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6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오언율시

향토학인 2016. 5. 6. 13:59

인지의 즐거움 026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오언율시

김희태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상단에 묵서로 된 오언율시가 있다. 이 시의 작자는 누구이며 언제 지어졌을까?

 

불교 경전이나 스님의 저술과 연관이 있거나 고전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다가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거의 같은 내용의 시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책에 실린 시는 같은데, 지은 이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동문선』은 석익장(釋益莊),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의 시와 여섯 글자가 표기가 다른데 의미는 유사한 내용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국역문은 4종이 있는데 끝에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

낙산사[석익장]

<동문선> 제9권

낙산사[유자량]

<신증동국여지승람>44 양양도호부

해안고절처(海岸孤絶處)

중유낙가봉(中有洛迦)

대성주불주(大聖住住)

보문봉불봉(普門)

명주비아욕(明珠非我欲)

청조시인봉(靑鳥是人逢*

단원창파상(但願波上)

친참만월용(親滿月容)

海岸高絶處

中有洛迦

大聖住

普門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逢

但願波上

滿月容

좌동

* 逢 : 일부자료(http://www.cha.go.kr/문화재검색)에서는 遂로 표기

                                   

    『동문선』은 조선시대 초기,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 1422~1492) 등이 처음 엮은 시문집이다. 『동문선』(제9권 五言律詩)에 “낙산사(洛山寺)”라는 제목으로 석익장(釋益莊)의 시가 있다. 

 

낙산사(洛山寺) 석익장(釋益莊)

 

海岸高絶處 해안 깎아지른 곳에

中有洛迦峯 그 가운데 낙가봉 있네

大聖住無住 대성은 머물지 않는 것으로 머무르고1)

普門封不封 보문2)은 봉하지 않는 것으로 봉했네

明珠非我欲 명주3)는 내 욕망이 아니로세

靑鳥是人逢 푸른 새4)는 그 분이사 만나네

但願洪波上 다만 원하기는 넓은 물결 위에

親瞻滿月容 만월용을 친히 한 번 뵈옵고저 

 

  1)  성(大聖)은 머물지 않는 것으로 머무르고 : 낙산사 바닷가의 굴(窟)은 관음대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는데, 불법(佛 法)에는 주(住)함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관음보살이 머물러도 머무르는 상(相)이 없다는 뜻이다.(『국역 동문선』 역주)

 2) 보문(普門) : 불법을 깨닫도록 열어 놓은 문

 3) 명주(明珠) : “신라 의상(義湘)법사가 낙산사 바다 돌 위에서 27일을 정근(精勤)하다가 몸을 바다에 던지니, 동해의 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 놓고 대성(大聖)이 굴 안에서 팔을 뻗쳐 손수 수정(水精) 염주를 주고 용도 또한 여의주(如意珠)와 옥을 바쳤는데, 절에 보배로 간직해 전해온다.” 이 시의 작자 익장(益莊)의 〈낙산사기(洛山寺記)〉에 이렇게 썼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 襄陽 佛宇』(『국역 동문선』역주)

4) 푸른 새 : 세상에서 전하기를, 굴 앞에 가서 지성으로 절하고 조아리면 푸른 새가 나타난다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 동문선』역주)

 

 

석 익장(釋益莊) 고려 후기의 스님이란 내용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다. 그런데 『동문선』(제27권 제고[制誥])에 ‘익장 원이 담령 대헐을 모두 선사로 삼는 관고[益莊元伊淡靈大歇各爲禪師官誥]’가 실려 있어 국가에서 선사의 직임을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고’를 지은 사람이 이규보[1168-1241]이다.

 

익장스님이 활동하고 있을 때 내려진 문서로 본다면 이규보와 비교하여 120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승려로 보인다. 『동문선』에 시(‘낙산사’) 1수가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낙산사기) 한 편이 전한다. 낙산사기는 낙산사의 창건설화를 주요 소재로 한 것이다.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 44, 양양도호부조 불우 낙산사조)

 

 

  『국역 동문선』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권44 襄陽 佛宇)에서는 낙산사 시를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의 작으로 적었으나, 제6행 시인봉(是人逢)에 따르면 석익장의 시가 옳은 듯하다.’는 주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 초기,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완성하였다가 1530년(중종 25)에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한 인문지리서이다. 권 44 양양도호부조 불우 낙산사조에 고려 유자량의 시로 기록하고 있다

    

     ○ 고려 유자량의 시에,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그 가운데 낙가봉(洛迦峯)이 있다.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다. 명주(明珠)는 내가 욕심내는 것 아니며,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하였다.

      

유자량[庾資諒, 1150(의종 4)∼1229(고종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연(湛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필(弼)의 손자이며, 공부시랑 응규(應圭)의 아들이다. 성품이 장중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16세 때부터 유가(儒家)의 자제들과 교우하였으나 무인(武人)들과도 교제를 하여,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교유하던 사람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음보(蔭補)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었으며, 이어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현령(龍岡縣令)이 되어서는 행정을 밝게 잘 처리하였다고 한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밖에 상의봉어(尙衣奉御)·시어사(侍御史)·호부낭중·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대부소경(大府少卿)·병부시랑·형부시랑·대부경(大府卿)·지삼사사(知三司事)·판대부사재사(判大府司宰事)·태자첨사(太子詹事)·판각문사(判閣門事)·지다방사(知茶房事)를 역임하였다.

 

1213년(강종2)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치사 후에는 은퇴한 재상들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또한 부처를 독실히 신봉하였다. 유자량의 묘지명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6과 동문선권122에 실려 있으며, 1229년(고종 16)에 이규보가 작성하였다. 본관지인 무송현茂松縣은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일원에 있던 고을이다.

 

   이상에서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의 오언율시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리고 유사한 시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작자가 서로 다른 점도 확인하였다. 두 책이 조선시대 초기의 문화 역량이 집대성된 관찬서 라는 점에서 섣불리 작자를 단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일종의 문학작품이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사상, 신앙(관음신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강진 무위사 백의관음도의 오언율시에 대한 자료가 더 찾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20090413)

 

국역문

<동문선>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역 동문선>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海岸高絶處

中有洛迦峯

大聖住無住

普門封不封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逢

但願洪波上

親瞻滿月容

해안 깎아지른 곳에

그 가운데 낙가봉 있네

대성은 머물지 않는 것으로 머무르고

보문은 봉하지 않는 것으로 봉했네

명주는 내 욕망이 아니로세

푸른 새는 그 분이사 만나네

다만 원하기는 넓은 물결 위에

만월용을 친히 한 번 뵈옵고저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다.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다.

명주는 내가 욕심내는 것 아니며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무위사 백의관음도

장충식교수 논문

강진군, <무위갑사>[양광식]

海岸孤絶處

中有洛迦峰

大聖住

普門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逢

但願波上

滿月容

바닷가 높은 벼랑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으니

대성은 머물러도 머문것이 아니네

보문은 만나도 만남이 없네

명주는 나의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건대 푸른 물결위에서

친히 만월같은 모습 뵈옵게 하옵소서

바닷가 외롭고 험준한 장소

천불봉에 관음도량 있다

부처님 계시든 아니 계시든

공덕과 신통력 해탈 하든 말든

빛 고운 구슬은 바램 아니나

서왕모 파랑새 나를 반기네

바램은 오직 새찬 파도에

달같은 얼굴 한번 보고 싶다

 

『고려사』,『고려사절요』,『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무장 인물조),

이규보, 益莊元伊淡靈大歇各爲禪師官誥, 『동문선』 제27권, 제고(制誥) ; 『東國李相國全集』권 제34

박용운, 1987,「고려시대의 茂松庾氏家門 분석」『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성춘경·이계표, 1989, 강진군의 불교유적, 『강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강진군, 167쪽

김용선,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장충식, 2001, 무위사 벽화 백의관음고, 『정토학연구』 제4집, 한국정토학회 ;  2004,『한국불교미술연구』, 시공사 

전남대박물관, 2015,명품도록』, 117~119쪽

 

* 이 자료를 찾아보게 된 것은 ‘궁금증’이 한 몫을 하긴 했지만,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2001.8.3 지정, 너비 280㎝, 높이 320㎝) 국보 지정신청 검토 과정에서 한발짝 더 들여 놓게 되었다. 2008년 봄에 국보 지정 논의를 했는데 8월 1일에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제1분과) 심의를 하여 국보 신청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여 2009년 4월에 국보 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그때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도 함께 신청했는데 아미타여래삼족벽화는 국보 제313호로 지정(2009.09.02일)되었다. 문화재청에서 함께 검토한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도 같은 날에 국보로 지정(국보 제314호)되었지만, 무위사 백의관음도 국보 지정은 아직은 미완이다.

 

* 이 자료를 확인(20090413)한 뒤 무위사 벽화의 묵서 게찬에 대하여 출전과 함께 자세한 해석을 하면서 백의관음도의 도상적 근거를 정리한 한 글을 보게 되었다. 이 글에 따르면 ‘유자량이 게찬을 지은 1197년(정사년) 이후 게송이 전래되다가 벽화가 완성되는 1476년경 벽화에 묵서했고, 그 뒤 『동문선』(1478년) 또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등재된 것이 분명해 진다’라 하여 작자[유자량]와 선후관계를 접근하고 있다. 장충식, 무위사 벽화 백의관음고(『정토학연구』 제4집, 2001) 참조. * 2009423 수정

  

* 2014년 12월 전남대박물관 소장유물을 배람하던 중 <유경현 묘지명(庾敬玄墓誌銘)>(유물 7052, 세로 50.0㎝, 가로 58.0㎝)을 보게 되었다. 명품 특별전을 기획하던 차, 황호균실장의 배려로 노기춘박사(서지학, 전남 문화재전문위원)와 함께. 묘지명은 훼손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유자량(庾資諒)인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는 기록은 확인되었다. 2015년에는 소장유물 해설 원고의뢰를 받았는데 ‘유경현 묘지명’도 포함되었다. 송일기교수(당시 전남대, 현 중앙대 교수)가 전남대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라 한다. 전남대박물관 명품 기획전은 2015.06.08일~09.25일 사이 열렸다. 전남대박물관 <명품도록>(2015. 117~119쪽)에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