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00 - 고구마, 꽃이 피다. 그저 신기하다 ; 다산이 본 강진 고구마, 이규경의 고금도 고금이(古今伊)

향토학인 2023. 7. 27. 15:42

인지의 즐거움300

 

고구마, 꽃이 피다. 그저 신기하다

다산이 본 강진 고구마, 이규경의 고금도 고금이(古今伊)

 

 

김희태

 

어 저게 뭐지

꽃이 피었네

무슨 꽃이지

 

조용히 스마트폰에 담는다.

2022111일 오후 1시쯤

물 한모금 하고자 부엌으로 갔는데

밖이 보이는 창틀 곁에 세워 둔 병에서 꽃을 본 것

분명 무슨 꽃이라 말했을 것이고, 그저 건성으로 들었을 것이다.

오후 정참 때

 

꽃이 피었든디

먼 꽃

그거시 그랑께..’

또 잊어 머겄구만

몇 번을 말해도 건성이여

. 다음부터는 적어 놀게

머슬 적어

 

티격 태격. 일상이다. 또 조심스럽게 묻는다.

 

긍게 먼 꽃이라고

고구마꽃이여. 고구마

머여. 고구마도 꽃이 피나

그라믄 꽃이 안핀 것도 있당가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고 알이 여물제. 묵기는 잘 하등만

마싯승께 묵제...’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되뇌인다.

 

신기한 거는 또 있다. 보름 쯤 오가며 보았는데, 꽃이 안 피었는데, 그 날 꽃이 핀 것이다. 보름쯤 병원 응급실을 오가며 간호를 하다가 조금은 회복되어 요양원으로 다시 모시고 집에 왔는데, 그날 핀 것 것이다. ‘안주인이 돌아 와서 물을 주니 꽃이 피었던 것.

 

그저 신기할 뿐이다. 고구마가 꽃을 핀 거, 그 꽃을 본 거, 안주인이 물을 주니 꽃이 핀 거....

 

예의, 또 자료를 헤적인다. 고구마 관련 기록을 찾고자.

 

<신편 한국사>(33책 조선 후기의 경제) 상품작물의 재배 글 가운데 소채편에 “18세기 이후 서울과 지방의 큰 도시 주변에서는 소채를 재배하였고, 아울러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강진에서는 고구마의 재배가 유명하였다.”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강진에서 18년 유배살이를 하면서 학문을 일구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의 <경세유표> 정전의(井田議)에 이런 글이 있다.

 

서도(西道)의 연초(煙草) , 북도의 삼밭, 한산(韓山)의 모시 밭, 전주(全州)의 생강 밭, 강진(康津)의 고구마 밭, 황주(黃州)의 지황(地黃) 밭은 모두 상지상 논과 비교해도 그 이가 10갑절이나 된다.(西路煙田北路麻田韓山之苧麻田全州之生薑田康津之甘藷田黃州之地黃田皆視水田上上之等其利什倍)

 

<신편 한국사>강진 고구마기록은 <택리지>에 있다는 글도 있는데, 그 보다는 늦지만 강진에서 직접 생활했던 다산의 글에서도 강진 고구마를 읽을 수 있었다.

 

다산이 제자 황상에게 보낸 황상유인첩에 제함[題黃裳幽人帖]’이라는 글에도 고구마 이야기가 나온다. 남새밭을 둘러싼 고구마. 강진의 고구마밭 현장이라 하겠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를 심어 남새밭을 둘러싸게 하고 해당화 수십 그루를 심어 울을 만들어서 진한 향기가 늦은 봄 초여름에 남새밭을 돌아보는 사람의 코를 찌르게 한다.(稍遠種瓜種甘藷繞圃植玫瑰累千株成籬每當春夏之交巡圃者得香烈觸鼻也(정약용, 題黃裳幽人帖, <다산시문집> 14)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있을 때 지은 시에 고구마를 형상화한 시구도 보인다. “토산으로는 귀한 고구마가 있어 그를 구하러 이리로 몰려든다네라 하였다.

 

미나리도 바칠 만한 물건이고                    美芹可以獻(미근가이헌)

등짝 쬐는 햇볕도 마찬가지지                    由來齊炙背(유래제자배)

양하로 고질을 치료하면                            蘘荷復治癖(양하부치벽)

침도 쑥뜸도 필요 없을 것이고 不              勞施鍼艾(불로시침애)

토산으로는 귀한 고구마가 있어                土産貴藷芋(토산귀저우)

그를 구하러 이리로 몰려든다네                求者此湊會(구자차주회)

남쪽은 토질이 연해서                                南地故酥軟(남지고소연)

비가 안 와도 흙이 잘 부서지지                  不待雨破塊(부대우파괴)

이웃사람 작은 땅이                                   隣人小區畫(인인소구화)

우리 사립문 밖에 있는데                           在我柴門外(재아시문외)

가꾸는 방법은 비록 틀렸어도                    畦畛縱違法(휴진종위법)

곡식이 꽤나 무성하게 자라                       頗能向蕃薈(파능향번회)

때로 지팡이 끌고 가보면                           時復曳杖臨(시부예장림)

내 좋아하는 것 거기 있다네                      性好嗟有在(성호차유재)

청재에 맛을 들여놓으면                            淸齋苟得味(청재구득미)

지지고 회치고를 누가 부러워할 것인가    誰人羨𦙫膾(수인선증회)

(정약용, 和蘇長公東坡[次韻], <다산시문집> 5)

 

이 시는 소장공 동파 시에 화답하다[和蘇長公東坡[次韻]]’는 시제의 8수 가운데 있다. 시를 쓰게 된 연유를 길게 적고 있다. ‘유락한 이후로[流落以來]’라 하여 유배지임을 알 수 있다.

 

내 원래 채소밭 가꾸기를 좋아하는데 유락한 이후로는 더욱 할 일이 없어 그러한 생각을 두어 온 지가 오래지만 땅이 좁고 힘이 못 미쳐 지금까지 그리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늘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웃에 규모가 작은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이 있어 때로 가서 그것을 보고, 보고 나면 마음이 또 편안해지고 한 것만 보아도 내 천성이 그걸 좋아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옛날 마정경(馬正卿), 장공(長公)에게 땅을 주어 그로 하여금 직접 농사를 짓게 하자고 청한 일이 있어 그에 대한 시 8편을 남긴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대도 그때와는 다르고 의리도 그때에 비하면 퇴색되어 있어 그렇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서글픈 마음으로 이 시를 써 내 뜻을 나타내본 것이다.(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참조)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 1788~?)의 글에도 고구마가 보인다. “고금도(古今島)에서 성하여 고금이(古今伊)라고 칭한다.”고 하였다. 어쩌면 고구마’-‘고금도이름도 관련이 있을성 싶다. 조선후기 고금도는 강진현에 속했다가 1896년 신설된 완도군에 든다. ‘강진 고구마고금도를 포함한다고 보아도 될 듯 싶다.

 

이규경은 다산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활동하지만 실학자로 저명하다.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 1741~1793)의 손자이다. 특히 그가 집대성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고금(古今)의 사물을 1,400여 항목에 걸쳐 고증하고 해설한 책(6060)이다. 천문(天文), 시령(時令), 지리(地理), 풍속(風俗), 관직(官職), 궁실(宮室), 음식(飮食), 금수(禽獸) 따위의 모든 분야에 관한 것을 수록하였다. 고구마에 대한 내용을 보자.

 

고구마[南藷] : 강필교의 감저보(), 김씨(金氏)의 감저보(), 오비 서유구의 종저보()와 구본(舊本)에 전해진 원보(原譜)가 있다. 왜에서는 감저를 고고리(古古里)라 불렀는데 문외하다. 왜의 방언이다. 효자가 고고이(古古伊)라고 하였고 저괴를 문외라 하였다. 옛날 효자가 처음에 고구마를 심어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그런데 자거 저괴와 같아 우리의 이 이름이 나온 것이다. 현묘(顯廟) 4년 계묘년에 남해 현민(南海縣民) 김여휘(金麗輝) 등이 표류하여 유구대도(琉球大島)에 이르렀다. 한 종류의 채소가 있었는데 이름은 우미(牛尾)라고 했고 가죽은 붉은 색이고 고기는 백색이었는데 삶아서 먹었다. 맛이 서여(薯蕷, 참마)와 같았다. 오래 굶주린 이에게 최고 적당한 것이었고 비록 과식(過食)하여도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고구마입니다. 유구국(琉球國) 문자로 저()를 칭하기를 번여(蕃茹)라고 일컫고 감저를 종식하는 법이 있다. 감저는 일명 주저(朱藷), 번저(藩藷), 주서(朱薯), 홍산약(紅山藥)이라 하고 지금은 적저(赤芋)라 한다. 속칭으로 유구저(琉球芋), 또는 장기처(長崎芋)라 한다. 우리 동방에서는 고금도(古今島)에서 성하여 고금이(古今伊)라고 칭한다.(이규경, 北藷辨證說, <오주연문장전산고>;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참조)

 

경상도 선산에 살았던 노상추(盧尙樞, 1746~1829)의 일기 1766(영조 42) 7월 초2(경오)조에는 고구마 줄기를 심는 기록이 보인다. 곳곳에서 고구마가 식량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남자 종을 신당포(新堂浦)에 보내서 고구마 줄기 두 개를 가지고 가서 심게 했다. 이것은 줄기를 잘라서 심는 것이라고 한다.(初二日庚午, . 送奴于新堂浦, 持甘藷莖二枚種之, 而此斷莖取種者云矣.)(<국역 노상추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49, 2005)

 

이덕무(1741~1793)<청장관전서>에도 고구마 이야기가 나온다. “날로 먹으면 삼삼하게 달고, 푹 익혀 먹으면 매우 달고”.. 그 감칠맛이 혀 끝에 돈다.

 

고구마[甘藷]

덩굴과 잎이 마[薯蕷]와 같은데, 그 덩굴은 땅에 묻으면 곧 곳곳에서 뿌리가 나고, 그 뿌리는 길이가 네대 치이고 둘레가 두세 치이다. 양끝은 좁고 껍질은 붉은 자색이며, 살은 새하얀데, 날로 먹으면 삼삼하게 달고, 푹 익혀 먹으면 매우 달고 호박 같은 맛이 나며, 거위 알처럼 둥근 것이 제일 좋다.(이덕무, 甘藷, <청장관전서> 65蜻蛉國志 물산편 ;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참조)

 

이덕무, 甘藷, <청장관전서> 제65권 蜻蛉國志 물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