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9 - 문화유산 정보의 쓰기와 읽기, 2012

향토학인 2016. 5. 20. 02:04

인지의 즐거움 029

  (20120413)

 

  

문화유산 정보, 쓰기와 읽기

-마한문화연구총서 40집~50집을 중심으로-

 

김희태

 

또 일을 저지른 것 같다. 호기심이 좀 많고 궁금하면 못 참는, 내가 생각해도 가끔은 깝깝한 그리 환영 받지 못하는 성격이 발동한 것이다. 그냥 있어도 되는데.. 말로 몇마디 해도 되는데... 호기심 많을 나이는 지났는데... 이런 저런 생각.

 

그런데 진즉부터 자리를 한번 하고 싶었다. 구성원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로서는.. 그건 지금 서두에 내건 ‘쓰기와 읽기’ 운운의 말을 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야 서로간에 인연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문화유산을 놓고, 방향은 다르지만 함께 고민한다는.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가 자리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은, ‘마한문화연구원’과의 인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 이랄까? 마한문화연구원의 한 직분을 맡고 있다. 그것이 ‘자의’와 ‘타의’가 섞였다는 것이다. 그 ‘어려운 시절’, 서로가 소통이 좀 부족한 채로 나는 어느날부터 그 ‘직분’을 맡고 있었다. 한참 뒤에 안일이다.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자의’와 ‘타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직분’을 맡았으면 뭔가를 해야 하고, 서로가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 1년 한두번 회의와 식사는 너무 의례적이고.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가진 고민의 일단을 풀어 보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 고민이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잘 알려진, 교과사격인 자료에 기록된,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아니면 전혀 잘 알려지지 않는 그러한 용어나 자료나 현장에 대해서 서로의 의문부호를 풀어 보자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앞에 제목으로 내 건 것이다.

 

문화유산, 문화재, 유적, 유물, 유구, 문물, 고적 등등

여러 용어로 쓰고 있다. 특히 매장문화재 발굴은 ‘매장’과 ‘발굴’이라는 것 때문에 전문성을 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발굴조사보고서는 기록자료로서 중요하다. 그런데 ‘매장’ 이기 때문에 현장도 ‘매장’ 이지만, 그 가치도 ‘매장’되어 있다. 그래서 문화재관계법령에서도 2년인가 기간을 두고 있다. 물론 이는 정부의 회계연도와도 안맞아 가끔은 ‘감사를 당하여’ 더 많은 고민이 쌓이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언젠가 도움되는 일을 했으면 하고 있는데... 파일 피일, 시간만 가고. 자꾸 다른 일은 겹치고. 심지어 ‘은둔’을 해야 할 정도로 내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지고... 그러다가 올들어 감사와 이사회가 있던 날, 모처럼 차를 가져가게 되었고, 그날따라 귀한 성과물인 발굴조사보고서를 한 타래 싣고 올 수 있었다. 감사를 하면서 역사용어 표기가 일부 오기(三國史記地理志 → 誌로 표기, 47집 30쪽)되어 있어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집에서 한번 넘겨 보게 되었다.

 

그래서 몇군데 이런 내용이 함께 들어 갔으면 하는 곳, 중복된 곳, 빠진 곳 등 몇군데가 눈에 띠었다. 그러다가 다시 조근우원장을 만날 기회[여수 석창 석보성 국가 사적 지정 조사, 201600406]가 있어, 그 같은 시간을 한번 가졌으면 하고 넌지시 말했다. 마침 직무연찬회도 매월 2회 하고 있다는 말도 듣고 해서.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원장에게도 나의 내심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 된 것을 짚어 주는 자리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다. 고민의 일단을, 의문부호를 함께 풀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 짧았음을 알게 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 평가 지침을 받아 보니, 거기에 내가 하고자 했던 말들, 고민을 했던 부분들이 대 부분 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보고서가 간행되고 있었는데, 나의 오랜 생각만을 하다가... 그런데 물러 설 수 도 없다. 그래서 그럴듯하게 제목을 붙인 것이다. ‘문화유산 정보의 쓰기와 읽기’ [파일 참조]

 

이번 발표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1985년인가 문화재 발굴 첫 공부현장이었던 영암 내동리 초분골 고분(속칭 쌍무덤, 국립광주박물관 발굴, 서성훈선생님, 성락준님, 조현종님 등) 발굴현장의 야장도 찾을 수 있어 함께 보았다. 당시에 김삼기 학인(현 문화재청)과 함께 참여 했다. 학부시절의 야장인데 참여한 인부들의 명단도 기록이 보였다. 

 

문화재에 대해서도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 들을 것 자꾸 글로 써보고 말로 풀어 보려 하였다. ‘문화재학’이란 용어도 써 보았다. 일본과 중국을 돌아보면서 비교도 하면서 차츰 외연(?)을 넓힌 것이 ‘문화재를 위하여-문화재학서설-’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때도 ‘문화재학’은 주어가 아닌 부제로 자리하였다. 출판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수요가 꽤 있다 보니 일부 수정해 재판을 내면서 ‘문화재학 이론과 실제’라 하였다.

   

  - 김희태, 일본의 문화재관리와 유적 보존, <전남문화재> 제4집, 전라남도, 1991. 239쪽~298쪽

  - 김희태, 중국의 문화재관리 행정, <전남문화재> 제7집[별쇄], 전라남도, 1994. 1쪽~50쪽

  - 김희태, 조웅, 김경칠, <문화재를 위하여> -문화재학 서설-, 향지사, 1997

  - 김희태, 조웅, 김경칠, <문화재학 이론과 실제>-문화재학 입문-, 향지사, 1998

 

* ‘관심’이란 때로는 의외의 자료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農樂’이란 용어는 일본강점기 시절 일인들이 처음 사용한 용어라는 것이 민속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1600년대 인물의 문집에서 농악이란 용어를 찾아 냈다. ‘農樂’ 용어의 나이가 70살쯤에서 360살로 올라간 것이다. 고전 용어가 된 것이다. 민속학자에게 제공하니 꽤나 흥분할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란 말도 들었다. 그것도 1996년인가 <장흥문집해제>를 집필할 때 확인했지만 최근에야 한시를 번역하여 제공한 것이다.(이 '고전 용어 농악'에 대해서는 2011.09.08일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 流頭觀農樂

우뚝 선 한 깃발에 동풍이 휘몰아 불 때 匆旗一建颺東風

너른 들에 북 치며 색동옷 입고 너울너울 擊鼓郊原舞綵童

변방 일 이미 평안하고 농사철 빨라지니 邊事已平農事早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을 비로소 깨달았네 始覺吾君聖德鴻

남파 안유신(安由愼, 1580~1657), <남파유고>

 

연찬회에서는 사진과 자료를 보면서 PPT로 진행(120분)하고 토론을 하였다. 마한문화연구원 총서를 보면서 서술에서 추가했으면 하는 것, 이해를 위해서 더 있었으면 하는 것, 오자나 탈자, 서술의 오류, 참고할 자료, 선사 고대유적이지만 현재의 행정지명이나 마을에 대한 연혁도 필요하다는 점 따위를 짚어 보았다. 

 

예를 들면, 보고서 앞 부분에 해당 지역의 고고 역사적 환경 분야에 이미 조사 되어 보고서가 나와 있는데도 누락된 경우가 있다. 컴퓨터 시대의  맹점일 수도 있다. 한번 정리해 놓은 내용(파일)을 '관행'으로 그대로 넣다 보니, 한번 놓지면 다음에도 빠질 수 밖에 없다. 47집(순천 성산 송산 유적)의 경우, 고고 역사적 환경 편에서 <승주 우산리 고인돌>(목포대박물관 학술총서31, 1993) 언급이 누락되었다. 그때 그때 '확인(보완)'이 필요하다. 

 

또 하나 유적의 설명 관련해서 마한 총서는 아니지만, 이미 간행된 다른  사례를 보면서 제안도 하였다. 봉수나 성곽은 조선시대의 유적이 많기 때문에 서술에서 반드시 연혁을 포함하여야 한다. 현재 위치, 관련 기록, 유적 현상으로만 설명하다 보면, 설치 당시의 역사연혁은 빠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 고고학전문사전-성곽 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이다. 이 책에 실린 '전일산 봉수(寶城 全日山 烽燧)'의 경우, 그 소재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했는데 1914년에 보성(군)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장흥에 속했음을 명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용중에 '세종실록지리지 장흥도호부 부의 동쪽에 있는 전내현 봉수라는 명칭으로'라는 설명이 있지만, 이 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앞 부분의 유적 위치만을 염두에 두고 조선시대도 '보성 전일산봉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마련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명칭 부여기준에 따르면 행정지명을 앞에 넣도록 되어 있어, '전일산 봉수'가 문화재 지정이 된다면 '보성 전일산 봉수'로 명명된다. 그런데 내용에 조선시대 당시 장흥에 속했던 내용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 이후에는 해당 유적의 설치, 운영 당시의 역사(장흥에 속한)는 간데 없고, '보성 전일산봉수'로만 남을 것이다. 심각한 오류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설명만 참고한다면, 더 필요한 기록자료를 찾을 때 습관적으로 보성 쪽 자료를 뒤질 것이지만, 장흥 쪽 자료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유적의 조사와 설명 기술에서 설치 운영 당시의 역사연혁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다른 표제어도 검토할 부분이 많다. '완도 가리포진성'은 조선시대 수군진성으로 기능할 때에는 강진에 속했고, '여수 진례산 봉수'는그 봉수가 운영될 때는 순천도호부에 속한 땅이었는데, 언급이 누락되어 있다. <고고학전문사전>도 집필자들이 집필 당시 다른 기관이나 전문가 조사자료, 향토지 등을 참고했겠지만. 다시 쓰고 인용할 때에는 최대한 확인 보완을 해 주어야 한다.   

 

* 2012.04.13 마한문화연구원 직무연찬회

 

* 2008.1.22 마한문화연구원

 

보성 전일산 봉수 설명(<한국고고학고고학사전>-성곽 봉수편-) '봉수'를 운영하던 시기(조선시대)의 유적 소재(장흥도호부)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전 기간을 장흥도호부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야 보성군으로 편입된다.

완도 가리포진성 설명(윗책) 수군성인 가리포진성이 설치(1521년)되었다가 폐진(1895년)된 전 기간을 강진현에 속해 있었다. 1896년에 완도군이 신설되면서 비로소 완도군에 편입된 곳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해 주어야 한다. 


가리포진 설진 시기와 축성 시기는 기록에 따라 조금 다르다. 1530년 간행된 <신중동국여지승람> 37권 강진현 관방조 신증에 "가리포진(加里浦鎭) : 완도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3리이다. 금상 16(1521)에 왜구의 요로이므로 비로소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僉使) 한 사람을 두고 달량(達梁)의 수군을 아울러 관장케 한다."는 기록이 있다. (위 오른족 두번째 아래부터 3번째줄까지) 금상(今上)은 책을 간행(1530)할 당시 임금(중종)을 말하고, 금상 16년은 152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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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병조 판서 장순손(張順孫)이 아뢰기를, “미조항(彌助項), 방답(防踏), 가리포(加里浦) 등에 이미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긴요한 방어지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중종 17년 임오(1522) 5월 임자(7)조이다. (아래 왼쪽에서 3줄 하단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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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에 군사기구로서 가리포진을 설진(設鎭)하고 1522년에 방어시설로서 진성(鎭城)을 축성(築城)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듯 싶다. <한국고고학전문사전-성곽·봉수편->에도 조선시대 강진현 관할 지역이라는 점과 설진, 축성에 대한 기록도 더 제시해 주어여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여수 진례산 봉수 설명(윗책) '봉수'가 은영되던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이 순천도호부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여수현이나 여수도호부가 있긴 햇으나 잠시였고, 1896년에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여수에 속하게 된다. '진례산 봉수' 유적이 여수에 속하게 된 때에는 봉수' 제도가 폐지된 이후이다. 이러한 설명이 곁들어져야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