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7 - 남도 역사 속의 나무와 숲

향토학인 2016. 5. 7. 02:20

인지의 즐거움 따라 027

 

남도 역사 속의 나무와 숲

 

김희태

 

너와 함께 남도 마을 두루 다니고자 하나니

 

"이 주장(柱杖). 무슨 나무지요?"

“아. 천관산에서 자생하는 척촉(躑躅)이지요.”

“척촉!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주장을 벗 삼으니 힘들지 않게 올랐네요. 곳곳으로 불법을 펴러 다니렵니다.”

 

1240년 9월 어느 날.

갈색의 뭉툭한 부들(香蒲) 열매가 군데 군데 남아 있는 천관산. 여름이 아쉬운 듯 뙤약볕이 한창이다. 억새도 지천이다.

 

곳곳의 성적(聖迹)과 경관을 탐방하는 무리들. 자세히 보니 스님들이다. 그들사이에 오간 말.

문수암, 보현암, 의상암, 탑산사를 돌아 보고 구정봉을 거쳐 환희대에서 천관사를 굽어 본다. 천관산 산 이름의 유래를 듣고 온갖 형상의 바위를 둘러 본다. 오똑한 것, 납작한 것, 빠끔한 것, 우뚝 일어난 것, 폭 엎드린 것들이 올망 졸망하고 높직하고 펑퍼짐하고 두루뭉실하고 뾰쭉뾰쭉하며 천태만상인 그곳.

 

어느 스님이 오래된 책자 초본 뒤적여 가며 설명을 한다. 초청받은 듯한 한 스님은 찬찬히 둘러보면서 귀를 기울인다. 이윽고 탐방이 끝나간다. 관조하던 그 스님은 지팡이를 만지작 거리며 곁에 서 있던 스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지팡이를 선사해 준 것에 대한.

 

어인 일로 가파른 산을 올랐을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일까?

정명국사 천인(1205~1248)과 당시 탑산(塔山)의 주공 담조(曇照), 담일(湛一), 원상인(圓上人). 천인스님은 성적의 탐방길, 담조스님은 천관산 사적기 집필 부탁 겸.

1240년 고려 고종 27년 경자년 음력 7월의 일이니 774년전의 자연자원과 문화유산의 탐방 경관이다. 이를 풀어 보았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것이 척촉(躑躅)의 주장(柱杖)이다. 척촉으로 만든 지팡이.

 

호남촌 곳곳을 척촉 주장으로 다닐 터이니

 

척촉은 철쭉을 이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헌화가의 꽃도 척촉화로 보기도 한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 송(宋) 나라가 약재로 보내온 일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라도 등지에서 약재로 공납했다고 한다. 또한 새로 핀 철쭉꽃은 종묘에 천신하기도 했다. 약재로서, 신물로서 그만큼 귀히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척촉이 고승의 주장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니 생활용구나 신앙도구의 재료로서도 귀하게 쓰임을 알 수 있다.

 

철쭉은 밑동에서 줄기가 갈라지거나 뿌리에서 몇 개가 올라와 곧거나 조금 비스듬히 자라며 굵은 가지가 비스듬히 뻗어 전체가 둥그스름해진다. 키가 2~5m 정도 된다. 줄기껍질은, 어린 나무 때는 노란빛 도는 연한 갈색을 띤다. 묵을수록 노란빛 도는 회갈색이 되며 작은 비늘처럼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줄기 속은, 가장자리는 밝은 노란색을 띤다. 안쪽에는 붉은빛 도는 갈색의 넓은 심이 있다. 한가운데에는 갈색의 작은 속심이 있다.

 

이 철쭉을 지팡이로 만든 것이다. 장흥 천관산 척촉, 남도 철쭉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지팡이를 선사해 준 원상인에 대한 사례의 시가 있다. 7언 20구의 칠언고시. 우리나라 역대 명문을 모은『동문선』에 실린 명작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 보자.

 

원상인이 척촉의 주장을 선사함에 사례하여

  / 謝圓上人惠躑躅柱杖(사원상인 혜척촉주장)

 

                                      - 석천인(釋天因)

 

지제산은 높아 몇 천 길인가

  / 支提山高幾千仞(지제산고기천인)

오르고 또 올라도 그 근원 찾지 못하려니

  / 上上不得尋其源(상상부득심기원)

상인의 다리 힘은 늙어서도 튼튼하여

  / 上人脚力老猶健(상인각력로유건)

여러 날 아침 저녁 깊이 더듬어

  / 冥搜數日窮朝昏(명수수일궁조혼)

 

숲 속을 뚫고 가서 문득 얻은 것 있으니

  / 行穿中林忽有得(행천중림홀유득)

한 그루의 척촉이 바위 뿌리에 나 있었다

  / 一條躑躅生嵌根(일조척촉생감근)

꺾어서 주장을 만들려 하매 길이도 넉넉한데

  / 裁爲柱杖尺度足(재위주장척도족)

껍질이 모두 벗겨져 속 나무만 단단하다

  / 皮膚脫盡精堅存(피부탈진정견존)

 

울릴 듯 붉은 옥이 마디 눈을 드러낼 때

  / 鏗然紫玉露節目(갱연자옥로절목)

푸르른 이끼 흔적 점점이 아직도 있다

  / 尙有點點蒼苔痕(상유점점창태흔)

내가 행각하려는 것을 상인이 생각하고

  / 上人念我欲行脚(상인념아욕행각)

그것을 내게 주니 어찌 이리 은근한고

  / 持用惠我何殷勤(지용혜아하은근)

 

위험한 곳 올라갈 때 남은 힘이 있으니

  / 登危陟險有餘力(등위척험유여력)

언제나 너의 은혜 입는 것 진실로 알겠구나

  / 信知造次承渠恩(신지조차승거은)

너는 내 손에 떨어진 것을 한하지 말라

  / 報渠莫厭落吾手(보거막염락오수)

나는 호남의 마을들을 두루 다니고자 하나니

  / 我行欲遍湖南村(아행욕편호남촌)

 

운뢰음울려 다른 날에 화하여 용이 되면

  / 雲雷他日化爲龍(운뢰타일화위룡)

한 번 들어 하늘과 땅을 머금을 수 있으리라

  / 一擧尙可呑乾坤(일거상가탄건곤)

유유히 남북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데

  / 那更長爲堂中物(나경장위당중물)

어떻게 길이 방 안의 물건이 되겠는가

  / 悠悠南北狂馳奔(유유남북광치분)

 

원상인으로부터 여러 얘기를 들은 천인스님은 ‘척촉 주장’의 과정을 하나씩 풀어 간다.

 

첫째 연, 지제산으로 부르던 천관산의 이름과 자연을 벗삼은 수도승의 늙지만 강령함.

둘째 연, 숲속 바위뿌리에서 찾아낸 한그루 척촉. 주장으로서 길이도 적당한데 껍질마져 벗겨지고 속은 단단해 제격.

셋째 연, 붉은 옷과 푸르르 이끼 흔적. 세월을 지탱해 옴과 튼실함. 운수행각에 벗하며 의지하라고, 아니 행각을 미리 알아 차리고 주장을 선물로 주니 그 은근함. 고마울 뿐 이라는 것.

 

넷째 연, 위험 한 곳 다니더라도 주장을 벗삼아 힘이 되니, 너의 은혜로다. 그러니 나에게 온다고 한스러워 말라고 한다. 호남의 여러 마을들을 그 척촉 주장을 친구삼아 두루 다니면서 불법을 전수하고 민심을 살필지니. 민의 아픔을 보살피는 구도(求道), 구환(求患)의 길에 동행할 터이니.

다섯째 연, 관음을 염하면서 방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남북 어디든 다닐 터. 그러면 운뢰도 사라질지니.

 

철쭉꽃[躑躅花]은 전라도 특산의 약재로도 알려졌다.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약재조. 척촉의 주장으로 불법을 펴니 마음 다스림이요, 철쭉꽃은 약재로서 몸을 다스림이니. 안과 밖, 성과 속이 따로가 아니로구나. 호남의 곳곳 촌촌이. 이 시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호남(湖南)이란 땅이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는 150여년이 앞선다.

 

남도 역사 속의 나무를 찾아서 - 기록과 현장, 문학작품과 그림

 

사실, ‘남도 역사속의 나무’를 주제로 글을 쓰려다 보니 쉬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남도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나무’, ‘남도 역사를 바꾼 나무와 숲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 달라는 청탁에 더 망설여 질 수 밖에.

 

아래에서 보듯 어느 곳을 들추던 나무나 숲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제는 ‘나무’라는 단일 주제로만 한정하여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던 것. 이제 기록과 현장, 문학작품과 그림을 통해서 ‘남도 역사속의 나무 찾기’, 하나씩 그 실타래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공룡이 살던 중생대의 나무 화석부터 할까? 고인돌을 쌓던 청동기시대 암각화에는 나무가 나올까? 기원전후 광주 신창동 유적이나 삼국시기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도구들이 떼로 발굴되어 남도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여론이 일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장승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록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의 ‘759년(경덕왕 18) 장생표주를 세웠다[是以建元二年 特敎植長生標柱]’는 기록. 석주일까 목재 일까. ‘심다[植]’는 표기가 있으니 목재가 아니었을까? 동북아 바다를 호령하던 장보고대사의 기지, 완도 청해진의 목책(木柵),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랜 해저 군사 시설이 아닐까?

 

고려시대 천하 명품 강진 청자에 새긴 물가의 나무, 산곡수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 최적지라 구전되어 곳곳에서 향나무를 묻으면서 염원과 함께 그 표지로 남겨진 매향(埋香) 기록, 유독 그 현장이 우리 땅 남도에 많은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시대,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에 실린 무등산 원효계곡의 버드나무와 소나무, 소쇄원도에 보이는 다양한 나무들. 완도 보길도에 있는 국내 최대수종 황칠나무와 이를 읊은 듯 ‘궁복산 가득한 황칠나무 그대 보지 않았던가(君不見弓福山中滿山黃)’로 첫구를 연 정다산의 시 ’황칠(黃漆)’,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의 토산물 324종이 보이는데 식물류 약재는 148종, 심는 약[種藥] 8종 등 생약초 토종 약재는 156종에 이른다. 보이는 나무마다 풀마다 약으로 활용한 선조들의 심미안.

 

1478년(성종 18) 5월 전라도관찰사 김종직이 장흥 예양강[탐진강]에서 보고 읊은 흰 마름꽃[汭水白蘋開], 1722년(경종 2) 11월 14일 담헌 이하곤(1677~1724)이 천관산을 탐승할 때 탑산사 동쪽에서 보았다는 ‘천여년 된 자단목’ 현장도 찾아야 한다. 영암 도갑사 입구의 향탄봉안소(香炭奉安所) 암각문이나 구례 연곡사 어귀의 율목봉산(栗木封山), 진목봉계(眞木封界) 암각문도 국가 수요에 충당하는 밤나무, 참나무 등과 관계된 것이다. 1872년 나주목 고지도에 보이는 목장(木檣)도 찾아볼만하다.

 

각지의 나무숲 기록도 보인다. 1872년 채색 지방지도에 나타난 남평현 지석강가의 십리송(十里松), 함평현 교촌리 향교 앞의 비보숲[林藪], 광주목 공북루 건너편의 유림수(柳林藪), 광양현 읍성 밖의 서수(西藪)와 남수(南藪), 나주목 동점문 밖의 내목성(內木城)과 외목성.

    

 

왜 처녀풍이 불었을까? 소금비가 내렸을까? 그 많던 나무들은?

 

곡성 옥과현에는 두 그루 큰 버드나무 곁에 주막이 있어 유정점(柳亭店)이라 하는 등 노거수나 명목이 있어 땅이름으로 굳은 곳도 많다. 그리고 인물과 역사현장 관련된 곳도 있다. 장성 황룡면 맥동마을 하서 김인후선생 생가터에 있는 배나무, 어사리(御賜梨). 역사현장을 지켜온 해남 군청 앞의 수성송(守城松).

 

1810년(순조 10, 경오) 7월 28일 완도 신지도(당시는 강진에 속함) 일대에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 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정약용은 강진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그 바람을 백성들은 ‘처녀풍(處女風)’이라 하였다.

 

다산이 지은 염우부의 한 구절에 능수버들·소나무·단풍나무·향나무(檉松楓柙) 등 29종의 나무, 갓대·조릿대·해장대 등 6종의 대나무, 양하풀·여뀌·메밀·단수수 등 24종의 식물까지 모두 62종의 나무와 식물이 등장한다. 실학자의 눈에 비친 남도의 자연과 나무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처녀풍’이 불면서 ‘소금비’가 내려 그 많은 나무들이 뽑혀지고 나뒹굴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 <대동문화> 83호(2014년 7∙8월호) 28~31쪽

-특집 : 남도의 역사와 함께 해온 나무와 숲-

-2 : 남도 역사 속의 나무-

 

철쭉군락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유물 - 목기류가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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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존선사창성탑비(보물 제148호, 8884년 건립) 본문 17행에 “건원(乾元) 2년(759, 신라 경덕와 18) 특별히 교(敎)를 내려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세우게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다.(是以建元二年特敎植長生標柱至今存焉)”는 내용이 있다. ‘나무’로 보이는 ‘장생표주’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조선시대(1872년) 광양 남문 앞 좌우 비보숲 - 서수(西藪)와 남수(南藪), 지금도 유당공원 옆에 노거수림이 있다.

 

조선시대(1872년) 광주 유림수(柳林藪), 공북루 부근, 지금의 유동과 임동일대. 지금도 전남방직 옆에 노거수가 있다 

조선시대(1872년) 나주목 동문(동점문) 밖의 내목성(內木城)과 외목성(外木城), 동문 안의 목장(木檣)

조선시대(1872년) 함평 향교 앞 비보숲 임수(林藪), 지금은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이다.

함평 향교리 느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숲(천연기념물 제108호)

 

조선시대(1872년) 남평 십리송(十里松), 지금도 드들강(지석강)가에 솔숲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