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75
‘외비량지(外比良池)’라는 방죽이 있는 큰동네, ‘죽동’
-곡성 죽동2-
김희태
‘죽동’은 서계동을 거쳐 온 하천과 가까운 거리이다. ‘죽동’과 ‘교촌’ 곁에는 ‘외비량지(外比良池)'라는 제언(堤堰) 시설이 보인다. 또 다른 『곡성읍지(谷城邑誌)』(규장각, 奎 17431)의 제언조에 ‘외비량지’의 규모가 보인다. ‘도상면 외비량제(外比良堤) 周回六百九十五尺四寸 水深 五尺(둘레 695자 4촌 깊이 5자)’라는 기록이다. 바로 이 ’외비량지(제)’ 제언이 현재의 ‘죽동리’ 지명 유래와 연관이 될듯하다. 관개 수리시설로서 ‘외비량지’를 축조하였고, 이 시설과 연관하여 ‘막아서 쌓았다’는 의미로 ‘방축(防築)’이 땅 이름에도 붙게 되어 자연스럽게 ‘방축동리(防築洞里)’라는 행정지명으로 정착된 것 같다. 이런 탓으로 『호구총수』에 ‘방축동리’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1872년 지도에서는 어떤 연유로 ‘죽동(竹洞)’으로 표기 되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방축’ 또는 ‘방축동’의 표기가 편의를 따라 ‘방죽’, ‘방죽동’으로 부르다가 지도에 표기할 때는 ‘죽동’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마을의 규모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곡성읍내 서쪽에 소재한 큰동네로서 ‘크다’의 의미가 ‘큰 대(大)’로 연계되고, ‘대’를 다시 ‘대나무 죽(竹)’으로 연관시켜 ‘죽동(竹洞)’으로 표기했으리라는 점이다. 어쩌면 두가지 의미 즉, ‘외비량지라는 방죽이 있는 큰동네 죽동’이 역사지명으로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뒤이은 1883년의 『곡성읍지』에서는 마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읍지에는 방리(方里)조항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면별 호구수를 기록했고, 또 하나는 면별 마을 명칭과 위치를 기록했다. 다음 내용을 보자.
방리1 : 道上面 - 在縣內 編戶 四百三十六戶 男六百九十七口 女五百四十三口(곡성현 안에 있고 편호는 436호, 남 697구, 여 543구이다)
방리2 : 道上面 - 읍내리(邑內里), 건천리(乾川里), 율정리(栗亭里), 죽안리(竹岸里), 교촌(校村), 방축리(防築里), 역촌(驛村)[拒縣西三里(거리는 곡성현 서쪽 3리)], 서계리(西溪里)[距縣西三里], 수침리(水砧里)[距縣南三里], 신평리(新坪里)[距縣西三里], 저전리(楮田里)[距縣西五里], 구원리(舊院里)[距縣西八里], 구중리(舊中里)[距縣西十里], 신기리(新基里)[距縣西十三里]
이 기록에서 보면, 지금의 죽동리가 속했던 도상면의 호구수는 436호, 1,240호이다. 『호구총수』 기록에 비기면 줄어든다. 마을 수는 14개가 된다. 『호구총수』나 『1872년 곡성현지도』에 11개 마을인데 비기면 호구는 줄었지만 마을은 오히려 늘어난다. 경작지 등이 확대되면서 ‘분동(分洞)’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읍지에서 주목되는 지명이 ‘죽안리’와 ‘방축리’이다. ‘방축리’는 앞 기록에서 보았던 ‘방축동리’(1789)-‘죽동’(1872)과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으나 ‘죽안리(竹岸里)’는 새로 보이는 지명이다. ‘방축동’이 ‘죽동’으로 변하는 것을 살펴 보았는데, ‘죽안리’의 ‘죽’도 ‘방축’-‘방죽’에서 연유한 것 같다. ‘방축리’나 ‘교촌리’의 분동(分洞)으로도 볼 수 있는데 새로 형성된 저수지 인근 마을을 ‘죽안리’라 한 것 같다. 이 마을 ‘죽안리’는 뒤에 교촌리로 합해진다.
이후 ‘방죽동(防竹洞)’(『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 - ‘죽동리(竹洞里)’(『조선전도부군명리동명칭일람』, 1914)로 표기가 확인된다. 1912년 자료에서는 12개 마을이 보인다.
1872년 곡성현지도의 도상면 죽동 부근도(규장각 자료)
읍내리(邑內里), 영운리(英雲里), 교촌(校村), 율정리(栗亭里), 방죽동(防竹洞), 신흥리(新興里), 월평리(月新里), 신평리(新坪里), 저전리(楮田里), 구원리(舊院里), 구중리(舊中里), 신기리(新基里)
1914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진다. 전국 4,388개 면이 2,521개 면으로 통합 개편되며 리동도 통합 개편된다. ‘방죽동’이 속했던 도상면은 예산면(曳山面)과 합해져 곡성면이 되고 도상면의 ‘방죽동’은 곡성면의 ‘죽동리’로 부르게 된다. 비로소 현재 쓰는 ‘죽동리’ 행정명칭이 1914년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역촌(驛村)을 지나 순천과 동복으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곡성향교(校宮)로 들어가는 소로(小路) 곁에 ‘죽동(竹洞)’ 이 있다. 이 소로는 사직단과 연결된다. ‘죽동’과 ‘교촌’ 곁에 ‘외비량지’라는 제언시설이 있는데 이 제언과 연계되어 지금의 죽동리가 ‘방축동’-‘방죽동’-‘죽동’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현재의 죽동리가 조선시대 후기 정조 때의 기록을 통해 ‘방축동리(1789년)’가 그 연원임을 살펴 보았다. 이어 ‘죽동’(1872)-‘방축리’(1883)-‘방죽동’(1912년)-‘죽동리’(1914년)로 표기가 변화되었다. 그리고 ‘외비량지(外比良池)라는 방죽이 있는 큰동네 죽동’이 역사지명으로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희태, 죽동의 유래와 곡성의 역사, <곡성 죽동농악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농악학술총서5-, 송기태·김현숙·박혜영·김희태, 민속원, 2015, 17~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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