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78
호남좌도의 본 터, 곡성과 옥과
-곡성 죽동5-
김희태
이제까지 ‘죽동’의 유래를 관찬 기록과 민간 자료, 구전 내용 따위를 토대로 정리 하였다. 아울러 죽동이 속한 곡성읍의 연혁과 1910년께의 지명자료도 살펴보았다. 기존의 정리 방식과는 다르게 마을에서 고을로 나가는 정리 방식이다. 고을의 입장에서 들여다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을의 입장에서 내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마지막으로 곡성과 옥과, 호남좌도의 본터에 대한 연혁 변천을 정리해 보자. 우선 곡성과 옥과의 시대별 변천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김정호, 『지방연혁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및 윤여정엮음, 『대한민국 행정지명』1 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를 참조하여 정리.)
<표> 곡성과 옥과의 시기별 변천
시기 | 삼국 (백제) | 통일신라 (757년) | 고려 | 조선 | 1914 | 2015 | 비고 | |
지역 | 欲乃郡 (欲川) | 谷城郡 | 곡성군 | 곡성군 (곡성현) | 道上面 | 곡성면 | 곡성읍 | 죽동리 |
曳山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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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枝面 | 오곡면 | 오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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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谷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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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岐面 | 삼기면 | 삼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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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谷面 | 석곡면 | 석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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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寺洞面 | 목사동면 | 목사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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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谷面 | 죽곡면 | 죽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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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支縣 (果兮, 菓支) | 玉果縣 (王果) | 옥과현 | 옥과현 | 玉山面 | 옥과면 | 옥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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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 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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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 面 | 입 면 | 입 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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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 面 | 겸 면 | 겸 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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只 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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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 面 | 오산면 | 오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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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達面 | 고달면 | 고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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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의 곡성 지역에는 삼국시대(백제)부터 근대기까지 두 개의 고일이있었다. 욕천군-곡성군과 과지현-옥과현이다. 예전의 곡성군 지역은 지금의 곡성읍, 오곡면, 삼기면, 석곡면, 목사동면, 죽곡면 지역이다. 옥과현 지역은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고달면 지역이다.
다음으로 전라(호남)좌우도의 영속관계를 살펴 보자.( 김정호, 『지방연혁연구』, 71쪽)
<표> 조선시대 전라좌도, 우도 영속관계
구분 | 府尹 (종2품) | 牧使 (정3품) | 都護府使 (종3품) | 郡守 (종4품) | 縣令 (종5품) | 縣監 (종6품) | 계 |
전라좌도 (호남좌도) |
| 광주(1) | 남원, 담양, 장흥, 순천(4) | 순창, 낙안, 보성(3) | 용담, 창평, 능주(3) | 임실, 장수, 곡성, 옥과, 운봉, 진안, 무주, 남평, 광양, 구례, 흥양, 동복, 화순(13) | 24 |
전라우도 (호남우도) | 전주 (1) | 나주, 제주(2) |
| 익산,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영암, 영광, 진도(9) | 만경, 임피, 금구(3) |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장성, 함평, 고창, 무장, 무안, 강진, 해남, 대정, 정의(17) | 32 |
계 | 1 | 3 | 4 | 12 | 6 | 30 | 56 |
‘전라좌도 또는 호남좌도 곡성’과 관련해서는 네 가지의 역사지명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라도, 호남, 전라좌도, 전라남도 등. 우선 가장 오래된 연원을 갖는 지명은 ‘전라도’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성종 14년(995)에 전주·영주(瀛州)·순주(淳州)2)·마주(馬州)3) 등의 주현으로 강남도(江南道)를,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4)·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의 주현으로 해양도(海陽道)를 삼았다. 현종 9년(1018)에 합쳐서 전라도로 하였다. 관할하는 목(牧)이 2개, 부(府)가 2개, 군(郡)이 18개, 현(縣)이 82개이다.( 『고려사』제57권 지(志) 제11 지리 2)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초기 1018년에 ‘전라도(全羅道)’라는 역사 지명이 처음 출현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나주와 광주 등 현재의 전남 지역은 해양도(海陽道), 전주 등 전북 지역은 강남도(江南道)라 했는데 이 두 지역을 합하여 ‘전라도’라 한 것이다. 지금의 광역 공동체가 형성의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실로 천년의 역사를 갖는 오래된 지명이다. 곡성 죽동농악의 큰 갈래인 ‘전라좌도(全羅左道) 농악’의 ‘전라(全羅)’가 천년의 역사를 지닌 화석지명인 셈이다.
다음로 ‘호남’(湖南) 지명이다. ‘전라도=호남’ 거의 같은 광역 지역 공동체 개념 용어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려말 조선초기에 활동했던 광주출신 문관 탁광무(1330~1410)의 문집 『경렴정집』 권1 칠율의 ‘경렴정편액(景濂亭扁額)’의 시 첫 구절, ‘해동형승천호남(海東形勝擅湖南, 해동의 뛰어난 경관은 호남이 차지하고)’ 구절이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탁광무, 景濂亭扁額, 『경렴정집』 권1 칠율(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6집 249쪽)
그런데 이보다 150여년 앞 선 기록에서 ‘호남’이 확인 된다. 1240년(고려 고종 27) 7월 성적(聖迹)을 탐방차 장흥 천관산에 올랐던 정명국사 천인(1205∼1248)스님이 남긴 시 ‘원상인이 척촉의 주장을 선사함에 사례하여(謝圓上人惠躑躅柱杖)를 통해서다. 탑산의 담조와 담일이 사적기를 부탁하자 천관산을 둘러보고 <천관산기>를 짓는다. 이 탐승 때 원상인(圓上人)이 척촉의 주장(柱杖)을 천인에게 선물했고, 그 고마움에 사례하는 시가 『동문선』에 있다. 『동문선』, 우리나라 역대 명문장을 모아 놓은 관찬 문헌이다. 시는 7언 20구 장편 고시(古詩)이다. 그 가운데 한 구절.(석천인, 謝圓上人惠躑躅柱杖, 『동문선』 제6권 칠언고시(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내가 행각하려는 것을 상인이 생각하고 / 上人念我欲行脚
그것을 내게 주니 어찌 이리 은근한고 / 持用惠我何殷勤
위험한 곳 올라갈 때 남은 힘이 있으니 / 登危陟險有餘力
언제나 너의 은혜 입는 것 진실로 알겠구나 / 信知造次承渠恩
너는 내 손에 떨어진 것을 한하지 말라 / 報渠莫厭落吾手
나는 호남의 마을들을 두루 다니고자 하나니 / 我行欲遍湖南村
이처럼 ‘호남’ 지명도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기부터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전라좌도(全羅左道)’의 별칭이라 할 수 있는 ‘호남좌도(湖南左道)’의 ‘호남’ 지명 역시 그 역사성은 유구하다.
‘호남’ 역사 용어 연원 기록
『동문선』, 정명국사 천인(1205∼1248) 시, “사원상인 혜척촉주장”(1240년) - ‘호남’ 7행
『경렴정집』, 탁광무(1330~1410) 시, “경렴정편액” (1390년대?) - ‘호남’ 2행
이제 ‘전라좌도’, ‘호남좌도’의 ‘좌도(左道)’에 대해서 살펴 보자. ‘좌도’.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좌’, ‘왼쪽’은 어디를 기준한 것인가? 쉽게 말하자면 서울에 보았을 때이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한양에서 남쪽을 내려다 보았을 때 왼쪽이 ‘좌도’. 하삼도라 칭했던 전라, 충청, 경상 삼도가 각각 좌도와 우도로 불리운다. 그러면 언제부터일까.
고려초 1018년에 ‘전라도’라 칭한 이래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전 기간을 거의 ‘전라도’로 통칭했다. 행정 명칭이자 광역 공동체의 대표 용어라 할까. 중간에 ‘전광도’, ‘전남도’라 칭한적이 있긴 하지만 천년의 역사에 비기면 극히 짧은 시간이다. ‘전라도’로 통칭되던 지역 개념이 유독 군사 편제에서는 ‘좌도’와 ‘우도’로 구분해 사용했고, 실제로 각종 관직이나 군사시설에도 이들 지명이 함께 했다. ‘전라좌수사’, ‘전라좌수영’ 등등. 또한 조운이나 공물납부 따위에서도 좌도, 우도 구분을 하고 있다.
‘전라좌도’ 용어는 1430년 기록(『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 5월 15일 갑인)에서 처음 확인되고, 다음 기록을 통해서 군현의 구분을 알 수 있다.
나주의 부거 유생(赴擧儒生)이, 상도․하도를 좌도(左道)․우도(右道)로 고쳐 줄 것을 청하니 감사(監司)가 따랐다. 좌도는 광주․능성(綾城)․화순․장흥․순천․순창․남원 등의 고을로 하고, 우도는 전주․나주․해남․영암․영광․고부․부안 등의 고을로 하였다.(『선조실록』 권3, 선조 2년(1569년) 7월 갑신.)
군사 측면에서의 좌도와 우도 지역 구분은 지리 측면이나 문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고려-조선시대 전국의 광역 구분은 흔히 ‘팔도’라 한다. 이 팔도의 각 도가 단순한 행정 구역으로 설정된 구분 선이 아니라 지리를 담고 있는 구분이고 문화현상도 그러한 지리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팔도는 수계(水系)에 따른 지리적인 구분이다. 금강 수계 충청도, 낙동강 수계 경상도, 한강 수계 경기도(수도권), 대동강수계 - 평안도, 그리고 전라도는 영산강과 섬진강 수계. 이 경계를 나누는 것이 백두대간이고 전라도로 내려 와서는 호남 정맥이다. ‘호남정맥의 동과 서’가 좌도와 우도이다. 흔히 ‘섬진강의 동과 서’로 알려져 있지만,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나누는 고개인 호남정맥이 구분점이다.
산경도
이우평,『Basic 고교생을 위한 지리용어사전』, 신원문화사, 2002.(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944576&cid=47334&categoryId=47334)
호남정맥과 곡성
*호남정맥도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8036&cid=46617&cat egoryId=46617)
산과 강으로 어울어진 지리권역에서는 물길따라 흐르면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기 때문에 소하천에서 대하천으로 갈수 록 주막-시장(마을)-고을-광역 공동체-국가가 생겨나게 되고 함께 모이는 사람들끼리 일정한 문화권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권역은 군사 측면에서는 산세, 지세, 물길과 연계되기 때문에 방어와 공격에 좋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광역 공동체는 행정단위로 존재하지만, 군사 측면에서는 자연지리와 연계되어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로 구분되어 운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화권을 가르는 권역과도 일치하게 되다. 일정한 지리 영향을 받는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유사한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남정맥의 왼쪽,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 수계가 되고 ‘좌수영’, ‘좌도농악’, ‘동편제’라는 역사지명, 역사용어가 나타난 것이다. 산세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골짝은 깊고 물소리는 세차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리는 강하게 된다.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이다. 쇠가락은 원박 위주로 빠르고 투박하면서도 힘이 있다. 가락이 빠른 만큼 치배들의 동작도 빠르고 단체놀이에 치중한다. 좌도농악의 특징이다. 그 핵심에 죽동농악이 자리한다.
※김희태, 죽동의 유래와 곡성의 역사, <곡성 죽동농악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농악학술총서5-, 송기태·김현숙·박혜영·김희태, 민속원, 2015, 29~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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