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00
중흥산성 쌍사자 석탑(雙獅子石塔)과 쌍사 석등(双獅石燈)
-<일제강점기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현지 조사와 외지 반출> 토론문, 2021-
김희태
<국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학술세미나(2021.12.16., 광양시 주최, 광양문화원 주관)의 한 주제인 <일제강점기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현지 조사와 외지 반출>(발표 황호균)의 토론자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자료를 찾다가 “중흥산성 쌍사자 석탑(雙獅子石塔)”과 “쌍사 석등(双獅石燈)” 문화재명을 보게 되었다. 먼저 “중흥산성 쌍사자 석탑(雙獅子石塔)”,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쌍사자석탑”이다. 소재지가 “경복궁”으로 되어 있으니 분명 “석등”을 말한 것 같은데 “쌍사자석탑”이다. 1960년 국보 지정 때 관보 고시문이다. 1960년 6월 2일부터 1962년 12월 20일까지는 실체가 잘못된 지정, 즉 지정 효력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지정일자를 1962년 12월 20일로 보아야 할까.
다음 “쌍사 석등(双獅石燈)”은 “쌍사자-쌍사”로 이해는 가지만, 이 또한 1962년 관보 고시문이다. 지금 같으면 “문화재명칭 변경 고시”를 했을 것 같은데, 변경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당시 토론문에 몇줄 덧대었다. <석등>과 <석탑>으로 약칭한다.
1960년 <석등> 국보 지정 - 中興山城雙獅子石塔
먼저, 문화재 지정의 과정에서 명칭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 자료를 살펴 보면서 약간의 혼란스러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등>과 <석탑>, 2종의 문화재가 명칭에서부터 혼란의 요소가 있었다. 그리고 지정의 시기도 혼란스러웠다. <중흥산성 석등>은 처음 지정할 때 <중흥산성 쌍사자 석탑(中興山城雙獅子石塔)>으로 고시문에 나온다. 『관보』(1960년 6월 2일자) 기록이다. 소재지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내”로 되어 있어 분명히 <석등>이 지정대상인 것은 맞는데 명칭이 <쌍사자 석탑>으로 표기하고 있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문화재 지정을 하면 고시를 한 날부터 지정의 효력이 발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1960년에는, 일제강점기 1934년에 제정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이 제헌헌법에 따라 계승되어 지정했다. 이때도 지정의 효력은 고시한 날로부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정의 효력이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석등> 국보 제546호, 국보 제103호
다음으로는 문화재 지정 시기에 관해서이다. <표1>에서 보듯이 <석등>은 1960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지정번호 546호와 103호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1960년의 “국보” 지정은, 지금처럼 “국보-보물”의 지정등급 구분이 없이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바꾸어 부르던 시기이다. 1955년경에 당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문화재를 전부 “국보”로 종별을 바꾸었다.
1934년에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은 <조선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으로 개정하여 시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2년 12월 19일「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임시보존위원회」가 문교부장관에 의하여 구성되었다가 1955년 6월 28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로 발족된다. 이때 기존의 ‘보물’을 ‘국보’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소재 문화재만 ‘국보’로 썼던 것에 비기면 의미상으로는 승격인 셈이다. 당시 419점이 국보가 된다. 다만, 관련 기록은 『관보』도 해당 부분을 확인할 수 없으며, 문화재청에도 문화재위원회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앞으로 이를 찾아야 할 것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제정되면서 기존 지정 내용을 기본으로 다시 지정 고시를 한다. 북한 소재 문화재는 제외하고 “국보-보물”로 분류하여 재지정하기 때문에 546호는 103호가 된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1930년대에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은 잘 못 알려진 것이다.
<석탑> 1935년 보물, 1955년 국보, 1962년 보물 지정
<중흥산성 삼층석탑>은 1935년에 처음 보물로 지정되었다. 1955년에 국보로 지정된 419점에 들었을 것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으로 재지정할 때 <중흥산성 3층석탑>으로 보물 제112호가 된다.
2010년에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한 문화재 명칭 부여 기준을 마련하여 한꺼번에 변경하는데, 소재지 행정지명을 포함한다는 기준에 따라 원소재지 지명인 “광양”을 넣어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103호),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보물 112호)으로 명칭이 변경 고시된다.
<표 1> 광양 중흥산성 <석등>과 <석탑> 문화재 지정 연혁
| 고시일 | 석등 | 석탑 | 출전 |
| 1935.05.24 | 中興山城三層石塔(보물 183) | 조선총독부 관보➀ | |
| 1936.02. 24 | 지정서 소재지 표기 오류 보고(전라남도지사→학무국장) |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 |
| 1955. | 中興山城三層石塔(국보-) | 대한민국 관보(미확인) | |
| 1960.06.02 | 中興山城雙獅子石塔(국보 546호) | 대한민국 관보➁ | |
| 1962.12.20 | 中興山城雙獅石燈(국보 103호) | 대한민국 관보➂ | |
| 1963.01.21 | 中興山城3層石塔(보물 112호) | 대한민국 관보➃ | |
| 1970.12. | 中興山城雙獅子石燈 | 지정문화재목록(문화재관리국) | |
| 2010.12.27 |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光陽 中興山城 雙獅子 石燈)(국보 103호) |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光陽 中興山城三層石塔)(보물 112호) | 대한민국 관보 |
<표 2> 광양 중흥산성 <석등>과 <석탑> 문화재 지정 고시 『관보』 내용

2010년의 명칭 변경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문화재보호법> 제3조 문화재보호의 기본원칙에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고 선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원형”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검토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원소재지” 최우선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지정 시점의 소재나 현황도 일종의 “원형”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문화재보호법>에 이 규정이 신설된 것은 1999년 1월 29일 법률 제5719호에 따른 개정 때인데 이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시행일은 1999년 7월 1일이다. 앞의 “원소재지”의 원형과 “지정시점”의 원형을 어느 때부터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석등>-<석탑>, 관련 자료의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또 한가지는, <석등>이나 <석탑> 관련 자료를 서로 비교하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자료 가운데 보물 제183호 <중흥산성 삼층석탑>의 소재지 지번 오류를 정정하는 문서가 있다. 1936년 2월 24일 전라남도지사(全羅南道知事)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學務局長) 앞으로 보낸 문서이다. 내용은 옥룡면 운평리 산22번지가 잘못 고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 도면까지 제시하고 있다. 운평리 산23번지 토지소유자인 경상북도 대구부 동운정(東雲町) 재등장치(齋藤長治) 소유의 납세관리인 이재영(李載永)이 보내온 자료에 1935년 6월 14일 지정서 통지문에 운평리 산22번지 소유자 변석태(卞錫泰)가 기재된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 고시는 운평리 산22-1, 산22-2번지이다.(➀) 이때 이후 소재지 변경 고시자료는 확인이 어려웠다.
“대구부 동운정”과 “이재영”은 발표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재등장치(齋藤長治)”라는 인물이 보인다. “소창무지조(小倉武之助)”, “이재영”과는 어떤 관계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총독부 문서상에 표기된 지번을 참조하여 구 토지대장을 통하여 소유자를 확인해 보았다. 구 토지대장 기록상 첫 소유자와 이후 변동사항을 표기하였다. 2021년 12월 8일 발급(발급인 광주광역시남구청장).
<표 3> 중흥산성 삼층석탑 소재지 일원 지적 지번별 소유자 변천
| 연 번 |
소재지 | 지번 | 지목 | 지적 | 소유자 | 토지 | 최초소유자(査定) | 소유인2 | 소유인3 | 소유인4 | ||||||||||
| 성 명 | 주 소 | 지목 | 지적 | 성명 | 주소 | 연도 | 성명 | 주소 | 연도 | 성명 | 주소 | 연도 | 성명 | 연도 | ||||||
| 1 | 옥룡운평 | 산23 | 임 | 28,463 | 국(산림청) | 林野 | 28,700 | 李潤○ | 용곡 | 1918(大正7).11.25 | 李載○ | 운평316 | 1929(昭和4).04.19 | 齊藤長治 | 대구부 東雲町69 | 1931.4.2 | 대한민국 | 1945.9.25 | ||
| 2 | 운평 | 산22-1 | 임 | 61,000 | 南 | 336 | 林野 | 124,600 | 卞錫○ | 1918(大正7).11.25 | 南相○ | 336 | 1970.06.29 | |||||||
| 3 | 운평 | 산22-2 | 임 | 53700 | 전남교육감 | 林野 | 63,600 | 卞錫○ | 1929(昭和4).08.10 | 光陽學校組合 | 1936.05.13 | 전라남도교육감 | 1991.08.29 | |||||||
| 4 | 운평 | 산21 | 임 | 35,438 | 李 | 林野 | 37,100 | 卞錫〇 | 1918(大正7).11.25 | 源本〇 | 1941.8.25 | 源本〇 | 378 | 1944.3.24 | 李性〇 | 1946.11.6 | ||||
| 5 | 운평 | 산17 | 임 | 55,000 | 崔 | 林野 | 55,000 | 崔成〇 | 1918(大正7).11.25 | 崔康〇 | 141 | 1971.6.29 | ||||||||
| 6 | 운평 | 산27 | 임 | 403,283 | 국(문교부) | 林野 | 411,160 | 小原〇 | 東京府 北豊島郡 | 1918(大正7).11.20 | 동경제국대학 | 1929.12.27 | 國 | 1964.4.29 | ||||||
| 7 | 운평 | 산28 | 임 | 10,551 | 李 | 林野 | 11,200 | 李起〇 | 1918(大正7).11.25 | 李基〇 | 380 | 1940.8.7 | 李錫〇 | 340 | 1973.2.20 | |||||
| 8 | 운평 | 산29 | 임 | 42,300 | 李 | 林野 | 42,300 | 鄭在〇 | 1918(大正7).11.25 | 鄭吉〇 | 338 | 1927.11.30 | 李基〇 | 380 | 1928.12.10 | 李錫〇 | 1977.5.6 | |||
| 9 | 옥룡추산 | 256 | 답 | 1,650 | 朴 | 林野 | 165평 | 朴奇〇 | 1914(大正3).12.25 | 韓圭〇 | 구례 간문 | 1915.5.6 | 李輔〇 | 광양 용강 | 1919.5.26 | 禹以〇 | 1930.4.25 | |||
대구부 동운정 69의 “小倉武之助”와 “齋藤長治”
<석등> 소재지 옥룡면 운평리 산23번지는 1918년 11월 25일 용곡(龍谷)이 주소이던 이씨[李潤○]가 최초 소유자로 나온다. 1929년 4월 19일에는 이재〇(李載○)이며, 1931년 4월 2일 대구부 동운정(東雲町) 69에 주소를 둔 제등장치(齊藤長治)에게 소유권이 이전된다. 1945년에 국유가 된다. 조선총독부 문서의 “재등장치(齋藤長治)”와 1931년 토지 소유자 “제등장치(齊藤長治)”는 같은 인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문서의 “소창무지조(小倉武之助)”의 주소도 대구부 동운정(東雲町) 69이다. 서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에 활동한 일본인 재등장치(齋藤長治)의 인적 사항이 일부 확인된다. 1907년에 천엽현(千葉縣) 경찰부 순사에 임명되었는데 1919년 9월 조선으로 건너와 전라북도 금산(錦山)경찰서장에 임명된다. 1920년 김제경찰서장, 1921년 전라북도 고등경찰과장, 1926년 12월 경시(警視)로 승진하여 경찰과장이 된다. 1928년 전라남도 경찰과장이 되고 1930년 4월 퇴직한다. 1933년 함경북도 경흥군 신안면장(新安面長), 나진읍장(羅津邑長)을 지내고 1935년 9월 부제(府制) 실시와 함께 퇴직한다. 이후 함경북도 나진부회(羅津府會) 부의장에 선임되어 1937년 12월까지 활동한다.
그런데 1925년 6월 5일 설립된 순천전기(順天電氣(株))의 사장이 소창무지조(小倉武之助)이고 중역(이사)이 증전정길(增田定吉), 재등장치(齋藤長治)가 확인된다. 이들은 순천전기의 대주주이기도 하였다. 이 회사는 전등 전력의 공급 기타 전기용 기계 기구의 판매 임대 및 그에 관한 설치장치 등의 공사 청부를 업종으로 하고 있다. 본점 주소는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동외리 73-3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의 한국근현대인물자료와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이같은 자료를 검토해 보면, 재등장치(齋藤長治)은 경찰과 면장, 의장을 지내면서 여러 정보를 축적하고 소창무지조(小倉武之助)와 함께 회사 운영에도 참여하거나 출자하면서 재력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정보와 재력이 <석등>의 반출을 시도한 한 요인으로 보인다.
*인지의 즐거움445까지 왔는데, 이 글은 인지의 즐거움300이다. 2021년에 글을 써 올린 줄 알고 있었는데 미결이었다. 이제야....



국보 546호 고시문 관보(1960.06.02. 중흥산성쌍사자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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