구슬퍼라 구리용으로 장식한 문에 惆悵銅龍闥(추창동용달)

왕의 형이요 부처 형도 된댔었는데 王兄做佛兄(왕형주불형)

 

사적비 부분에서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만덕사에 가 논 일이 있어 드디어 그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고 기적비를 세워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그 비가 깨지고 전해지지 않았으며, 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효령에게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으면 부처의 형이 될 것이다." 하였음이라는 세주가 있다.

 

도보(道甫)는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자이다. 영조 시절 손꼽히던 서예가로서 자기 호()를 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김생의 필적에 대해서 다산은 위 신라 김생(金生)의 글씨는 불경 중에서 오려낸 것이다. 각본(刻本)의 김생 글씨는 모두 가늘고 힘차며 빼어났는데, 이 글씨는 획이 매우 통통하니 아마 변한 서체일 것이다. 감별하는 자는 이 점을 살피기 바란다. 무진년(순조 8, 1808) 5월에 열수산인(洌水散人)은 발한다. 전번에 발을 쓸 때도 의심하였었는데, 지금 다시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경오년(1810) 7월에 쓴다.[右新羅 金生書于佛乘中割取者也刻本金生書皆瘦勁峭拔此書肥澤特甚盖其變相也賞鑒者審焉洌水散人跋戊辰中夏前跋固已疑之今日再觀猶然庚午首秋題]”는 감식견을 남긴다. <다산시문집>(14)에 있다.

 

대웅보전 안에 걸린 萬德山 白蓮社편액을 두 번이나 보았던 것 같다. 그 편액에는 新羅聖德王時 金生筆蹟 此寺千幾百年傳來 更爲水墨塗粉 此片缺虧遺感千萬耳[신라 성덕왕 때 김생의 필적이 이 절에 천몇백 년을 전해와 다시 먹을 칠하고 흰색을 발랐다. 이 판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 몹시 유감일 뿐이다.]’는 글이 덧대진 판에 있다.

 

백련사 원경(2020.03.06., 사진 마동욱)

만덕산 백련사 편액(대웅보전)

백담집(구봉령)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불우조 백련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