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22 - 일본 표류한 부처님은 '日'자를 표기하시오 -정다산이 대흥사에 보내다

향토학인 2017. 8. 27. 20:44

인지의 즐거움122

  

일본 표류한 천불상 부처님은 '日'자를 표기하시오

-정다산이 대흥사 완호스님에게 보낸 편지-

 

김희태

  

1818년 무인년 8월 11일

강진에서 유배살이 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대흥사 완호(玩虎)스님에게 편지를 쓴다.

 

천불전에 모실 돌부처님 가운데

일본으로 표류했던 700여분이

무사히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를 겸해 글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글 가운데

일본서 돌아 온 부처님의 등에

'일(日)'자를 써 놓아

뒷날 혼동되지 않도록 당부를 한다.

 

천불 부처님 등에 ‘日’자가 있다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고

언젠가 ‘日’자를 확인할 수 있으려니

성보를 차마 보기 어려워 차일피일이다.

  

그러던 차 일자 표기 제안을 다산선생이 했다는 편지롤 보게 된 것. 그 사연을 헤적여 본다. 먼저 편지를 읽어 보자.

 

“작년 겨울 석불이 동쪽으로 떠내려가 눈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누군들 노인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바람을 받아 배가 와서 뜻하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누군들 노인을 위해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소동파의 <대아라한찬>에 말하기를 “어느 것이 셋이고 어느 것이 일곱인지 아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이제 대둔사의 석불도 또한 이같은 염려가 있습니다. 훗날 뉘라서 어느 것이 먼저 온 300개의 부처이고, 어느 것이 동쪽으로 떠내려갔던 700개의 부처인 줄 알겠습니까? 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모두 작은 전자로 ‘日’자를 써서 표시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둔 뒤라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뜻은 모름지기 초의 의순과 함께 의논하십시오. 편지를 받고서 기뻤는데, 게다가 온 사람이 안색이 전보다 좋아졌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다행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입니다. 부쳐주신 훌륭한 향은 <주역>을 공부할 때 사르기에 마침 맞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무인년(1818) 8월 11일 다수 돈수.

 

다산이 완호에게 보낸 편지로 월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민교수(한양대)가 <대흥사 천불전 일본 표류와 조선표객도>(《문헌과 해석》 2009년 겨울호 ; 《다산의 재발견》, 2011)에 소개하였다.

 

1817년 1월 대흥사 천불전에 천불 부처님을 모시고자 발원한다. 당시 다불(多佛) 제작에 널리 쓰이던 석재 산지인 경주 불석산의 기림사가 제작지로 선택된다. 1817년 8월 7일부터 시작 해 1817년 10월 20일까지 조상이 이루어 진다. 10월 18일에 경산 화원 9명이 333불 점안, 10월 19일 영남 화원 24명 333불 점안, 10월 20일 전라 화원 11명 333불 점안을 한다. 각 처에서 불러 온 화원이 43명.

 

이 같은 조성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천불전조성약기>, 《일본표해록》, <천불조성록> 따위. 제작 시기, 장소, 수량, 장인 집단, 시주, 이운, 표류, 귀환 과정과 참여자도 알 수 있다. 그러한 기록 가운데 풍계 현정(楓溪 賢正) 선사의 《일본표해록》은 표류에 대해서 자세하다. 대마도주의 서계, 표류민 진술서와 서계, 『漂民被仰上』진술서 따위도 천불 부처님의 표착과 귀환 행로 이해에 도움이 된다.《일본표해록》은 국역본도 나왔다. 김상현 역주, 《일본표해록》,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천불조성록(千佛造成錄)>은 천불상을 조성할 때 전국의 신도로부터 시주금을 받으면서 명단을 모두 기록해 놓았는데, 근래에 그 자료가 발견되었다. 1006불(佛)의 명호(名號) 아래에 전국 54개 사찰의 승려 680명, 재가자 676명의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42명의 비구니 법명도 포함되어 있다. 사찰은 경기도 4개소, 강원도 1개소, 경상도 16개소, 전라도 30개소, 충청도 1개소, 미상 2 개소이다. 전각과 불상을 조성하는데 1천 명이 넘는 시주자가 전국에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고 또 불교계의 불사 형태를 알 수 있다. <천불조성록(千佛造成錄)>(裏題 千佛新造成同參祝願錄)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BC) 사업단’에서 담양 용흥사에서 발견하였다. 이종수 교수(순천대)가 <응송 박영희 소장 불교문헌의 종류와 가치>(《불교학보》68, 2014), <해남 대흥사의 천불 조성과 그 시주자들>(《강좌미술사》43, 2014)로 소개하였다.

  

경주에서 조성된 천불 부처님은 해남으로 두척의 배로 옮기게 된다. 1817년 11월 16일 경주 장진포로 운송하였고, 18일에는 완도 상선에 천불을 싣고 출발하여 23일 장생포에서 완도배와 홍원배로 나누어 싣고 출발하였다. 홍원상선 큰 배에는 768좌, 완도 상선 작은배에는 232좌를 봉안하고 25일 군령포를 출발한 것이다. 이날 완도 상선은 동래로 복귀했는데 홍원상선은 동래 앞바다 중류에서 표류를 시작하였다.

 

결국 768좌의 부처님을 모시고 이운하던 큰배 홍원상선은 표류하여 일본까지 간다. 선원과 승려는27인. 1817년 11월 25일 표류를 시작하여 29일에는 오시마(筑前州 宗像郡 大島浦)에 표착하였다. 이후 다시 동래 부산진으로 돌아 오기까지의 여정을 보자.

 

* 천불상 768좌 부처님의 일본 표류 행로

1817. 11.25

완도 홍원 상선, 울산 군령포 출발, 완도 상선은 동래로 복귀, 홍원상선은 동래 앞바다 중류에서 표류시작. 천불상 768좌. 선원과 승려 27인.

1817. 11.27

석양에 흰 돛단배가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발견

1817. 11.28

큐슈(九州) 포구 마을 발견

1817. 11.29

筑前州 宗像郡 大島浦 표착, 그곳 관리가 와서 조사, 오시마에서 5일 체류, 종상군에서 飛船 40척을 보내서 호송시작

1817. 12.3

종상군 津屋崎浦 정박, 바람이 없어 10일간 체류

오시마에서 근처 다른 곳으로 배로 이동

1817. 12.10

그곳에서 배를 띄움, 藍島浦 거쳐 唐白浦 정박, 바람없어 9일간 체류

1817. 12.23

柏島

1817. 12.24

呼子島 도착, 바람없어 5일간 체류

1817. 12.28

三栗島

1817. 12.29

西島

1818. 1.2

나가사키(長崎) 도착

1818. 4.14

나가사키 출항, 道馬峙 도착, 10리 이동, 나흘 체류

1818. 4.17 경

福田浦 도착, 40리 이동, 2일 체류

1818. 4.18 경

平戶島 도착, 300리 이동

1818. 4.20 경

一崎島 도착, 500리 이동, 11일 체류

1818. 5.3

一崎島 출발, 대마도 도착, 480리 이동

1818. 5.4

대마도 도착

1818. 6.17

대마도 발선, 化泉村 도착, 300리 이동

1818. 6.18

대마도 북쪽 끝 化泉村 출발, 대풍소 도착, 60리 이동

1818. 6.19 경

웅천 가덕도 천성진(天成鎭)도착, 480리 이동

1818. 6.27

동래 부산진 앞바다 도착, 동래부 조사 받음

1818. 7.5

밤에 동래 출발

* 정성일, <해남 대둔사 승려의 일본표착과 체험(1817~1818)>(《한일관계사연구》32, 2009)에서 발췌 편집

 

이듬해 1818년 웅천 가덕도 천성진(天成鎭)으로 도착했다가 6월 27일 동래 부산진 앞바다에 도착했다. 7개월만에 고국으로 돌아 온다. 동래부에서 조사를 받고 7월 5일 출발해 왜관(7.6), 통영(7.10), 장흥 향일도(7.13), 해남 앞바다에 도착(7.14)했다. 7월 15일 대흥사(대둔사) 절로 올라갔고 8월 15일 천불존상을 봉안하였다.

 

이때 일본에 표류되었다가 돌아온 부처님의 어깨 위에 일본을 뜻하는 ‘日’자를 적어 둔 것이다. 정다산이 편지를 보낸 것이 8월 11일이니, 이 다산의 제안에 따라 ‘日’자 표기를 하게 된 것이다.


해남 대흥사 천불상 배면의 '日'자 기록(<해남 대흥사의 천불 조성과 그 시주자들>(이종수)에서 인용)



1818.8.11일 다산 정약용이 대흥사 완호스님에게 보낸 편지. 일본에서 돌아 온 부처님은 '日'자를 표기해 뒷날 혼동되지 않게하라는 제언이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 줄에 '必於佛背 皆以小篆寫日字爲標 以識其自日本來然後 庶無相混之歎(반드시 부처의 등에다 모두 작은 전자로 ‘日’자를 써서 표시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둔 뒤라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월전미술관 소장, 《다산의 재발견》(정민)에서 인용)


해남 대흥사 천불전 천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