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74
‘죽동(竹洞)’의 첫 표기는 1789년 ‘방축동리(防築洞里)’
-곡성 죽동1-
김희태
곡성 죽동마을은 섬진강의 지류인 곡성천과 마을 뒤에 자리한 동악산 사이에 있으면서 논농사를 주된 생업으로 삼아왔다. 큰 마을로서 인구가 많은 편이지만 농토가 그렇게 풍족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넉넉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특용작물이나 하우스농사 등을 하는 사람은 일부 몇몇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작은 논이나마 논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을이 곡성읍 소재지와 맞닿아있어서 공무원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은 고려시대 중엽 서씨가 개촌하였고, 그 뒤로 전씨가 들어 왔다고 하나 그들의 후손들이 살지 않아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는 없다. 이후 1740년대 나주정씨 정지묵이 나주 남평에서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상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죽골 또는 방죽동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방자를 빼고 죽동리라 하고 곡성면(읍)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곡성군, <곡성 마을유래지>, 2012, 119~120쪽.) 죽동마을의 유래와 곡성의 역사를 살펴보자.
2015년 죽동마을 전경
『호구총수』(1789년) 곡성의 면리별 마을 지명
‘죽동리(竹洞里)’, ‘죽동농악(竹洞農樂)’으로 부르는 ‘죽동(竹洞)’, 언제부터 뭐라고 불렀을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 ‘방축동리(防築洞里)’에서 연유한 것 같다. 정조 때 전국의 면별 마을이름과 호구수를 집대성한 관찬 지리지인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년, 규장각 奎 1602)에 나온다. 이 책의 곡성현 도상면(道上面) 조에 기록된 11개의 마을 가운데 나오는 ‘방축동리(防築洞里)’가 바로 ‘죽동리’의 땅이름 유래가 된 지명이다. 우선 11개 마을 이름을 보자.
신기리(新基里), 구중리(舊中里), 구원리(舊院里), 저전리(楮田里), 역촌리(驛村里), 방축동리(防築洞里), 율정리(栗亭里), 건천리(乾川里), 읍내(邑內), 서변리(西邊里)
당시 곡성현에는 8개 면이 있었고, 모두 143개리가 속해 있었다. 『호구총수』 기록에 곡성현 호구 수는 3,054호(戶) 8,453구(口)(남 4,506구, 3,947구)였다. 삼기면은 31개리, 죽곡면 30개리, 석곡면이 29개리 등 큰 면에 속했고 도상면은 11개리로 중규모였다. 도상면 호구수는 534호, 1,484구(남 845구, 여 639구)로 나타난다. 곡성현의 면 평균 리수(里數)는 17.9리, 면 평균 호수는 382호, 리 평균 호수는 21호이다. 도상면의 마을 평균 호수는 49호, 인구수는 135구였다.
그러므로 1789년께 현재의 죽동리는 곡성현 도상면에 속했고, 11개 마을 가운데 하나로서 ‘방축동리’로 불렀다. 그리고 최소 49호, 135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호구총수』는 전국 인구분포 상황을 부·군·방·면 등 행정조직별로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녀수까지 기재했고, 방리의 명칭과 수를 기록해 18세기 후반의 인구사 연구와 지방행정 조직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다만, 해당 기록이 당시 각 지역에 거주하였던 ‘자연호(自然戶)’ 전체를 대상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그렇다 해도 대체적인 호구 현황을 알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방축동리’(1789년)라 처음 기록에 나오는 땅이름은 몇 차례 표기가 바뀌면서 1914년에 ‘죽동리’도 부르게 된다. 물론 1914년 이전 기록에도 ‘죽동’은 확인 된다. ‘죽동리’ 땅 이름의 변천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방축동리(防築洞里) - 『호구총수』(1789년, 규장각 奎 1602)
죽동(竹洞) - 『곡성현지도』(1872년, 규장각 奎)
방축리(防築里) - 『곡성읍지』(1883년, 규장각 想白古 915.140-G557)
방죽동(防竹洞) -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 조선총독부)
죽동리(竹洞里) - 『조선전도부군명리동명칭일람』(1914년, 조선총독부)
‘방축동리’로 기록이 처음 확인되는 지명은 100여년 뒤의 기록에서는 ‘죽동’으로 나온다. 1872년의 곡성현 지도의 기록인데, 회화식 채색 고지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1871년(고종 8)에 ‘열읍지도등상령(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1872년(고종 9)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채색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군현별로 지세지형과 산천, 면별 마을위치와 지명, 관아 등 시설과 도로 등에 대해서 자세히 나온다. 『호구총수』가 군현별 마을지명까지 나오는 기록인데, 이들 기록을 도상(圖上)으로 옮겨 채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72년 곡성현지도 도상면(현 곡성읍 중서부) 부근도(규장각 자료)
이 지도에서 지금의 죽동리는 ‘죽동(竹洞)’으로 표기(지도상 왼쪽 하단 향교 홍살문 왼쪽 소로길 옆)되어 있다. 오른쪽 하단의 큰 원형 안에 면 이름인 ‘도상면(道上面)’이 표기되어 있고 좌우로 작은 원형 안에 11개의 마을이 표기되고 있다.
신기(新基), 구중(舊中), 구원(舊院), 저전(楮田), 신평(新坪), 죽동(竹洞), 역촌(驛村), 교촌(校村), 율정(栗亭), 건천(乾川), 읍내(邑內)
앞의 『호구총수』(1789년)와는 몇 가지가 다르다. 우선은 ‘방축동리’가 ‘죽동’으로 표기된 점, ‘서변리’가 없어지고 ‘교촌’이 표기된 점, ‘리(里)’ 표기를 하지 않은 점 등이다. 지금의 ‘죽동리’가 ‘죽동’으로 표기가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다.
회화식 지도라 읍치의 관아 공간을 중심에 두고 표현했기 때문에 조선후기의 곡성현 읍치(소재지)의 지세와 공간을 잘 알 수 있다. 마을 위치는 방면이 좀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지만, 옥과 설산에서부터 연결된 동악산을 진산으로 산세와 하천, 도로, 사찰 따위를 표기하고 있다. 동악산에서 발원하여 청류동(淸流洞)과 서계동(西溪洞)을 각각 거쳐 현재의 곡성읍 서쪽을 감고 돌아 ‘죽동’과 가까운 ‘역촌(驛村)’ 앞에서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강줄기를 표현했다.
※김희태, 죽동의 유래와 곡성의 역사, <곡성 죽동농악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농악학술총서5-, 송기태·김현숙·박혜영·김희태, 민속원, 2015, 1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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