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55 - 이희(李墍) 부사, 1583년 10월 대사헌에서 부사로 부임, 청백리 녹선, 장흥도호부사 기념비군

향토학인 2024. 6. 30. 20:14

인지의 즐거움355

 

장흥도호부사 기념비군, 1585~1888년 사이 13

이희(李墍) 부사, 158310월 대사헌에서 부사로 부임, 청백리 녹선

 

김희태

 

장흥도호부사 기념비군은 조선시대 장흥도호부의 지방관인 도호부사의 선정비이다. 이 비군은 1585년경 건립한 이희 부사 선정비부터 1888년 건립한 민영직 부사의 불망비까지 13기로,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행적과 공적을 알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장흥 향교 입구 외삼문 앞에 있다.

 

부사 이희(李墍, 1585?, 1583.10~1585.03 재임)

부사 김희(金憙, 1628?, 1625.05~1627.11 재임)

부사 이수창(李壽昌, 1652?, 1650.02~1652.02 재임)

부사 심진(沈榗, 1728, 1702.06~1704.09 재임)

부사 황간(黃幹, 1783, 1776.12~1778.12 재임)

부사 이형재(李亨在, 1841, 1825.08~1827.07 재임)

부사 신재익(申在翼, 1841, 1833.05~1836.06 재임)

부사 박현규(朴顯圭, 1848, 1843.07~1845.05 재임)

부사 조연명(趙然明, 1852, 1845.05~1847.07 재임)

부사 김기석(金箕晳, 1852, 1848.02~1849.06 재임)

부사 이학래(李鶴來, 1882, 1880.07~1882.12 재임)

부사 송기로(宋綺老, 1885, 1882.12~1884.08, 1, 1887.04~1888.03 2차 재임)

부사 민영직(閔泳稷, 1888, 1888.01~1888.03 재임)

 

조선시대 개국기의 장흥은 읍치(邑治) 환원과 이설이 이루어진다. 고려말기 1379(우왕 5) 왜구 침탈로 인하여 장흥을 떠나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겨 갔던 장흥부(長興府))13년만인 1392년 장흥으로 다시 돌아온다.

 

고려 말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로 옮겼고, 본조[조선] 태조 원년 임신[1392]에 성()을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쌓아서 부()의 치소(治所)로 삼았다.(세종실록 151, 지리지 장흥도호부)”

 

장흥으로 돌아와 중령산에 성을 쌓아 치소를 삼는다는 내용인데, 당시 장흥부사 황보덕(皇甫德)이 주관하여 일명 황보성(皇甫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성을 쌓은 기록이 전해져 조선 개국기 향촌사정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중령산 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이다. 당시 이색은 장흥에 유배되어 있었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할 것이다.

 

철야현으로 옮겨 가기 전 고려시대의 장흥부 영역은 현재의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일원이 중심이었다. 치소는 관산읍 방촌리로 비정된다. 조선 개국기에 돌아 오면서 수령현 영역이었던 중령산에 자리하면서 옛터 관산 일원은 고읍(古邑)’으로 불리우게 된다.

 

1413(태종 13) 10월에는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는 지방행정구역 명칭 개정에 따라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가 된다. 그러나 중녕산의 황보성은 읍치로서 지나치게 협소하였고, 치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처럼 성이 좁은 탓에 1414(태종 14)부터 이설 논의가 있었다. 1422(세종 4)에 읍치를 수령현 옛터로 옮기고 성을 축조한다. 이후 1895년 장흥군이 되기까지 현으로 강등되었던 짧은 시기만 제외하고는 도호부로서 읍격을 유지한다. 이 장흥도호부 수령의 비석 13기가 장흥향교 앞에 있다. 연대가 가장 앞선 비석은 1585년경에 세운 이희부사의 선정비이다.

 

장흥도호부사 기념비는 종삼품 도호부사의 읍격을 지닌 장흥도호부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점, 전라도 56관 중 4개소 도호부의 지방관 행적비라는 점, 지방제도사와 향촌사회사를 알 수 있는 점, 1585년경부터 1888년까지 13기로 조선중기~후기에 걸쳐 있는 점, 재임 시기가 확인되고 행적과 연결되는 점, 호패형과 한옥 지붕형 등 다양한 형식이 있는 점, 다른 지역의 문화재 지정 선정비나 불망비와 비교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 등에 있어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장흥도호부사 비군 13기의 제명은 선정비 6, 불망비 4, 거사 2, 흥학비 1기이다. 선정비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선정(善政)’에 대한 기록자료가 확인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기념비(紀念碑)’ 용어로 문화재 명칭을 부여하였다.

 

부사 이희 선정비, 청백리에 녹선

 

장흥도호부사 이희 선정비[嘉善大夫府使李公墍善政碑, 비몸 높이 114cm, 비머리 높이 56cm]는 장방형의 좌대 가운데 홈을 파고 비 몸을 세웠다. 비 머리는 비 몸과 한 돌이며 꽃무늬를 새겼다. 비 몸 앞면 상당에 좌서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새기고 내려쓰기로 부사 이공희 선정비(府使李公墍善政碑)라 비제를 새겼다. 명문과 연기 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건립 시기는 재임 기간과 비교해 보면 1584~5년 어간일 듯하다.

 

이희(李墍, 1522~1600)1583(선조 16) 828(정축) 특지(特旨)에 따라 장흥부사에 임명되어 10월에 부임하였다. 당시 대사헌 직위에 있었다. 좌천인 셈이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간악함의 위세에 절의로 항거했고 맑고 깨끗한 지조로 한 점의 하자도 없다는 인물평을 통해 그의 성품과 행적을 알 수 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선조실록선조 28년 을미(1595) 718(기축)조에 인물평이 실려 있다. “참판 이희(李墍)는 사람됨이 충성되고 너그러우며 맑고 깨끗한 지조로 한 점의 하자도 없으며 곧은 도리로 행하여 세속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았다. 지난 계미년 가을 국운이 불행하여 3(三奸)이 국사를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현혹시켜 나라가 망할 정도가 되었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간악함을 알면서도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공이 그 당시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절의로 항거하기를 천하의 악은 일반이니, 사람마다 꾸짖을 수 있다.’ 하고, 마침내 글을 올려 논핵하니 종이에 가득한 정당한 말이 추상같이 늠름하였다. 우뢰 같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특별히 장흥부사로 나가게 되자 사람들은 공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했는데 공은 혼자 의연히 동요하지 않았으니, 당시 사람들이봉새가 산의 동편에서 운다.[鳳鳴朝陽]’고 하였다. , 연령과 덕이 모두 갖추어졌는데 지위는 아경(亞卿)에 머물렀으니 애석하다.”

 

이희는 장흥부사 시절 백담 구봉령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이 편지에 답하는 구봉령의 시가 있다.(한국고전종합DB인용)

 

장흥부사 이가의[]의 편지에 답하다 答長興李府使可依[]

 

대숲과 띠풀로 우거진 촌락 장기도 많은데

篁茅籬落瘴江邊(황모리락장강변)

동호부 차고 남쪽 나누어 몇 천 리 길 떠나네

銅虎南分路幾千(동호남분로기천)

꿈속에 오운이 떠 있는 하늘이 완연하고

夢裏五雲天宛爾(몽리오운천완이)

거울 속의 두 귀밑머리 눈발처럼 희끗 하네

鏡中雙鬢雪飄然(경중쌍빈설표연)

고래 내뿜는 푸른 바다 물결이 천 층이고

鯨噴碧海千層浪(경분벽해천층랑)

사자 울부짖는 푸른 봉우리 안개가 만 겹이네

獅吼蒼峯萬疊煙(사후창봉만첩연)

어젯밤 봄바람에 매화 가지에 소식 오더니

昨夜東風一枝信(작야동풍일지신)

객창에 매화에 걸린 달 사람 보며 둥글겠구나

客窓梅月向人圓(객창매월향인원)

 

이 시의 끝에 고을의 지경 안에 사자산이 있다[府望有獅子山]는 세주가 있다. 사자산은 장흥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장흥도호부 산천 조에 사자산(獅子山) : [장흥보호]부의 동쪽 9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제목의 이가의(李可依)는 이희를 이른다.‘동호부(銅虎符) 차고 남쪽 나누어[銅虎南分]’는 지방관으로 부임한 것을 말한다.

 

동호는 구리로 만든 병부(兵符)로 관인(官印)을 가리키고, 나누었다는 것은임금의 근심을 나눈다[分憂]’는 뜻으로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다. 오운(五雲)은 오색구름이 서려 있는 전각으로, 왕이 기거하는 곳, 또는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희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간옹(艮翁)이다. 이지란(李之蘭)의 아들이다. 1555(중종 10 을묘)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좌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지돈령부사 등을 거쳤다. 1603(선조 36)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시호는 장정(莊貞)이고, 원주 송모사(松慕祠)에 배향되었다. 저술로 송와잡설(松窩雜說)이 있다.

 

*이희(李墍) : ’, ‘’, ‘로 읽는다. 李墍의 독음은 인명사전류나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등 대부분이 이기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李墍의 형제 중 맏형 이름이 李基이기 때문에 우리 음으로 중복되게 부르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희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따라 이희로 표기한다. 이희의 형제간은 李基, 李塿, 李墍, 李墉 4형제이다.(원주시, 송와(松窩) 이희(李墍) 연구(硏究)-원주학술총서 제16-, 2013.)

 

이희는 조선왕조실록에 성품과 덕망에 대해 여러 번 기록이 나론다. 

 

"몸가짐이 청간(淸簡)하였다.", 

"청수(淸修)하고 공직(公直)하며,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아 당시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고절(苦節)을 맑게 닦은 이로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였으니 참으로 서리 속의 푸른 대[]요 백료(白僚)의 의표(儀表)였다."

"홀로 충성을 바치며 자신을 믿었고 청렴하고 사사롭지 않아 우뚝이 조정에 서 있자 풍채가 늠름하였다."

 

이희부사의 장흥도호부사 시절 행적이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역대 장흥도호부사의 기념비는 차례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문화유산명 : 장흥도호부사 기념비군

지정종별 :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302]

소 재 지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교촌리4(교촌남외길 33) 장흥향교

지 정 일 : 2023.12.28.

수 량 : 13

장흥 향교 앞 기념비군, 이 가운데 장흥도호부사 기념비 13기가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로 지정되었다.

 

부사 이희 선정비. 장흥도호부사 기념비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비이다. 1583년 8월에 대사헌에서 장흥도호부사로 임명되어 10월에 부임하여 1585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선정비는 1585년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간악함의 위세에 절의로 항거했고 맑고 깨끗한 지조로 한 점의 하자도 없다는 인물평을 통해 그의 성품과 행적을 알 수 있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이희부사의 장흥도호부사 시절 행적이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
백담 구봉령의 칠언율시 答長興李府使可依[墍]書[장흥부사 이가의[희]의 편지에 답하다〕- 시의 끝에 고을의 지경 안에 사자산이 있다[府望有獅子山]는 세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