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76 - 민간기록과 구전을 통해 본 ‘죽동’ -곡성 죽동3-

향토학인 2017. 2. 13. 03:35

인지의 즐거움076


민간기록과 구전을 통해 본 ‘죽동’
-곡성 죽동3-


김희태


앞에서는 관찬(官撰) 기록을 통하여 ‘죽동’의 유래와 연원을 찾아보았다. 그러면 민간의 기록이나 구전으로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우선 『마을유래지』(곡성군, 2012 ; 곡성군청 누리집)의 다음 내용을 보자.


  죽동리 방죽굴(防竹굴) 마을(竹洞里) : 고려시대 중엽 서씨가 촌을 열었고, 그 뒤 전씨가 들어 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문(李門, 里門)이란 사람이 이곳에 방죽을 파서 만들었다 전하는데 이후 방죽골로 부르기도 한다. 1740년대 나주정씨 정지묵이 나주 남평에서 이주했다. 조선시대에는 도상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죽+마을>방죽말>방축말, 방죽+골>방죽관>방죽동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방자를 빼고 죽동리라 하고 곡성면(읍)에 편입 현재에 이른다. 호남좌도농악인 죽동농악이 전승되고 있다. 마을에 농악을 계승하기 위한 민속전수관이 있다.


위 내용에서 보면 고려 중기 서씨 개촌, 전씨 입촌, 조선시대 1740년대 나주정씨 입향의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조선시대 도상면에 속한 지역으로 ‘방죽+마을’이 ‘방죽골’, ‘방죽동’, ‘죽동’으로 변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뒷부분은 관찬 기록을 통하여 살펴본바 있음으로 입향 개촌 자료를 알아보자.


한 마을의 입향유래는 지형과 지세나 유적과 유물, 현재 살고 있는 성씨의 입촌과 세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죽동리는, 동네는 크고 곡성읍 치소와 가깝지만 오래된 세거 성씨를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읍내 지역으로서 이동이 많았던 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을 유래에서 설명하고 있는 서씨나 전씨에 대한 자료도 탐문하였으나 채록하지 못하였다. 다만 1740년대 나주정씨와 관련될만한 자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1915년에는 곡성군 곡성면 방죽동 2통 10호에 살던 정남주(丁南注)가 9대조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정창덕(丁昌德)의 부인 정부인 오씨(貞夫人吳氏)의 무덤을 남평헌병파견소(南平憲兵派遣所) 헌병군조 산치위차(山峙爲次)에 신고하는 문서(墓籍屆, 23.5cm×32.0cm)가 확인된다. 오씨의 무덤은 나주군 남평면 노동리에 위치하며 문서에는 오씨의 사망연월일(1731년[享保 6년] 5월 16일)과 제주의 주소, 성명이 규격 종이에 기록되었다. 망자 오씨는 본관이 금성(錦城)이고 제주는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에 사는 정봉한(丁奉翰)이다. 나주정씨가(정문찬)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하나는 1915년 11월에 방죽동에 사는 정남주가 7대조 정사묵(丁思默, 11735~1771)의 무덤을 남평헌병파견소 헌병군조 산치위차(山峙爲次)에게 신고하는 문서이다. 정사묵은 자가 군중(君重)이고 무덤은 나주군 남평면 노동리에 위치하며 문서에는 정사묵의 사망연월일(1771.09.03)과 제주의 주소, 성명이 기록되었다.(박선미, 1915년 오씨 묘적계/1915년 정사묵 묘적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포털[http://203.254.129.108].)


이 문서를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죽동리로 되었지만 민간에서는 방죽리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마을유래지에 설명하고 있는 1740년대 나주정씨 입촌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즉 이 문서 기록자의 본관이 나주 별칭인 ‘금성’이라는 점에서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마을유래지에서 ‘나주정씨 정지묵’이라 언급하고 있는데 묘적계에 ‘정사묵’이라 하여 항렬(行列)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1915년 오씨 묘적계(방죽동 2통 10호 정남주 신고)(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포털 자료)

 

1924년 5월 19일에 죽동리 서지상(西池上)에 지은 곡성 양노당 낙성식을 갖는다. 죽동리의 김영일(金永一)씨 등 여러사람이 발기하여 수백원의 금전을 들여 양노하기 위하여 우뚝한 정자를 짓고 정자 명칭은 양노당(養老堂)이라 한다.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는데 조선 예기(藝妓)의 가무가 있었다.(<매일신보(每日申報)> 1924년 05월 23일자[금] 4면 4단)


주민들에 따르면 저수지 쪽에서 죽동리로 들어가는 입구의 논에 활터(반구정)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부근과 연관되지 않을까 싶다. 신문기사에서도 ‘서지상’이라 하여 위치가 저수지와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예기’가 가무하는 소리에 백발이 성성한 주민들이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예기’는 전문 예능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장악원 등에서 전문 예술인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예기조합’이 만들어지고 ‘예기취체규칙’도 제정되는 등 ‘일본식’이 더해지기도 한다. 어떻든 ‘조선 예기’로 지칭되는 전문 예인들이 1924년에 곡성 죽동리에서 공연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931년 4월 1일부터 죽동리에 문자보급운동(文字普及運動)의 일환으로 야학회를 개최하여 문맹(文盲)을 퇴치하고자 하였다. 학과는 조선어, 일본어(‘國語’로 표기함), 산술(算術)이며 강사는 정해지지 않았다. 곡성면 죽동리 동회(洞會)는 6년만에 소집을 보게 되어 이를 기회로 야학회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매일신보(每日申報)> 1931년 03월 26일자[목] 6면 3단)


문자보급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한 농민·농촌 계발 운동이다. 문맹 퇴치 운동 또는 한글 보급 운동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우리 글인 한글을 보급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자는 것이다. 당시 조선인의 문맹률은 90%에 이르렀는데, 방학을 이용해 고향에 내려간 학생들이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신문을 활용해 일반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참가한 학생은 1929년에 409명, 1930년에 900여 명으로 46개교 학생이었다. 조선일보사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대로’라는 구호가 박힌『한글원본』이라는 책을 배포했고, 1930년 문자 보급가까지 공모해 신년호에 발표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조선어학회에서는 전국 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다. 이 같은 사회 추세에 따라 곡성 죽동리에서도 문자보급운동으로 야학회가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양로당 낙성식 기사/1931년 문자보급운동 야학설립 기사(매일신보)(미디어가온 고신문[http://www.mediagaon.or.kr] 자료)


※김희태, 죽동의 유래와 곡성의 역사, <곡성 죽동농악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농악학술총서5-, 송기태·김현숙·박혜영·김희태, 민속원, 2015, 19~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