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48
장흥법원 100년을 지킨 사람들, 변호사 신지원, 2009
-산(山)에다가 내준 완도의 어장 허가-
김희태
*《장흥 지원 지청 100년사-흐르는 탐진강 세월을 보듬고-》(2009)를 편찬을 추진하면서 장흥 지원·지청을 거쳐간 법조인들을 면담하고 정리하여 실었다. 편찬위원이 분담하여 정리했다. 장흥 향토사에 도움되이라 여겨져 소개한다. 다만, 100년사 책에 이미 실리긴 했지만, 편찬위원회의 기능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가명’으로 표기하였다.
신지원(가명, 70세) 변호사는 1977년 4월부터 1979년 8월까지 2년 5개월 동안 장흥지원 판사로 근무를 했다. 1976년에 광주지방법원 판사로부터 법조인의 길을 걸었으니 초임 근무지인 셈이다. 당시 근무지는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 현재는 21세기 종합법률사무소 장흥분사무소.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진다. 하나는 ‘장흥’이란 곳이고, 또 하나는 ‘지원’과 ‘분사무소’라는 단어이다.
장흥 법원 검찰 100년사를 준비하다가 만나는 법조인들 대부분이 장흥으로 부임할 때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밀리고 외진 곳에서 고생하겠다는 생각에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와서 근무해 보면 우선 인심이 좋고, 풍광이 뛰어나고 음식도 좋아 이임할 때는 떠나기 싫어 고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올 때 눈물’, ‘갈 때 눈물’이라는 표현도 했다.
이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이 ‘인심이 좋다’라는 표현이다. 법이라는 것이 계도의 목적도 있지만 최후의 경우 사법 판단을 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에, 사법기관은 같은 국가기구라 해도 군청이나 교육청 같은 기관과는 다르다. 민초들과는 거리가 있고 무서운 곳이라 해야 할까. 그런데 ‘인심이 좋다’라는 것은 법조인을 통해서 들어 보니 ‘그만큼 사건 사고가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법조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어느 정도 사건 사고가 있어야만 기본 업무처리가 될 것이고 경험도 쌓여갈 것이지만, 장흥의 경우 인심이 좋아 사건 사고가 많지 않으니 사람들과 정이 들어 갈 때는 떠나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30대 초임판사, 60대에 ‘무변촌 장흥’에 분사무소
그 ‘갈 때 떠나기 싫어 진다’는 풍광과 인심에 반해 노년의 봉사라 할까. 다시 선택한 곳이 장흥이고, 그래서 30대 초임 판사 시절의 부임지였던 ‘지원’에 60대의 원로 법조인으로서 ‘분사무소’를 차리고 장흥사람들을 다시 대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분사무소’ 설치에 망설였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성과 장흥이 지원으로서는 제일 적은 편인데, 의성은 인구가 12만이고 대법원 통계를 보니 장흥보다 40%나 사건이 많더라는 것이다. 광주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법조인으로서 고민이 되었단다. 그러나 법이란 것이 개인을 보호하고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명제를 지니고 있고, 이를 평생 배우고 실천해 온 사람으로서 상주 변호사가 없는 ‘무변촌 장흥(無辯村 長興)’은 그냥 바라보고 있기만 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이어져 ‘분사무소’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장흥 연고 법조인들의 법의 정의 실천을 위한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것도 있지만.
부임 당시의 장흥의 법조계 현황에 대해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임하기 몇 년전에 청사를 새로 지었고, 지원장은 최규봉(서울), 판사는 지원장 포함 4인, 검사는 지청장 포함 5인, 변호사는 4인이었다. 당시 변호사는 윤재원(1907년생 당시 70세 강진출신, 타계), 최수일(1920년생 당시 57세 무안출신, 타계), 지익표(1925년생, 당시 52세 완도출신), 강영일(1942년생 당시 36세 영암 출신)이었다. 부임하기 전의 지원장은 이형년, 그 전 지원장이 윤관 전 대법원장이었다고 한다.
‘산(山)에다가 내준 완도의 어장 허가 사건
장흥에서 처리한 일 가운데 생각나는 큰 사건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생활사에 관계된 것이 많았고, 특히 완도 지역 어장 분쟁사건으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바닷가의 주민들은 갯벌에 나가 수산물을 채취하여 내다 팔아 이를 생계로 꾸리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데 5·16 군사정변 이후 “수산업법”이 개정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한다는 명분 때문에, 어장에 금을 긋게 되었고 이에 따른 분쟁이 비일비재 하였던 것이다.
수산관계법은 일본시대에도 있었다. “어업령”과 “조선어업령”이다. “조선어업령”은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수탈을 본격화하기 위해 제정한 수산제도의 기본법이다. 어업의 면허 및 허가, 어업의 제한, 어업조합 및 수산조합, 벌칙 등에 관한 규정을 담았다. 제령(制令) 제1호로서 1929년 1월에 공포되어 1930년 5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84조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1911년 6월 일본의 어업법을 모방, 전체 23조로 구성된 어업령을 공포하여 1912년 4월 1일부터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우리나라의 어업이 크게 발달하고 사회적·경제적 상황 역시 크게 달라져 간단한 법률로는 수산업을 규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어업령을 개정하여 새롭게 수산업을 규제하려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우선 어업을 면허어업·허가어업·계출어업(屆出漁業)의 3종으로 법정 분류하고, 어업권 제도를 확립하여 어업권의 재산권적 성격을 강화했다. 이 법령의 시행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에게 어업권·어업어장의 무차별적인 양도와 어업면허 혜택 등 실제 일본인 어업자에게 편중된 지원·보호 정책을 실시해 우리나라 어업자의 권익을 무시했다. 결국 어업권제도와 어업허가 제도를 축으로 어업을 통제함으로써 일본 어업자본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우리나라 어민의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 그 본질이었다.
이러한 법으로 인해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어촌의 촌락 공동체가 사실상 해체되는 모순이 드러났다. 1945년 광복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법과 제도에서는 일본시기의 것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헌헌법 부칙에 일본시기의 법을 계승한다는 조항까지 담고 있었으니 우리나라 건국기의 현실을 알만하지 않은가. 1953년에 수산업법이 제정되어 시행하게 되었고, 5․16 이후 1963년에 개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인 허가와 현지의 실상은 다른 점이 많았다. 어업 허가는 경도와 위도를 명시해서 구역을 정하여 허가한다. “갑” 어장과 “을” 어장은 수치상의 경위도상으로 겹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 현장에서는 한 구역에서 작업하다가 서로 자기들 허가 구역이라 해 분쟁이 발생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는 허가가 나서 작업하다가 분쟁이 있어 자세하게 조사 해 보니, 허가 구역으로 명시된 구역이 “산(山)” 위에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같은 인공위성과 인터넷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산(山)에다가 내준 어장 허가 사건’인 셈이다. 당시 장흥지원의 관할 구역은 완도를 포함 6개군으로 당시는 농어촌이 경제활동의 주역이었던 시대로 인구 100만명 가량이었고, 1982년에 해남지원이 설치되어 해남과 완도는 해남 지원의 관할로 되었다.
지원 서무계장 부르니 찾아 온 우체국 서무계장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전화는 공전식이었고, 수화기를 들면 우체국의 교환수가 연결해 주는 것이다. 오씨 성을 가진 판사가 부임하여 전화기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들고 “서무계장 들어오라”고 했단다. 우체국 교환은 법원인 줄 아니까, 자기들 우체국의 서무계장에게 가서 법원에서 찾는다고 전하게 되었다. 당시는 법원이라면 판사를 “영감님”이라 부를 정도로 강한 이미지가 있던 터라, 일을 하다 말고 우체국 서무계장이 법원을 갔었단다. 물론 죄를 진일도 없기 때문에 의아해 하면서. 오판사에게 “우체국 서무계장”이라고 인사하고 “영감님이 불러서 왔다”고 하니, 의외의 대답. “내가 왜 우체국 서무계장을 찾습니까? 부른 적 없습니다.“ 사태의 전말을 이러하다. 오판사는 구내전화인지 알고 업무상 법원 서무계장을 찾았는데, 실제로는 우체국 교환이었기 때문에 우체국 서무계장에게 전하게 되어 사단이 난 것이다. 1970년대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다.
사건 처리와 관련하여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허전한 부분이 있단다. 법령의 해석과 적용 사이에서 현직 판사 신분으로 피고가 된 사건. 어쩌면 없었던 일이라면 마음의 짐은 없었을 터이지만, 기록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기록으로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소홀히 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조인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귀감삼을 만 하다는 생각에서이다. 또한 면담자 리에 후배 법관이 있어 교훈으로 말을 꺼낸성 싶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법규상 정해진 기간의 산정에 관한 것이다. 보통 “oo일을 기준으로 o년전”이라는 흔하고 쉬운 표기이지만, 실제 사건화 되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소송의 결과는 고등법원에서 승소하고 대법원에서 패소(파기환송)하여 결과적으로는 패소하게 되어 있는데도 선관위 직원들은 1승 1패했다고 본인을 위로하였다. 후학자들에게 “기본 충실“을 강조하고 싶단다.
피고가 된 초임판서 선관위원장, 통대의원 출마자격 기간산정
전말을 이렇다. 장흥지원 재임시절, 전남 선거구 제9지역구인 해남․진도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은데서 비롯된다. 그 이전에는 보통 교육장이나 조합장 등 지역의 유지가 선관위원장이 되었는데, 공정성이나 법리적인 문제도 있곤 하여 처음으로 법조인, 특히 판사가 선관위원장으로 위촉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말하자면 초임 법조인 시절, 처음 접한 선관위원장 때의 일이다. 공공기구로 선관위 조직은 있었고, 위원장만 겸임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의 선거인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선거 때의 일이다. 당시 1면당 1인씩 뽑았는데, 출마자격 요건에 선거일로부터 3년간 당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선거일이 1978년 5월 18일이니 법규상으로 보면 1975년 5월 18일 이후에 당적을 보유한 경우는 피선거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후보자가 1975년 5월 18일자로 탈당을 했다는 당적증명서[선거일로부터 3년간 당적이 없었다는 증명서]를 냈고, 본인은 당시 3년에서 하루가 모자라니 피선거권이 없다는 의견을 냈으나 당시 선관위 사무과장은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 사무과장들의 선거교육이 중앙선관위에서 있었는데, 그 교육에서 5월 18일까지 탈당을 하면 피선거권이 있다고 했다면서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총무처, 국방부, 국립천문대 질의까지 동원, 고등법원 승소 1승
그날이 후보등록 마감날이기도 하여 그대로 접수를 하였고, 기호 추첨날 갔을 때 약간의 논란은 있었으나 큰 문제 없이 추첨을 하였고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본인으로서도 약간 문제를 느끼고 있어 지원장과 상의 하려 했으나 시일이 지나버렸다고 한다.
당시 선거에는 2인이 입후보하였는데, 선거 날에도 논의가 있다가 표가 많은 사람에게 승복하고 이의 제기를 하지 않기로 후보자 간에 협의하여 투표와 개표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 선관위 사무과장은 경력있는 공직자로서 일처리도 잘하여 이를 믿었던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표가 끝나고 발생하였다. 두 호보사이의 표차가 4표가 난 것이다. 재검표 끝에 5표차가 나서 차점자가 승복하여 다득표자를 통대의원 당선자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선자가 바로 5월 18일에 탈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낙선자는 당초 이의 제기를 하지 않기로 했으나, 근소한 표차여서인지 정식으로 이의 제기를 하였다. 선거재판이 시작되고 선관위원장은 현직 판사이지만 피고가 된 것이다. 선거재판은 1심이 고등법원이다. 당시 변호사는 이미 고인이 되신 고제량변호사, 상대방인 원고 변호사는 해남출신의 이기홍변호사. 치열한 법리 논쟁과 사례 예시를 통하여 1심인 고등법원에서는 승소를 하였단다. 1승을 올린 셈이다.
논쟁의 핵심은 5월 18일 탈당하였으면 그날부터 당적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다음 날인 5월 19일부터 당적이 없는 것이냐의 여부이다. 5월 19일부터 당적이 없는 것으로 보면 3년에서 하루가 부족하여 피선거권이 없게 되어 당선이 무효가 되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총무처에 질의하여 공무원의 사표가 수리된 날(예컨대 5월 19일)에 공무원자격이 있느냐의 여부를 조회하였더니 공무원자격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또 하나는 국방부에 질의하여 제대군인의 경우 제대날짜(위의 5월 19일)에 군인신분이 있는가의 여부를 질의하여 군인신분이 아니라는 회신을 받았단다. 마지막으로는 국립천문대에 1975년 5월 18일부터 만 3년이 되는 날이 언제인가를 조회하였는데 마침 1976년인가가 윤년(閏年)이어서 하루가 366일이었기 때문에 3년이 되는 해로 한다면 5월 18일에 탈당을 하여도 피선거권이 있다는 회신을 받아 낸 것. 이러한 방계 자료가 도움이 되었던지 고등법원에서는 당선인이 피선거권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 승소하기에 이르른 것.
대법원, 민법의 ‘초일 불산입’의 원칙 적용 파기환송, 1승 1패
다음 2라운드. 대법원에서는 민법에 의해 ‘초일 불산입’의 원칙에 따라 5월 18일은 산입하지 말고 5월 19일부터 날짜를 계산해야 한다고 하여 1심을 파기 환송 한 것. 대법원의 판결문에는 “ 5월 18일 탈당계를 제출하였다면 빨라야 근무가 시작되는 오전 9시경에 제출하였을 것이므로 0시부터 9시까지는 당원이었다”고 하여 하루가 부족하다는 취지로 판시하였다 이 판결은 《대법원판례요지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부문. 법률가로서 가장 기본인 “법전 충실“의 교훈을 얻게 해 주었다고 한다. 결과는 1승 1패.
다시 광주고등법원에서 재판 절차를 진행 하는 도중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 장기 집권 독재체제를 종식시키는 소위 10․26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산되고 말았던 것. 당연히 소송은 중지되었다.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관련 소송은 전국적으로 7건이었다고 한다. 영원한 무승부 사건. 앞으로 다시는 못 볼 판례로 기록될 것 같다. 당시 선관위 사무과장은 소송이 진행되자 이로 인한 스트레스였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처음 문제가 되었을 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질의하여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경험이 부족하고 시간에 쫒기다 보니 이런 일을 당하였다고 여러 번 허전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 나오는 소이(所以)이다.
장흥의 풍광과 인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한다. 장흥에 처음 오는 법조인에게 일종의 불문율이 있단다. 장흥가면 “물”을 조심하라는 것. 위생이 문제되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탐진강(예양강)의 은어의 감칠맛 뒤에는 기생충이 늘 뒤따라 다녔던 것. 부임 무렵 상수도가 완성되기는 했지만, 하도 많게 물조심 소리를 들은지라 물에 노이로제가 걸렸다고나 할까. 부인도 김치 담글 때 물을 끓였다가 식혀서 사용했을 정도. 칫솔질을 해도 끓인 물을 식혀서 사용했다고 하니 가히 장흥의 물이 법조계에서는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알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럴 필요 없었는데 하는 생각도 든단다. 그곳의 물을 먹고 사는 장흥인들의 인심을 느끼면서.
물 좋고 공기 좋아 너무 오래 살면 어쩔 것인지
1977년인가 1978년인가 가을철에 대법원 재판감사를 받았는데 후에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이영섭 대법관이 내려 오셨고, 재판연구관(조판사로 기억)이 동행하였다. 당시 장흥읍에서 유명한 한정식 식당 신덕관에서 저녁을 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환담을 하면서 즐겁게 웃고 놀았다. 그런데 후일에 들리는 얘기로는 재판연구관으로 동행했던 판사가 서울에 가서 오지 장흥에 사는 판사들도 웃고 살더라고 얘기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 그 당시 장흥이 얼마나 판사들이 근무하기를 꺼려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생활사의 한 장면. “신통교 교주”. 장흥 지원 근무시에 관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퇴근시간이면 자연히 동료 법관들 검사들과 어울려 다녔고, 그 공간 가운데 하나가 지금은 없어진 정원다방. 말석 판사인데도 나이가 많아 선배 검사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고 만나면 늘 예우를 해주었는데 다방에서 부를 마땅한 칭호가 없으니 본인의 성을 따서 모든 것이 통한다는 “신통교 교주”라고 당시 김〇세 검사[현재 인천에서 변호사로 활동중임]가 불러주었고 주변에서 어울림의 대명사로 부른 이름이라 한다.
장흥을 떠난지 30년이 넘어서 다시 장흥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생활하고 있다. 장흥에 아무런 연고가 없고 다만 30여년전에 근무하였다는 연고뿐이다. 장흥으로 내려가서 변호사를 한다고 하니 처가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엇이 걱정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물 좋고 공기 좋은데 가서 너무 오래 살면 어쩔 것이냐고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신지원 변호사는 1981년 순천지원 판사로 전임하였고 1986년 광주고법 판사, 1990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91년 광주지법 부장판사, 1992년 목포지원장을 지내고 1998년 변호사로 나섰다. 2001년 전남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2003년 전남도 행정심판위원, 2004년 전남도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장 2001년-2008년 전남대 법대 객원교수, 2009년부터는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2009.10.15 목요일 18:30-20:00, 장흥 운동장가든에서 면담하다. 김석중이 인사말, 김희태가 인터뷰하고 정리하다. 장흥지원지청100년사편찬위원장 김희웅, 징흥지원 판사가 자리를 함께 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자격 요건 등 관련 기사(경향신문 1978.04.28.) - 초임판사로 선관위원장을 맡았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출마자격 기간산정 건으로 피고석에 앉았다. 1심(고법)에서는 총무처, 국방부, 국립천문대 질의까지 동원해 승소했는데, 대법원에서는 민법의 ‘초일 불산입’의 원칙을 적용해 파기환송하여 1승 1패가 되었다. 그런데 10․26사태거 일어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산되어 소송이 중지되어 영원한 무승부가 되었다. 통대의원 출마자격 요건에 선거일로부터 3년간 당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선거일인 1978년 5월 18일 낸 탈당계의 기간산정 개시일이 5월 18일인가, 5월 19일인가에 대해서였다. 5월 18일로 본다는 선관위 과장의 해석에 따라 등록을 하고 후보자들(2인)은 이의 제기를 않기로 했는데, 실제 투표결과 5표(재검표) 차이가 나자 차점자가 소송을 제기해 선관위원장이 피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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