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93
문화유산 원형 찾기3
-나주읍성 북문(북망문)과 기록-
김희태
나주목사 유명건(兪命建, 1664~1724) 만시(挽詩)
여호 박필주(黎湖 朴弼周, 1680~1748)는
유명건이 세상을 떠나자 만시를 남긴다. 칠언율시 2수. 그 가운데 일부.
南國煙霞新活計 남쪽 나라 안개와 노을 새 삶을 계획하고
北門雨□舊吟詩 북쪽 대문 □와 비 옛 시를 읊조리네
覺今亭上三更月 지금 삼경의 달 정자에 비침을 아니
每夜中天一色悲 매양 한밤중 하늘빛 한결같이 슬프겠지
* □ 一字缺
시의 제목이 '兪羅州中强[命建]挽(나주목사 중강 유명건 만시)'이다.
제목의 '羅州'와 내용의 '北門'이 우선 눈에 들어 왔다. '나주 북문'
비 오는 날 나주 북문에 올라 시를 읊었던 건 옛 일이 되버리고....
그런데 아직은 더 찾아야 한다.
제목 '나주'는 망자의 관직명이다. 지명과는 달리 봐야 한다.
또 '나주 북문'으로 보려면 만시를 지은 박필주와 나주의 연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지은 글 가운데 나주와 연관시킬만한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유명건이 나주목사 재임 때 박필주가 나주를 왔을 수도 있는데 자료로는 확인이 어렵다. 박필주가 심원 나준(深源 羅浚)의 묘표를 짓지만 나준도 나주에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유명건의 호는 중강(仲强), 본관은 기계(杞溪), 1702년(숙종 28) 생원시 합격, 음사로 관직에 들어 1720년(숙종 46).8~1722년(경종 2).4월 나주목사를 지낸다. 해주, 안악, 한산, 담양 등지 수령도 지냈다.
유명건의 묘갈명(1758년, 이재 찬, 경기 문화재자료 45호 )에는 '나주는 번극하다고 이름이 있는 고을이었으나 씻은 듯이 일이 없어지고 관엄을 갖추었으니 치화가 크게 행하여졌다(州號煩劇 而沛然若無事 寬嚴相濟 治化大行).'고 나주목사 재임기의 행적을 평하였다.
행적으로 보면 만시의 '南國'도 나주를 연상하게 한다. 그 뒷 구절의 '亭'도 연관이 된다면 좋을듯 싶다.
유명건의 나주목사 재임 전후의 정세와 비겨 보면 북문은 궁궐(창경궁)의 문(宣仁門)일 수도 있다. 나주 북망문과 창경궁 선인문, 갈길은 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은 분명 있을게다.
나주 북문의 기록이 찾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2016.11.18) 자료를 뒤적였다. 그리고 동지들과 공유하였다. 이수진, 이정호, 윤여정, 정경성, 김종순, 성대철. 나주읍성과 금성관으로 인해 고민도 많고 할일도 남아 있던 사람들.
소통하다보니 몇가지 더 찾았다. <금성정의록>에 북문을 언급한 기록이 있다.
◯ 문낙삼 별장에게는 북문을 맡도록 했다
이 내용은 갑편과 을편에 나온다. 을편 기록은 <금성토평비>. 건조물 구조 등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북문의 기능과 연결시킬 만하다.
또 하나 기록.
◯ 민태수(민공, 민종열)는 영장 이원우와 같이 북문에 올라가 옹성막에 들러 근무하는 이졸들을 위로했다.(閔公 與營將李源佑 登北門瓮城幕 撫循吏卒)
11월 23일 기록
북문과 옹성이 나온다. 그리고 '올라가서(登)'와 '幕'을 눈여겨 볼만하다.
어느 성문이든지 오르게는 되어 있을 터이지만, 어떻든 구조를 유추하게 한다.
'幕'은 북문이나 옹성 자체를 지칭할 수도 있다. 이졸들이 번을 서고 있는 시설물의 의미. 다르게 보면 '막사' 등 따로 시설물을 설치 한 것으로도 보인다. 어느 경우든 방어를 위해 군사들이 주둔했던 게다.
끝의 '撫循吏卒'은 '순리를 위로했다'고 국역했지만, '이졸'을 '무순' 했다로 보아야 한다. '순리'라는 용어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관리'의 뜻이라기 보다 명령에 따라 배치된 '이졸'로 보아야 시대상이 맞다. 어서 빨리 (북원될) 북문에 올라가 천년고도를 조망하고 싶다.(2015.12.26.)
또 다른 자료. 동학농민혁명기에 나주에 들른 일본군이 남긴 ‘돌터널같은 사대문’, ‘북문을 출발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참여했던 일본군(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 쿠스노 비요키치[楠美代吉] 상등병)이 남긴 종군일기(1894.7.23.~1895.12.9., 길이 9미터 23센티, 폭 34센티 두루말이 문서). 2012년 3월에 기록자의 출생지인 일본 토쿠시마현(德島縣) 요시노카와시(吉野川市)에서 발견되었다. 원광대 박맹수 교수가 확인하였고, 한일 전문가들이 동학전적지를 답사할 때(2016.10.19.~22, 진도, 해남, 강진, 화순, 나주) 자료로 제공되었다. 일기 기록을 보자.
◯ 1895년 2월 4일. 오후 5시에 나주부에 도착하였다. ... 서남쪽으로 산을 둘러 싸고 30여척의 석벽을 주위에 쌓고, 4대문을 돌터널로 만들었다. 요새가 견고한 곳으로 성안에는 4만여호가 있다.
◯ 1895년 2월 8일. 오전 8시 나주를 출발했다. 나주 북문을 출발하여 행군했다. 오후 3시 30분에 광주에 도착하여 숙영하였다.
나주성의 성문을 ‘돌터널’이라고 표현했다. 터널은 천정을 반원형으로 하기 때문에 ‘홍예식’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이 일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일본군(동학농민군 학살전담부대)의 ‘폭압적 만행’이 그야말로 절절하게 적혀 있다는 점이다. ‘남문 부근 작은 산에는 사람의 시체가 쌓여서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죽인 것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으며, 시체를 버린 것이 680명에 달하였다’,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하얀 은(白銀)처럼 얼어 붙어 있었다’(1895년 2월 4일) 등등.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 이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 보겠다.
일본군의 일기이지만 ‘돌터널’ 기록에 이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기록을 또 보게 되었다. 나주읍성 북망문(북문)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내용. ‘홍문(虹門)’. 두어줄 간략한 내용이지만, 앞서 말한 고민많고 할 일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기록.
◯ <속수나주지(續修羅州誌)> 관사(官舍)조
북망문은 (나)주성의 북문으로 (개구부 구조는) 홍문이다.(北望門 州城北門 虹門)
근대기의 짧은 내용이지만 기능과 구조를 명확히 하고 있다. 나주읍성의 북문이고 구조는 홍문이라는 것. 홍문은 출입시설이 홍예식, 즉 무지개 형식으로 된 구조. 홍교를 연상하면 된다.
대부분의 성곽과 문루는 1895년에 구제도가 폐지되면서 기능이 다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상 구조물이 거의 남지 않았다. 발굴조사를 하더라도 하부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지만, 지상 구조물에 대해서는 사실상 ‘원형’을 알기는 어려운 셈. 건조물이 들어선다 해도 조사 당시나 복원 시점의 논의 의견에 따라 좌지우지 되기 십상. 다행히 사진자료라도 남아 있는 경우는 예외이지만.
나주읍성은 4개소의 성문이 있었다. 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 남고문이 제일 먼저 복원되었다. 당시 국가 사적 명칭은 나주읍성 남문지. 남고문이 복원된 뒤 발굴조사, 학술조사 등을 거치고 토지매입과 문화재구역 확대를 하면서 국가 사적 명칭도 나주읍성으로 제 이름을 찾았다. 동점문과 서성문 복원에 이어 사대문 복원의 대미를 북망문 준공으로 하려던 계획. 그만 구조 부분에 있어 논란의 야기되어 멈칫 거린 것.
◯ <속수나주지>의 성문 기록
동점문은 (나)주성의 동문으로 (문루는) 2층이고 (개구부 구조는) 홍문이다.(東漸門 州城東門 二層虹門)
남고문은 (나)주성의 남문으로 2층이고 홍문이다.(東漸門 州城南門 二層虹門)
서성문은 (나)주성의 서문이다.(西城門 州城西門)
동문과 남문은 이층문루이고 개구부는 홍문, 북문은 개구부가 홍문이다. 서문은 구조에 대한 내용은 표기하지 않고 있다.
성문을 설치하기 위해 성벽에 열어 놓은 개구부는 모양에 따라 개거식, 평거식, 홍예식, 현문식으로 나눌 수 있다.
개거식(開据式)은 성벽에 뚫어 놓은 개구부 상부가 열려 있다. 토성의 성문은 개거식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석성도 개거식에 문루를 올린 것이 일반적이다.
평거식(平据式)은 개구부 양쪽 성벽에 긴 장대석을 건너질러 평석교처럼 만든 성문이다. 석재는 길이의 한계가 있어 폭이 작은 성문이나 암문, 수문 등에 이용되었다.
홍예식(虹霓式)은 개구부를 홍예로 만든 것이다. 홍예식은 석교나 석실고분 등에도 많이 사용하는 구조법으로 석재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구조법이다. 홍예식은 도성처럼 규모와 격식이 있는 성문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대개 반원형 홍예를 사용했다. 홍예문의 경우 성벽 두께 만큼 전체를 홍예로 튼 것은 드물고 대개는 내외측만 홍예를 튼다. 그 사이는 문루 하부로 마루 귀틀 아래에 천장을 설치하여 마감한다.
현문식(懸門式)은 다락문형식이라고 하는데 개구부가 성벽의 일정 높이에서 시작되는 형식이다. 옹성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만들기 힘든 산성에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민많고 할 일 많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주민, 남도민 모두가 북문에 올라 고도 나주를 조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2018년이면 전라도(全羅道, 全州+羅州) 지명 탄생 천년. 정명(定名), 정도(定道), 개도(開道) 1000년. 그 중심 ‘羅州’에서, 북망문(北望門)에서, 대륙(北)을 바라보며(望) 태평가를 읊으리.
<속수 나주지> 관사조
제금헌, 정수루에 이어 4개소의 성문(동점문, 남고문, 서성문, 북망문)의 위치, 기능,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 '홍문(虹門) 기록이 뚜렷하게 보인다."
성문 개구부의 구조 형식
여호 박필주(1680~1748)의 나주목사 유명건(1664~1724) 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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