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75 - 1690년대의 강진 한천동과 영모당-『지암일기』를 통해 본 보물 영모당-

향토학인 2024. 12. 26. 10:19

인지의 즐거움375 -

 

1690년대의 강진 한천동과 영모당

-지암일기를 통해 본 보물 영모당-

 

김희태

 

강진 해남윤씨 영모당(永慕堂)1990224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가, 20221125일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영모당은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8세 윤광전(尹光琠)선생과 9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 형제 등 세 분의 제향을 하는 재실로 1687년에 건립되었다. 1737년에 중건되었고, 1813년에 크게 수리되었다.


영모당은 전체가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 정면 5, 측면 2칸 규모의 강당(講堂)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실(齋室) 건축 형식의 하나인 강당형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문화재)은 지금 남아 있는 유산의 유형적 특징을 주로 평가하지만, 그 건조물이 있게 된 내력과 전승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도 중요하다. 건립 이후 장기 지속으로 운영되고 유지되었던 사람과 공동체, 자료를 함께 평가한다는 것이다. 해남윤씨 영모당은 1690년대 건립 이후 종중의 일과 향촌사를 처리하는데 있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687년에 건립된 영모당의 운영에 대해서는 1690년대의 지암일기(支庵日記)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일기는 덕정동 추원당 건립을 주도한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손자인 지암 윤이후(支庵 尹爾厚, 1636~1699)가 기록한 것이다. 1692(숙종 18) 11일부터 1699(숙조 25) 99일까지의 일기이다. 영모당과 관련된 한천(寒泉)”, “천동”, “귀라(貴羅)” 등이 언급된 일기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자.

 

지암일기탈초·표점본(전남대호남한문고전연구실, 2012)과 국역본 윤이후의 지암일기(윤이후 지음, 하영휘, 문숙자 외, 2020) 출판되었다. 웹사이트 지암일기支菴日記-데이터로 다시 읽는 조선시대 양반의 생활에서 자료를 제공된바도 있다.

 

지암일기한천지명이 처음 보이는 것은 169245(양력 : 1692.05.20)이다. “한천의 생원 윤정미(尹鼎美)가 들렀다.”는 기록으로 한천에 사는 윤정미가 윤이후를 만나러 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692511일조에는 안형상(安衡相)과 함께 관음사를 갔는데 한천의 윤선오(尹善五)가 큰아들 정미(鼎美), 사위 이홍임(李弘任), 조카 주미(周美)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한천의 족숙 윤상미(尹尙美)(1692717), 족숙 윤주미(1692727) 등의 내방 등 기록이 이어진다. 이처럼 한천에는 해남윤씨 종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94816일조에는 한천의 문장이 왔다.”라 하여 한천의 문장이 윤이후를 만나러 왔음을 알 수 있다. 1695225일조에는 한천의 문장이 생꿩 1마리를 보냈다(寒泉門長送生雉一首).”라 하여 윤이후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1. 한천동의 문장(門長) 배알

 

해남윤씨 강진 세거지의 한곳인 한천동의 문장은 각지의 종중인들이 인사를 드리는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문장을 배알하러 온 종인들은 당연히 영모당을 들렸을 것이다.

 

한천에 가서 문장을 배알했다.(1692727)(往拜寒泉門長)

 

귀라리의 문장이 서흥(瑞興)의 종마(從馬)로 내일 식솔을 다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다기에 아침 식사 후에 가서 인사드렸다.(1692823)(貴羅里門長以瑞興從馬明日捲率上京 朝後往拜)(이하 한문 원문은 생략함.)

 

한천의 문장(門長)을 찾아 뵈었다.(169721)

 

한천 평촌(坪村)의 문장을 가서 뵈었다.(1697821)

 

흥아(興兒, 윤흥서)를 데리고 한천의 문장께 가서 문안드렸다.(1699년 윤712)

 

2. 문사와 묘사, 족계

 

영모당은 종중의 여러 문사(門事)와 묘사(墓事)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행당공 윤복의 비문을 판서 권유(權愈)에게 부탁하러 떠나는 내용이 나온다. 이같은 결정을 하기 위한 회의 장소가 영모당이었을 것이다. 현손인 윤주미(1641~1698)는 행당공 윤복의 현손으로 권유(1633~1704)에게 신도비명을 받았다. 이 신도비는 1698년경에 처음 건립한다.

 

이 신도비는 1822년에는 9대손 귤원 윤규로(1769~1837)가 전서를 쓰고 10대손 윤종겸(1793~1853)이 원래의 비문을 쓰고 추기하여 강진군 도암면 용흥리 산 23-23 일원에 신도비를 세운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03(2002. 4. 20 지정)이다. 2024년에는 재실 영모당도 함께 지정되었다.

 

그리고 문장 일가 묘 아래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지관으로 보이는 이가 문장의 선묘에 올라가는 기록도 보인다. 이들 논의의 장소가 영모당이었을 것이다. 1695년 봄에는 한천, 용산, 강성에 사는 사람 10여명과 계를 만드는데 그 회합장소도 영모당이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귀라리(貴羅里)의 족숙 윤상미 형제를 둘러 방문하니, 이홍임(李弘任), 양대진(楊大振), 윤경(尹儆), 윤칭(尹偁), 윤척(尹倜) 등 여러 사람이 와서 모였다.(1693112)

 

윤천우(尹千遇)가 왔다. 을해년(1695) 봄에 한천, 용산(龍山), 강성(江城)에 사는 10여명의 사람들과 계()를 만들었으나 화합되지 않은 일이 많아서 바로 그만두었었다. 그 가운데 윤석귀(尹錫龜)와 윤천우는 계원이 많으면 으레 이렇게 된다며, 나와 다시 계를 만들기를 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따르고 윤석귀, 윤천우와 하계(下契)에 이 마을사람 10여명을 그대로 유지하여 계를 하였다. 봄에 황원(黃原) 사람에게 조석(租石)을 나눠주고, 보리로 바꿔서 이윤을 낼 터전으로 삼았는데, 어제 황원 사람이 보리를 싣고 와서 정박했는데, 두 윤씨와 하계의 사람들이 뱃머리에서 보리를 나눌 때 자못 불편한 일이 있었다. 초장부터 이러하니 앞으로의 폐단은 헤아릴 필요도 없다. 나는 계에서 나오겠다는 의사를 윤천우에게 말했다. 계원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다.(1697614)

 

해가 나올 즈음 출발하여 문장이 앞장서서 천동(泉洞)에 이르렀다. 박선교(朴善交)가 문장의 선묘(先墓)에 올라가 보았다.(16971122)

 

들으니 한천의 윤주미 족숙이 행당공(윤복)의 비문을 판서 권유(權愈)에게 부탁하러 오늘 서울로 떠난다기에, 편지를 부쳤다.(1698421)

 

돌아가는 길에 천동(泉洞)에 들러 들어가니, 문장(門長) 일가가 마침 묘아래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또 신래(新來)를 불러 한참동안 앉아서 이야기하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16951119)

 

3. 초례와 도문연(到門宴)

 

영모당은 종종과 마을의 공회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암일기에는 귀라리와 천동에서 도문연과 초례를 하는 내용이 보인다. 이 장소가 영모당일 것 같다.

 

도문연(到門宴)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고향집에 돌아와 친지들을 초청하여 베푸는 잔치이다. 문희연(聞喜宴)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초례(醮禮)는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 절하고(교배례), 서로 합환주를 마시는(합근례) 혼례의식이다.

 

태인 현감 류명철(柳命哲)이 그의 아들을 데리고 귀라리에 와서 어제 초례(醮禮)를 치루고 오늘 가는 길에 들러 방문했다. 대개 벗 류명철(柳命哲)이 그 맏아들을 위해 혼처를 구하자 내가 죽은 생원 윤치미(尹致美) 집에 그것을 말했었다. 그래서 오가면서 혼사를 의논하고 정하여 이루어진 것이다.(169433)

 

나는 아내(室人)와 학동(鶴同) 어멈, 흥서(興緖)와 함께 천동의 도문연(到門宴)에 갔다. 내가 천동(泉洞) 밖에 이르러서 신래(新來)를 불러 막 진퇴를 시키려고 할 때, 병영의 우후(虞候) 황형(黃炯)이 뒤늦게 와 그를 부르기에, 그에게 맡기고 연회자리로 들어갔다. 저녁 무렵에 모두 돌아왔다.(16951116)

 

4. 한천동 방문인의 거처

 

한천동에는 종중인은 물론 전라병영의 우후나 별장 등 외지 관원이나 선비들도 많이 방문을 한다. 이들 방문인들의 거처가 영모당으로 보인다. 전라병영은 인근 강진에 있었는데 우후는 각 도의 병영과 수영에 두었던 무관 벼슬아치이다.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막료로서 아장(亞將)이라고도 하는데, 병마우후는 종3품이다.

 

지원(智遠)이 얼마 전 그의 모친을 데리고 와서 귀라리에 모셨는데, 오늘 여기로 데려왔다.(169524)

 

병영(兵營)의 우후(虞候)가 한천에서 역방했다.(16951117)

 

청계(淸溪)의 생원 윤세미(尹世美)가 그의 부인과 며느리를 데리고 한천에서 돌아가는 길에 역방했는데, 응병(應丙)도 함께 왔다.(16951118)

 

김 별장(別將)이 한천의 평촌(坪村)에 갔다.(1698811)

 

정미(鼎美)씨와 함께 평촌으로 돌아왔다. 문장이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16989월 지난번 만덕사(萬德寺) 모임에서 윤척(尹倜)과 윤간(尹侃)이 오늘 또 모이자고 약속을 정했는데, 오늘 아침에 편지를 띄워 초청했다. 아침 식사 후 흥아(興兒), 지원(智遠)을 데리고 평촌의 문장 댁으로 갔다. 화촌(花村)의 안형상(安衡相)이 문장의 초대로 이미 와 있었다.(1698106)

 

손생()이 어제 문장의 만류로 평촌에서 묵고, 오늘 칠양(七陽)으로 발길을 돌렸다.(169914)

 

앞으로 저 일기상의 일들을 포함하여 영모당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사람과 자료를 모아가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당시 방문했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 보는 것, 영모당에 들렀던 사랍들의 후손을 찾아 보고 서로 교류하는 것, 초례와 도문연의 후일담, 용산과 강성 사람들이 한천과 함께 참여해 만들었다는 계 관련 자료도 찾아 보자는 것이다.

영모당은 선현 제향을 위한 문화공간이라 할 것이다. 제향을 마치고 종중 대소사는 물론 향촌사도 논의하였다. 1690년대 처음 건립 직후의 기록인 지암일기를 통하여 영모당의 활용 내력을 알 수 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기록과 그 전통이 지속은 보물 승격 지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 평가를 받았다. (사진 2019.10.08.)

강진현지도(1872, 규장각 소장)波之大面 泉洞里. 영모당이 있는 천동리는 한천동(寒泉洞)으로 부르며 해남윤씨 도선산이 있는 세거지이다. 1914년에 파지대면은 백도면, 보암면과 합해져 도암면이 되고, 천동리는 계산리, 귀라리와 합해져 귀라리가 된다. 오늘날의 행정지명 도암면 귀라리 천동마을이다.

한천동 영모당 관련 기록유산

영모당 제향(2019.10.08.)

윤이후(1636~1699)지암일기한천동(천동, 귀라리)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