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54 - 26개소 전각이 있던 정수사, 고금도 관왕묘 수호사찰

향토학인 2024. 6. 7. 00:46

인지의 즐거움354

 

26개소 전각이 있던 정수사, 고금도 관왕묘 수호사찰

 

김희태

 

정수사, 26개소의 전각, 24개소의 산내외 암자

 

정수사의 사적 기록으로 정수사 여지승람이 있다. 조선후기의 기록인데 앞에 2장의 원색 지도가 있다. 정수사 가람 배치도와 고금도 관왕묘 지도이다. 이 사적의 제목은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 여지승람(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淨水寺輿地勝覽)이다.

 

정수사 여지승람에 따르면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 기록이 나온다. 쌍계란 사명(寺名)은 동쪽과 서쪽에서 흐르는 두 곳의 냇물이 절 앞에서 합하므로 얻게 된 이름이라 한다. 강희 연간(1622~1722)에 이르러 절 이름을 쌍계사(雙溪寺)’에서 정수사(淨水寺)’로 개명하였다.

 

정수사 여지승람에는 전각(殿閣)(9), 방사(房舍)(17), 암우(庵宇, 암자)(24, 山內 18, 山外 6), 탑묘(塔廟, 부도)로 구분되어있다. 전각과 당우는 26개소, 암자는 24개소에 이른다. 암자 가운데 산외 암자는 6개소로 고금도의 옥천사를 비록하여 지금의 완도 경내에 있는 것도 있다.

 

<> 조선후기 정수사 소재 전각과 소속 암자(정수사 여지승람)

조항 명칭
전각(殿閣)(9) 대웅전(大雄殿) 시왕전(十王殿) 나한전(羅漢殿) 응향각(凝香閣) 첨성각(瞻星閣) 향적전(香積殿) 삼청루(三淸樓) 안양루(安養樓) 일주문(一柱門)
방사(房舍)(17) 설선당(說禪堂) 적묵당(寂默堂) 동별당(東別堂) 서별당(西別堂) 청풍루(淸風樓) 양진당(養眞堂) 수경당(水鏡堂) 지장전(地藏殿) 문수전(文殊殿) 용화당(龍華堂) 관음전(觀音殿) 보현전(普賢殿) 백련당(白蓮堂) 서전(西殿) 동전(東殿) 부도전(浮屠殿) 반야대(般若臺)
암우(庵宇)(24) 산내(山內)(18) 대은암(大隱庵) 내원암(內院庵) 조계암(漕溪庵) 성적암(聖蹟庵) 금강암(金剛窟) 명진암(明眞庵) 묘적암(妙寂庵) 송대암(松臺庵) 관일암(觀日庵) 상원암(上院庵) 원통암(圓通庵) 남암(南庵) 안심암(安心庵) 양심암(養心庵) 만경암(萬景庵) 백적암(白磧庵) 폭포암(瀑布庵) 양수암(水庵)
산외(山外)(6) 옥천사(玉泉寺) 백운사(白雲寺) 영주암(瀛洲庵) 성은암(聖隱庵) 봉익암(鳳翼庵) 청산암(靑山庵)
탑묘(塔廟)(3) 부도(浮屠)(3) 조계동 용지위(漕溪洞 龍池上), 묘적동(妙寂洞), 대웅전위(大雄殿上)

 

 

정수사, 고금도 관왕묘 수호 사찰

 

정수사는 고금도 관왕묘(關王廟)의 수호 사찰로서도 중요하다. 고금도는 조선시대에는 강진현에 속해 강진현감의 관할하에 있어 같은 강진 관내의 정수사와 연관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189623<칙령> 13호에 따라 강진, 영암, 해남, 장흥의 도서지역이 신설된 완도군으로 편입되면서 고금도는 강진군에서 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

 

1793(정조 17) 봉성대사 의준(鳳城大師 義俊)스님이 정수사에서 내는 각종 세금을 줄여 달라고 강진현감 이면휘(李勉輝, 1740~?)에게 요청하였다. 마침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 17591816)1794(정조 18)에 강진에 와서 정수사가 관왕묘를 지키는 대신 모든 세금을 면제받도록 하였다. 1795(정조 19)에 정수사 스님 의준(義俊)이 관왕묘를 지키는 수호총섭(守護摠攝)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793년 이후 정수사가 고금도 관왕묘의 수호 사찰이 된다. 이런 탓에 정수사 여지승람에 관왕묘 지도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수호사찰이 되기 전에도 관련이 있었다. 1666(현종 7) 수군절도사 유비연(柳裴然)이 관왕묘가 퇴락된 모습을 보고 묘우를 중수하고 관우상을 보수했고, 또 승려 천휘(天輝)로 하여금 관왕묘 곁에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를 건립하여 수호와 제향을 맡도록 했다. 이 승려 천휘는 강진출신으로 정수사스님이다. 수호사찰이 되기 130여년전에 이미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내력을 지닌 고금도 관왕묘에 대해서 알아 보자. 고금도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선조 31)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다. 1598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여 진을 치면서 이후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 본부가 되었다. 이같은 연고로 고금도에 관운장의 사당이 건립된다. 탄보묘라 사액을 받기에 이른다. 뒤에 이순신장군과 등자룡을 추배한다.

 

관왕묘는 원래 중국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 1543~1607)과 계금(季金)이 세웠다. 1599(선조 32 ; 萬曆 27) 정월에 이천상(李天常)은 고금도 관왕묘 창건내력을 담은 고금도 관왕묘 창건 사실(古今島關王廟創建事實)을 작성했다. 이천상은 진린의 수하로서 관왕묘의 창건과정을 직접 목도했던 인물이다.

 

1598(선조 31)에 진린이 광병(廣兵) 5천명을 거느리고 천진교(天津橋)에 이르러 곧이어 한반도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붉은 얼굴에 훤칠한 수염을 하고 거동과 용모가 의젓하고 늠름한 한 신장(神將)이 나타났다. 신장은 자신이 장수 관운장(關雲長, 關羽)이라고 말하고 이번 전쟁에서 필승의 비책을 알려 주었다.

 

진린이 꿈에서 깨어보니 그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정양문(正陽門)의 신실에 나가 관우상의 모습을 보니 꿈속에서 본 인물과 흡사하여, 비단에 관우상을 그려 군중에 봉안해 놓았다. 이후 관우의 영험이 나타나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강진 고금도에 도달하여 다시 관우가 꿈에 나타나 묘우를 세워달라고 했다. 이에 따라 진린은 백금 수백 량을 계금에게 주고 고금도 용금산(湧金山) 아래에 묘우(廟宇, 신실)를 세우도록 했다. 가을에 관왕묘가 건립되자 진린이 친히 치제를 했다. 묘우에 위양만리(威揚萬里)’라는 편액을 걸고, 그 끝에 만력 무술년 계추에 절직수영 관병(浙直水營 官兵)과 함께 세웠다는 문구를 새겨놓았다. 15척이나 되는 목판에 진린과 계금의 이름과 직책을 적어놓았다. 용금산은 오늘날 충무사가 자리하고 있는 용검산(勇劒山)을 지칭한다. 해발 53m이다.

 

진린이 고금도에 관왕묘를 세운 내면적 이유는 당시 명나라 군인들 사이에서 절대 추앙을 받은 무신 관우를 숭배하는 행위를 통해 왜군과 생사 결전을 앞두고 있는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명나라 수군은 진린이 크게 이끄는 광동 수군과 계금, 등자룡 등이 이끄는 절직(浙直) 수군으로 구성되었다. 진린은 절직(浙直) 수군을 이끄는 계금과 더불어 관왕묘를 세웠다.

 

그 뒤 관왕묘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일시적으로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묘우와 소상이 퇴락하고 향불이 이어지지 않으나, 때로 뱃사람들이 기풍을 바라는 장소로 이용되었다(其後歲久, 廟傾像昧, 香火不至, 時有舟子瀝酒禱風). 1666(현종 7) 절도사 유비연(柳裴然)이 관왕묘가 퇴락된 모습을 보고 묘우를 중수하고 관우상을 보수했다.

 

또 승려 천휘(天輝)로 하여금 관왕묘 곁에 옥천암(玉泉庵)이라는 암자를 건립하여 수호와 제향을 맡도록 했다. 승려 천휘는 강진출신으로 정수사스님이다. 이때 진린을 동무(東廡)에 모셨다. 1683(숙종 9)에 이순신을 서무(西廡)에 모셨다. 이로부터 관왕묘에 노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둔 조선과 명나라 수군 장수가 함께 제향되었다.

 

1684(숙종 10)에 전라도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은 관왕묘를 증수하고 묘호를 내려 주기를 주청했으나, 조정의 논의과정에서 지지부진했다. 1704(숙종 30)에 전라우수사 신찬(申璨)은 당시 관왕묘를 수호하고 있던 승 처환(僧處還)으로 하여금 관왕묘를 재차 중수하도록 했다. 이때 신찬은 남도 소속의 병영, 수영 등 관아에 통문을 보내어 수리비용을 마련해주었다.

 

1710(숙종 36)에 원임 영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관리를 관왕묘로 보내어 치제하기를 주청하자, 숙종은 이를 준허했다. 이때부터 관왕묘는 조정에서 치제를 지내는 묘우로 발전하였다.

 

1713(순종 39)에 관왕묘 경내에 <고금도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이명이 짓고 글씨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우항(李宇恒)이 썼다.

 

1791(정조 15)에 탄보묘(誕報廟)라 사액을 받았고, 1792년 명군 장수 등자룡(鄧子龍)을 추배했다. 등자룡은 정유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진린의 부장이었다.

 

1801(순조 1)에 수호암자를 중수했다. 김이재(金履載, 1767~1847)2월에 탄보묘수호 용금산 옥천사 창수기(誕報廟 守護 湧金山 玉泉寺 創修記), 5월에 탄보묘 옥천사 신창 상량문(新創 上樑文)을 짓는다. 그리고 1829(순조 29)1904(광무 8)에 각각 묘우를 중수했다.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 여지승람(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淨水寺輿地勝覽)(정수사 사적기)의 고금도 탄보묘, 월송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