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83 - 1872년 건립한 향촌 서당, 강진 월남리 흥학당

향토학인 2022. 8. 29. 02:15

인지의 즐거움283

 

1872년 건립한 향촌 서당, 강진 월남리 흥학당

 

김희태

 

 

1872년 건립, 서당 흥학당, 재실 월양재, 유식처 요월정

 

월남리 흥학당(興學堂)은 향촌 서재(서당)이다. 강진군 성전면 월남383(월남리 902-1번지) 소재. 1872년 건립되어 현재까지도 서계(書契)가 운영되어 오고 있고 관련 자료도 잘 남아 있다.

 

원래 월강사(月岡祠) 강당을 이용하면서 강학을 했으나 월강사가 1868년 서원 훼철기에 헐린 뒤 1872(고종 9)에 새로 건립하였다. 현재 흥학당 건물의 장혀에 적힌 상량문(겉상량) “숭정기원후 오회갑 상지구년 임신(崇禎紀元後 五回甲 上之九秊壬申)”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서재는 우측 퇴칸이 마루로 되어 있어 유식(遊息)의 공간을 활용되었던 것 같다. 요월정(邀月亭)이란 당호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요월정기(邀月亭記)현판이 있는데 1907년에 계양 이금(桂陽 李嶔, 1842~1928)이 지은 것이다. 또 월양재(月陽齋)라는 편액도 있다.

 

요월정기는 이흠의 문집인 계양유고(桂陽遺稿)에는 요월정설(邀月亭說)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제목 다음에 다음과 같은 세주가 실려 있어 흥학당의 연혁을 알 수 있다.

 

월남촌중에 예전에 서옥이 없어서 월강사 강당을 빌어서 거처하였다. 강당이 훼철된 뒤에 마을의 동산 곁의 전려를 매득한 땅에 이미 좁고 또한 낡아서 산 아래에 터를 잡아 청계 위에 지었다. 서쪽 두칸은 직려(直廬)로 음식을 마련하는 곳[供齏鹽]으로, 가운데 두칸은 훈장이 머무는 곳(函席之所), 동쪽 두칸은 자연을 감상하며 휴식하는 곳[迎風休息之所]으로 마존(馬存)의 정자 이름을 취하여 편액을 요월정(邀月亭)이라 하였다. 문 밖에는 석천(石泉)이 있는데 겨울에는 따습고 여름에는 시원하였다.(村中舊無書屋以月岡祠講堂借居焉 講堂毁撤之後 村之東山下田廬買得之地 旣湫宇亦朽敗乃卜基於山下淸溪之上 西二間則爲直廬使供齏鹽 中央二間設爲函席之所 東二間爲迎風休息之地 取馬存之亭名扁曰邀月亭門外有石泉冬溫夏冽)(요월정설(邀月亭說), 계양유고(桂陽遺稿); 국립중앙도서관 한古朝46-1685)

 

굽은 부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5칸 건물

 

이 가옥은 내부 종도리 장혀 하부의 겉상량문(崇禎紀元後 五回甲 上之九秊壬申壬子月 南至 二十一日 壬寅午時竪柱 未時 上樑)으로 보아 숭정 기원 후 다섯 번째, 성상 즉위 9년인 임신년 즉 고종 9년인 1872년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평면은 앞면 5, 옆면 2칸이며, 현재 일본식 기와가 올려진 우진각지붕이다. 내부에 걸린 과거 사진에 의하면 과거에는 시멘트 기와가 올려졌으며, 좌측으로부터 방, 부엌, 대청, , 마루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민박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내부는 모두 방으로 변화되었고, 배면에는 화장실과 황토방을 덧달아 원래의 모습에서 변화를 보인다. 또한 좌측 2칸의 외벽을 와편과 맷돌을 세워 마감하였다.

자연석 외벌대 기단을 두고 자연석 초석을 올려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기둥은 원주이며, 툇칸 안쪽의 고주는 각주로 특히 측면 퇴칸 모서리의 기둥은 더 큰 부재를 사용하여 하중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주 상부에서 전면과 측면방향의 두 개의 툇보가 걸리기 때문에 단면손실이나 추녀를 받치는 역할 등을 고려하여 큰 부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면에는 툇칸을 두었고 고주에서 외부 평주상부로 휘어진 툇보를 끼웠는데, 평주 상부에서는 보아지를 끼우고 고주 몸통으로는 통장부로 끼워 넣었으며, 툇보 바로 위로 대들보를 올렸다. 간단한 민도리형식으로 도리의 하부를 둥그렇게 치목하였다.

 

지면이나 기단 상부에 커다랗고 편평한 디딤돌을 설치하였으며, 전면 툇마루의 여모귀틀은 자연스럽게 휘어진 부재를 사용하며 매끄럽게 마감하였다.

 

현재 내부는 두칸씩을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하여 큰 방 두 개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측 퇴칸은 원래의 모습처럼 보이나 마루 청판 등은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툇칸의 우측방향으로는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여 공간을 융통성 있게 사용하였으며, 서당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퇴칸과 방을 연결하여 글공부를 했던 곳으로 보인다.

 

가구구조는 대청칸에서 2고주 5량가이며, 대들보 한본으로 고주사이를 연결하고 바로 판대공을 올려 종도리와 종도리장혀를 받치고 있다. 내부 일부 기둥은 새롭게 원주로 설치하여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 천장이 별도로 설치되지 않아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일부 서까래는 교체되었으나 대체로 원형으로 보이는 자연스럽게 굽은 부재가 노출되어 자연스러운 멋을 보여준다.

 

현재도 서계가 운영되는 마을 공동체 공간

 

내부에는 숙흥야매(夙興夜寐)” 액자와 벽체 개수 이전의 옛사진이 걸려 있다. 전면 마루와 우측 퇴칸에 현판이 걸려 있다. 편액으로 흥학당(興學堂), 요월정(邀月亭)(고당 김규태), 월양재(月陽齋), 기문 현판으로 요월정기(邀月亭記)(1907, 계양 이금)가 있다. 그리고 서궤에 서재계책(書齋契冊) 12(1915~2022)이 있다.

 

월남리 흥학당은 요월정, 월양재로도 부르며 현재까지도 서계(書契)를 운영하고 있다. 서궤에 보관중인 서계책은 모두 12책으로 제1책은 을묘년 강신부터 기록하고 있다. 을묘년은 강신 참여자 명록에 이금(李嶔, 1842~1928)이 두번째로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15년에 해당된다. 이후 매년 강신을 하고 있으며 2022년 올해도 강신하였다.

 

강진 월남리 흥학당 건조물은 상량문에 의해 1872년이라는 절대연대가 확인되고, 서당(서재)으로 사용하면서 서계(書契, 書齋契)를 조직하여 여러 고문서가 함께 전하고 있는 점에서 마을 공동체 공간으로서 사용된 의미있는 곳이다. 기문(1907)이나 편액, 서계책(12, 1915~2022) 등 관련 기록유산도 전하고 있다. 무엇 보다도 현재까지도 향촌 서계가 운영되고 있는 점도 흔하지 않은 사례이다. 비록 현대식 재료로 마감되고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에서 변화를 보이기는 하지만, 향토사적 가치가 있으며, 공간을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건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참고 자료

-김희태·성대철, 강진 월남리 흥학당 조사보고서, 2022

흥학당 옛 사진(벽체 개수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