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453 - 담양의 대표적인 무형유산 죽세공예

향토학인 2026. 7. 13. 20:20

인지의 즐거움453

 

담양의 대표적인 무형유산 죽세공예-발달과 변천

 

김희태

 

대나무는 곧으면서도 탄력성이 있는 재료의 특성상 고대부터 각종 생활용품, 생업용구, 악기, 놀이도구, 무기 등 생활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이처럼 실생활에 다양하게 이용된 대나무는 생육환경이 좋아서 재료의 구득이 용이했다는 점이다.

 

조선초의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담양이나 창평이 대나무의 산지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죽세공예가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성지(秋成誌)에 담양의 죽세공예는 수백년 전 어느 노부부가 담양 향교리에 정착하여 참빗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기록도 있다.

 

추성지(秋成誌(1758, 미암박물관소장)에는 관아 정자 건물의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가 모두 대나무로 되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전에 건립한 것이다. 담양 대나무와 관련하여 상징적인 건물로 보아도 될 듯하다.

 

죽헌(竹軒) : 1588(선조 21, 만력 무자)에 부사 김여물(金汝岉)이 작은 정자를 세웠는데, 그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가 모두 대나무로 되어있어 이름을 죽헌(竹軒)이라 하였다. 1604(선조 37, 갑진)에 부사 신경진(申景禛)이 정사(精舍) 7칸으로 개조했으며, 1626(인조 4, 천계 병인)에 부사 윤천구(尹天衢)가 퇴락한 것을 5칸으로 개조하였다.(竹軒 : 萬曆戊子 府使金汝岉作小亭 其棟樑柱椽 皆用竹 故因名 甲辰 府使申景禛 改造精舍七間 天啓丙寅 府使尹天衢 因頹改造五間 ; 추성지 관우편)”

 

근대에 들어서는 수공기술의 발달과 미의식의 향상, 그리고 상업자본의 발달 등의 요인으로 민속공예품의 경지에 이르는 우수한 제품들을 생산해냈다. 대표적인 것으로 채상(彩箱)세대삿갓낙죽(烙竹)문발(細簾)참빗(竹梳) 등을 들 수 있다.

 

죽렴(竹簾) 제작(<全南産業>-商工篇-, 1935)

 

 

하지만 현대에 들어 죽세공예가 시들해지면서 수공기술이 퇴조를 보이자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그 기능을 보존해 오고 있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또는 시·도지정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죽세공예의 종류는 총 1121건에 이르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 입자장(笠子匠, 4), 낙죽장(烙竹匠, 31), 궁시장(弓矢匠, 47), 채상장(彩箱匠, 53), 장도장(粧刀莊, 60),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65), 바디장(88), 렴장(簾匠, 114), 선자장(扇子匠, 128)

 

·도무형유산 : 궁시장(서울 제23), 대금장(大笒匠, 인천 제6), 백동연죽장(경기 제7), 서천부채장(충남 제21), 부채장(전북 제10), 광양궁시장(전남 제12), 참빗장(전남 제15), 담양죽렴장(竹簾匠, 전남 제23), 연관장(煙官匠, 경남 제18), 고분양태(제주 제12), 낙죽장(전남 제44), 선자장(접선장, 전남 제48-1)

 

가는 대를 물들이거나 낙죽(烙竹)하여 소품을 만들거나 대나무를 잘게 빠개어 목물 위에 죽장(竹裝)하고 그 표면을 인두로 지져 무늬를 올리기도 하였다. 아주 가늘고 얇게 쪼갠 대오리로는 발[], 채상(彩箱), 부채, 갓양태 등 매우 공력이 들고 세련된 솜씨를 필요로 하는 죽세공품이 만들어졌다. 살림기구로서 소쿠리, 바구니, 광주리, 밥소쿠리, 목침 등이 호남지방의 특산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참대로 기물(器物)을 만드는 공예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 시기는 분명치 않다. 원삼국시대 초기에 해당되는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 칼집, , , 찰갑, 부채와 함께 가는 대오리를 엮은 상태로 칠이 되어있는 대바구니 유물이 발견되었다.

 

백제시대의 죽제품으로는 참빗이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 등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신라 고분인 천마총에서 말안장 밑에 까는 장니(障泥)에 죽피편석(竹皮編席)의 심을 대었던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순천 송광사 소장의 참대로 된 경질(經帙, 보물 제134)은 고려시대의 귀중한 유품이다. ‘경질은 가는 대올을 색실로 엮으면서 각종 문양을 나타내고 아래위와 양쪽 끝을 비단으로 감싸고 뒷면을 종이로 배접하여 경권을 말아두는 포장용 발이다.

 

태안선(1131년 침몰, 2007년 발굴)이나 마도선(1~3호선, 2009~2011년 발굴) 등에서 출수된 참빗, 채반, 바구니, 피죽상자, 대나무반 등도 고려시대의 죽세공예품이다. 고려시대에는 철부(鐵府)에 예속된 공장에 죽제장(竹製匠)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등에 따르면, 죽장이 경공장(京工匠)으로서 공조와 선공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경공장 장인에는 죽장(竹匠) 이외에도 대나무와 관련된 장(匠色)으로 참빗을 만드는 죽소장(竹梳匠), 대를 가늘고 얇게 쪼개어 베틀 위에 올리는 바디를 만드는 성장(筬匠), 발을 만드는 염장(簾匠), 바느질 그릇을 만드는 잠장(箴匠), 갓의 챙을 만드는 양태장(凉太匠), 우산을 만드는 우산장(雨傘匠), 대나무를 다루어 화살을 만드는 궁장(弓匠), 대나무나 버드나무로 여름용 등받이와 토시 만드는 한치장(汗致匠), 둥글부채를 만드는 원선장(圓扇匠),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서 제사용 기구를 만들던 변비장(籩篚) 이 있었다.

 

외공장(外工匠)에도 화살을 만드는 시장(矢匠), 빗을 만드는 소장(梳匠),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扇子匠), 바구니를 짜는 상자장(箱子匠) 등이 있었다. 시장은 전라도 60명 등 344, 소장은 전라나도 1명은 4, 선자장은 전라도 2명 등 8, 상자장은 12명으로 경상도에 6, 전라도에 4, 강원도에 2명을 두었다. 이처럼 대나무로 만든 기물의 종류에 따라 전문 장색으로 분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죽장은 위와 같은 전문 죽제품을 제외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대나무의 산지와 죽세공예의 본고장으로는 단연 담양군을 꼽는다. 우선, 담양은 풍부한 죽림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면적에 있어 전국 최대 규모를 이루고 있다. 담양의 죽림면적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전국의 죽림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아 아직도 타지역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특히 담양산 왕대와 솜대는 기후 등 제반 생육조건이 알맞아 죽질(竹質)이 강하고, 탄력성과 활렬성(豁裂性, 쪼개지는 성질)이 좋으며, 경도가 세공에 알맞아 정교한 죽제품을 만들기에 적당하다고 한다.

 

아울러 담양은 오랜 죽세공예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담양은 중앙의 경공장(京工匠)이 파견되어 전라도 일원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놓고 부채를 생산할 만큼 죽제품 산업이 융성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자.

 

이식이 공조의 말로 아뢰기를, “매년 각 전(殿)에 단오 부채[端午扇]를 만들어 진상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부채에 들어가는 대편죽(大片竹)을 대나무가 생산되는 전라도의 각 고을에 분정(分定)한 다음 경장인(京匠人) 이사순(李士淳)을 담양에 내려보내면 그곳 도회관(都會官)이 장인을 많이 불러 모아 초련(初鍊)을 하고 그 뒤 경장인이 2월 내에 올라와서 정밀하게 만들어 진상하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던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재생청(裁省廳)에서 경장인을 내려보내는 것이 열읍에 폐를 끼친다.’는 공사(公事)를 입계함으로 인하여, 도회관이 편죽(片竹)을 거두어 모아 초련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였고 경장인을 내려보내는 규정은 없앴습니다. 그렇다면 도회관은 계하된 공사대로 서둘러 거행해야 되는데, 안일한 폐습이 고질이 된 결과 절기가 박두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도회관을 엄하게 찰추하소서. 그리고 밤낮없이 재촉하여 올려 보내도록 본도의 관찰사에게 파발마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3[1625] 413[경인])

김광욱이 공조의 말로 아뢰기를, “연례적으로 단옷날 진상하는 부채는 작년에 본조의 계사로 인하여 특별히 감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올해는 작년과 다르니 본조의 장인을 규례대로 담양에 내려 보내 대나무를 가져다 만들게 하여 진상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서울의 장인을 내려 보내는 것은 폐해가 자못 심하다. 올해도 봉진(封進)하지 말라.”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6[1638] 111일조[을해])

 

은 각 전에 진상하는 단오 부채를 만들어야 하므로 편죽을 거두어 올려 보내지 않은 도회관을 엄하게 찰추할 것 등을 청하는 공조의 계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전라도 각 고을에 분장한 다음 담양에 경장인(京匠人)을 내려 보내면 그곳 도회관(都會官)이 장인(匠人)을 많이 불러 모아 초련(初鍊)을 하여 진상한다고 하였다. 담양이 궁중 소요 단오부채에 들어가는 대편죽을 생산하는 으뜸 고을임을 알 수 있다.

 

는 단오에 진상하는 부채는 장인을 담양으로 보내 대나무를 가져다 만들게 하겠다는 공조의 계이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담양이 죽물산업의 중심지임을 알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곳의 채상(彩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으로 지방관들이 탐내는 명품의 자리를 굳혔다. 목민심서무릇 본읍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반드시 고을에 폐단이 될 것이니,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담양의 채색 상자[綵箱], 남평의 부채[] 등을 들고 있다. 이처럼 담양의 채상은 조선후기에는 특산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담양은 오늘날까지도 죽제품의 역사와 관련된 전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담양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죽물(竹物)을 거래하는 5일 시장이 열리는 고장이며, 역시 국내 유일의 대나무 전문박물관인 한국대나무박물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명성은 담양의 풍부한 대나무와 함께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담양인들의 손재주와 접목된 결과일 것이다. 담양 죽세공예의 발달과정을 더듬어 보는 것은 이런 명성을 얻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일 것이다.

 

특히 담양 지역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죽세공예의 고장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추성지(秋成誌(1758, 미암박물관소장)의 풍속조에 농업과 양잠업에 힘쓰고, 공예와 기술을 숭상한다[務農桑 尙工技]”라 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이후 줄곧 주도적 입장에 있었다고 하겠다.

 

담양에서 만들어진 죽세품 가운데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는 물레, 바늘상자, 화로, 산죽 옷고리, 몰코, 편지꽂이, 갈퀴, 대문, 고기 구덕, 삼대기, 발 따위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필수적인 생활도구로 당시 민중들의 삶에 대한 모습을 알 수 있다.

 

1909년 담양에서는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가 생겨 주로 대나무 제품의 생산기술의 향상과 보급을 했했다. 1915년에는 참빗제조업자들에 의해 진소계(眞梳契)’라는 조직이 설립되었고, 192012월에는 담양산업조합(潭陽産業組合)’으로 개칭하였다. 참빗제조업자들이 주도적인 입장이었던 산업조합은 제품의 양과 종류가 다양해지고 일본 및 만주 등지로 판로가 크게 확장되면서 재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223월 거의 모든 대나무 제품 생산자들이 참가하는 새로운 산업조합이 탄생하였다. 1924년경 조합원이 1,243명인 큰 규모로 발전했는데, 조합의 연간 생산액은 4,200만원에 달했다.

 

193754일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 1883~1961)가 담양을 방문하고 남긴 여행기 전라기행(全羅紀行)”이 마을의 죽세공은 온 마을을 분업을 하여 대를 쪼개는 집, 깎는 집, 엮는 집, 참빗을 얽는 집, 인두로 무늬를 그리는 집 등 모두 각각의 일을 분담하고 있다.”고 하였다. 담양지역의 죽세공예의 성행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담양읍 향교리와 만성리 일대로 보인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가장 번성하였다. 또 그 규모가 가장 컸던 만큼 담양 죽세공예 3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담양의 죽세공예도 시들해졌다. 내부적으로는 다른 전통적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고무나 프라스틱 등 화학재료의 제품이 급속히 확산되었던 요인이 가장 컸고, 외부적으로는 값싼 중국의 제품이 미국과 일본 등 해외시장을 급속히 잠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까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시장경쟁력을 잃어갔다. 대체로 담양의 죽세공예는 일제강점기까지는 전통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내수시장을 겨냥하며 전성기를 누렸다면, 196070년대에는 내수와 더불어 서구인의 기호에 맞는 제품의 수출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담양 죽세품 공동작업(1980년대, 사진 전라남도)

담양 죽물시장(1980년대, 사진 전라남도)

담양 죽세품(1986년, 사진 전라남도)

 

다만, 현재는 죽세공예의 전반적인 침체와 기능보유자의 감소로 전통공예기술 자체의 보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급기야 1960년대 말부터 정부는 관련 기법을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담양지역에서는 현재 5개 종목에 걸쳐 국가 및 지방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담양의 죽세공예에 대해서는 담양 죽세공예의 발달과 채상(주인택, 2004) 등을 참고하였다.

문화재명 지정종별 지정일자 보유자 전승지
*낙죽장(烙竹匠) 국가무형유산[31] 1969.11.29 []이동연
[]국양문
[]김기찬
담양
담양
순천(인정 당시)
채상장(彩箱匠) 국가무형유산[53] 1975.01.29 []김동연
[]서한규
[]서신정
담양읍 양각리
참빗장 전라남도무형유산[15] 1986.11.13 고행주 담양읍 향교리
죽렴장(竹簾匠) 전라남도무형유산[23] 1990.02.24 박성춘 봉산면 기곡리
낙죽장(烙竹匠) 전라남도무형유산[44] 2009.03.20 []조운창
[]이형진
-
담양읍 백동리
선자장(扇子匠)
-접선장(摺扇匠)
전라남도무형유산[48] 2010.05.27 김대석 담양읍 만성리

 

낙죽장(烙竹匠)은 불에 달군 인두를 대나무에 지져 글씨나 그림, 문양을 그리는 기술이다. 1969년 담양 최초의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보유자는 이동연, 국양문으로 이어지다 다른 지역의 김기찬으로 이어졌다. 2009년에 전남 무형유산으로 종목을 지정하면서 보유자로 조운창과 이형진을 인정하였다.

 

채상장(彩箱匠)은 채상을 만드는 장인이다. 채상이란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빨강, 노랑, 파랑의 색깔을 채색하여 짜 만든 상자로서 혼수감을 담거나 반지 그릇 또는 옛 선비들이 궁중 야근때 입을 옷을 담는데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서울로 임금에게 봉물을 담아 보내 는데 사용 되었다고 한다. 채상장 보유자는 김동련, 서한규를 이어 서신정이다.

 

참빗장은 참빗을 만드는 장인이다. 빗은 형태에 따라 빗살이 굵은 것을 '()'가는 것을 '()'라고 한다. 빗살이 성긴 얼레빗(月梳),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참빗(眞枇, 眞梳), 머리를 마지막으로 정갈하게 다듬는데 쓰인 면빗(面梳)등으로 나뉜다. 참빗장 보유자는 고행주이다.

 

죽렴장(竹簾匠)은 죽렴[대발]은 만드는 장인이다. 발이란 갈대 또는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실로 엮어서 만든 가리개로 해를 가리거나 실내장식 등에 사용된다. 죽렴장 보유자는 박성춘이다.

 

선자장(扇子匠)은 부채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 합죽선과 구분되는 쥘부채[접선장(摺扇匠)]를 종목으로 지정하였고 보유자는 김대석이다.

 

출전 : 김희태, 국가유산제도와 담양의 무형유산 4.담양의 대표적인 무형유산 죽세공예, 담양의 무형유산, 담양문화원, 2024., 33~39.

 

참고문헌

주인택, 담양 죽세공예의 발달과 채상(彩箱), 조선대 석사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