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52
목숨걸고 나라 지킨 의병장의 염원
고광순 의병장의 항일 전적지와 문화유산
김희태
녹천 고광순(1848~1907) 의병장.
대한제국기 호남 의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 의병장이다.
호남 최대 연합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제봉 고경명(1533~1592)선생과 제봉의 작은 아들 학봉 고인후(1561~1592) 선생 부자로 이어지는 충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말 그대로 충효쌍전의 명문가이다. 고광순 의병장 관련 문화유산은 개인 기념물을 뛰어 넘어 남도의병 정신과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다.
연곡사, 항일의병 전쟁 최후 격전지
고광순의 의병활동의 핵심 무대는 지리산 연곡사였다. 연곡사는 화개동과 문수암을 연결하는 천연 요새로, 의병 활동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고광순은 1907년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곳에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병의 염원이 담겨 있다.
1907년 음력 9월 11일 새벽, 일본군은 연곡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의병들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 고광순과 고제량 등 주요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연곡사를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불태웠다. 그뒤 연곡사는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국보 승탑(부도) 등 사찰 유산으로서도 알려졌지만, 그 터는 남도의병 항쟁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고광순 순절비, 1958년 구례군민이 건립
고광순이 순절한 뒤 구례군민들은 그의 희생을 기려 연곡사 전적지 현장에 순절비를 세웠다. 1958년, 항일 의병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되던 해였다. 남도 의병 순절 전적지 현장에 있는 유일한 순절비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순절비는 높이 166cm 규모로 비좌를 마련하고 귀로 비몸을 세운 형태이다. 비문은 근대 유학자 효당 김문옥이 짓고 고당 김규태가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연곡사 전투의 실제 상황과 남도의병의 항일 정신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추모 공간을 넘어 남도의병 역사교육과 현장답사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과 상징성을 가치로 ‘구례 고광순 순절비와 전적’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추진된 항일독립유산 문화유산 지정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불원복 태극기와 의병의 염원
고광순 관련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유물은 ‘불원복(不遠復) 태극기’이다. 불원복 태극기는 나라가 망하기 직전 대한제국 백성들이 품었던 마지막 희망이자,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나라의 상징이었다.
이 태극기는 세로 82㎝, 가로 128㎝의 크기이다. 흰 면직물 바탕에 태극 문양의 양방은 홍색으로 박음질하였고, 음방과 사괘는 검은색 천을 잘라 박음질하였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의 위쪽 가운데에는 붉은 색실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자수로 놓았다. 깃대 쪽에는 마직물로 된 고정용 끈이 세 군데 달려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태극기 가운데 ‘불원복’ 글자를 자수로 새긴 유일한 유산이다.
불원복 태극기는 오랫동안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1986년 고광순의 종손 고영준(1939~2024) 회장이 독립기념관에 기탁하였다. 2008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유산[제394호]으로 등록되었다. 2026년 2월 25일 전라남도가 나주 공산면에 설립한 남도의병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종부와 차종손 등의 원력, 종중과 남도의병역사박물관, 전라남도와 담양군 등 기관단체의 지혜가 모아진 것이다. 남도의병역사박물관은 2026년 3월 5일 개관했다. ‘불원복 태극기’는 항일의병 정신과 국권 회복 의지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제작 시기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국가 지정 보물로도 지정될 것이다.
매천 황현이 남긴 눈물의 조문
고광순 의병장의 순국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특히 매천 황현( 1855~1910)은 고광순이 의병 봉기를 준비할 때 격문 작성을 부탁받고도 즉시 응하지 못했던 일을 회한으로 여겼다. 뒤늦게 격문을 작성해 놓고 기다렸지만, 이미 고광순은 연곡사 전투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황현이 지은 고광순의 「약전」에 나오는 사연을 보자.
〈정미년(1907) 정월 초하루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 아무개가 남원에서 거사가 실패한 뒤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으며, 다시 의거를 일으키려 하니 선생께서 격문 한 편을 지어 달라”고 전하였다. 나는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의 형세에서는 격문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힘써 뜻을 굽히지 말고 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그 사람은 섭섭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그래도 격문 한 편을 써 두고 공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아마도 공은 내가 약속을 두려워하여 함께 의논할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9월에 고광순 부대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박태현과 함께 연곡사로 달려갔다. 「약전(略傳)」에 “절에는 기와와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불탄 재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공의 임시로 안치한 무덤이 작은 흙더미처럼 있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크게 통곡하였다.”라 하였다.
그리고 「연곡 전장에서 의병장 고광순을 조문하다 [燕谷戰塲 吊高義將光洵[」라는 만시를 올렸다. “우리네 시문이야 무슨 보탬이 되랴”라고 하며, 붓을 든 지식인의 무력함을 자책하였다. 또 “새 무덤이 국화 곁에 우뚝 솟았네”라는 구절을 통해 초라한 무덤 앞에서 흘린 뜨거운 눈물을 기록하였다. 매천은 푸른 산천과 대비되는 전쟁의 폐허, 쓰러진 전마와 까마귀의 모습을 통해 의병전쟁 격전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국난에 몸을 바친 충의로운 희생으로 승화하였다.
시제에 딸린 세주에는 " 고의병장이가 패하여 순절한 뒤 산중 사람들이 그를 가련하게 여겨 멍석에 싸서 채소밭 가운데에 장사 지냈다.[ 高敗死後 山中人憐之 藁葬菜圃中]"고 항일 의병전쟁 순국 현장 경관을 적었다.《매천집》권4(丁未稿, 1907년)에 올라 있다. 한국고전종합DB의 국역문[권경열 역]을 옮긴다.
천 봉우리 연곡은 푸른빛이 가득한데
작은 전투 충사도 국상인 것이라네
전마는 흩어져 논둑 따라 누웠고
까마귀 떼 내려와 나무 그늘에서 나네
우리네 시문이야 무슨 보탬이 되랴
명문가의 명망에는 댈 수가 없네
홀로 서풍 향해서 뜨거운 눈물 뿌리나니
千峯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小刦虫沙也國殤(소겁충사야국상)戰馬散從禾隴臥(전마산종화롱와) 神烏齊下樹陰翔(신오제하수음상)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불가당)
獨向西風彈熱淚(독향서풍탄열루)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
2구의 충사(虫沙)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말하는 것으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후집(後集) 권37에, 국상(國殤)은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장수와 병사들의 영웅적인 기개와 장렬한 정신을 칭송하는 일종의 제가(祭歌)로 굴원(屈原)의 《楚辭 九歌》에 나온다. 6구의 명문가는 제봉 고경명의 후손으로,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학봉 고인후의 12대 사손(祀孫)을 이른다.
충절의 가문에서 태어난 의병장
고광순은 광주 대촌의 장흥고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인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호남 최대 의병을 일으킨 충렬공 제봉 고경명이며, 고인후와 고종후(1554~1593) 형제 또한 금산과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고인후는 함평이씨 이경(1538~1592)의 사위로 창평 장흥고씨 의열공파 파조가 된다. 조선 후기 국가에서는 이들 부자의 충절을 기려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렸고, 담양의 고인후 부조묘는 지금도 봉향하고 있다.
고광순 의병장의 순국 이후 고인후 부조묘는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다행히 후손들의 노력으로 신주(위패)는 보존되었다. 부조묘가 재해를 당하더라도 신주는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는 《가례》 등 예서 기록을 따라 화급한 상황에서도 보존한 것이다. 고인후의 배위 함평이씨의 신주 내함에는 “고 함평이씨 휘 신 신주(故咸平李氏諱信神主)”라 하여 이름[信]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기 활동한 인물의 배위, 즉 16세기 여성의 이름이 확인되는 신주도 가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고광순은 자가 서백(瑞伯), 호가 녹천(鹿川)이며, 본래 이름은 광욱(光旭)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며 유학자의 길을 걸었으나,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사늑약 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결국 붓 대신 칼을 들었다. 송사 기우만 등과 함께 호남 의병세력을 규합하며 항일투쟁에 나섰고, 남원의 양한규 의병진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오늘 우리 곁의 문화유산
고광순의병장의 구례 연곡사 항일전적지와 순절비, 불원복 태극기, 의병 관련 기록, 담양 창평의 종가와 가묘는 광주 포충사나 금산 칠백의총, 창평의 고인후의 부조묘 등과 연결된 하나의 문화유산 체계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의병에서 대한제국기 항일의병으로 이어지는 충의 정신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남도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다.
고광순 의병장의 항일 전적지와 관련 유산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사람들의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를.
*<대동문화> 155호 우리곁의 문화유산, 2026년 7·8월호, 2026.07.05.(수정)
*바로잡습니다 <대동문화> 155호 85쪽 8줄 / 호남 최초로 → 호남 최대의

고광순 항일전적 및 순절비

구례 연곡사 전경(〇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 의병장 초상(포의사)

불원복 태극기(국가등록문화유산) - 1986년에 독립기념관에 기탁되었다가 40년만인 2026년 2월 25일 전라남도(현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서 나주에 건립한 남도의병역사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순절비 비문 첫부분과 끝 부분(고광순 의병장의 문집 <녹천유고>에 실려 있다. 1958년 구례군민 일동이 세웠다. 비문은 효당 김문옥 찬, 글씨는 고당 김규태 서.



고광순 의병장 약전(부분) - 매천 황현선생이 지었고 녹천유고에 실려 있다. “절에는 기와와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불탄 재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공의 임시로 안치한 무덤이 작은 흙더미처럼 있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크게 통곡하였다.”라 하였다. 그리고 「연곡 전장에서 의병장 고광순을 조문하다」라는 만시를 올렸다.


의열공 학봉 고인후선생 묘소와 묘비

부조묘에 봉안된 고인후 의병장 배위 함평이씨 신주(神主) - 내함(좌)에 “고 함평이씨 휘 신 신주(故咸平李氏諱信神主)”라 하여 이름[信]이 니온다. 16세기 여성의 이름이 확인되는 신주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부조묘(不祧廟)는 국가에서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리는 불천위(不遷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구 히 사당에서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이다.
조선시대 가례에서 신주는 조상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아, 수해, 화재, 도적 등 긴급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조상의 신주(神主)와 유서(遺書)를 최우선으로 구하고, 그다음으로 제기(祭器), 마지막으로 집 안의 재물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예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는 예서(《상변통고(常變通考)》)에 근거한 확립된 규범이었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한 뒤 일제기에 일본군의 침탈로 부조묘가 화재를 당했는데, 신주만은 잘 보존하여 조선시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인후 효자도 - 因厚同死(동국신속삼강행실도, 규장각 소장)
仁厚同死/正字高因厚光州人 忠臣高敬命之子也 壬辰倭亂 從其父討錦山賊 父子同死 今上朝 㫌門
인후동사 - 고인후 부자가 함께 죽다
정자 고인후는 광주 사람으로 충신 고경명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그 아비를 따라서 금산의 왜적을 치다가 부자가 함께 죽었더라. 금상 때 정문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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