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443
1839년 늦은 봄, 가내마을 선비들 왕대골에 가다
김희태
1839년 이맘 때 쯤. 보성 가내마을 선비들 일행이 왕대골로 나들이에 나선다. 187년 전이다. 이 유람길에서 이기대선생(1792~1858)) 은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남긴다. 그 경관을 따라가 본다.
이 시는 1839년(己亥) 늦은 봄, 왕대동으로 답청(踏靑)을 가서 지었다. 한적한 산수 속에서 벗과 함께 마시는 술 한 잔이 곧 신선의 경지라는 것이다.
기해년 늦은 봄에 王臺골에 놀러가서 己亥暮春遊王臺洞
산에 들어 먼저 洞中의 하늘 보고 入山先看洞中天(입산선간동중천)
천천히 가는 길 몇번이나 강을 건넜나 行色逮遲幾渡川(행색체지기도천)
아름다운 돌 시내의 발자취 佳麗石蹊今古迹(가려석혜금고적)
소조한 초가집 아침 저녁의 연기 蕭條茅屋暮朝烟(소조모옥모조연)
千峯이 늘어섰고 꽃숲은 울창하고 千峯削立花林菀(천봉삭립화임울)
半壁의 층대 높고 風月이 달려있다 半壁層高風月懸(반벽층고풍월현)
한집에서 표연히 그대와 취하니 一閣飄然與君醉(일각표연여군취)
淸遊가 白雲타고 노는 仙과 멀지 않다 清遊不遠白雲仙(청유불원백운선)
시의 제목은 〈기해 모춘 유 왕대동(己亥暮春遊王臺洞)〉이다. 기해년이면 이기대선생 쉰 여덞살 때이다. 1839년 헌종 5년. 아들 소송 이지용(1825~1891)선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동행했다면 열다섯살 때이다.
모춘(暮春)은 늦봄, 음력 3월을 말한다. 향촌사회에서의 음력 3월은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 의례, 삼짇날을 중심으로 한 화전이나 답청 풍속, 선비들의 시회와 유람, 마을 공동체 놀이가 어우러진 봄맞이 문화의 시기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대부나 유생들이 자연을 유람하며 시문을 교유하는 문화가 활발했다. 이기대선생의 시는 명승지로 나가는 답청 유람(踏靑遊覽)이자 시회(詩會)였을 것 같다. 차운(次韻)·분운(分韻) 방식으로 운자를 정해 돌아가면 시를 읊었을 것이다. 봄철이니 꽃을 소재로 한 시문도 지었을 것 같다.
차운(次韻)은 다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는 것이다. 분운(分韻)은 운자(韻字)를 정하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집어서 그 잡힌 운자로 한시를 짓는 일이다.
이 유람 시회에서는 술과 음악이 곁들여졌을 것이다. 그 술은 막걸리였을까. 무더운 여름을 탈없이 날 수 있다 해 과하주라 이름붙인 강하주로 미리 적시지는 않았을까. 삼해주도 있었을까.
왕대동(王臺洞)은 지금의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왕대마을인듯하다. 왕대동은 고려 공민왕이 피난하여 주필(駐蹕)하였기 때문에 ‘왕대(王臺, 旺垈)’ 또는 ‘유경(留京)’이라 했다고 전한다. 왕대동에는 옥천조씨 초연정 원림이 있다.
1836년(헌종 2, 계사)에 옥천조씨 청류헌(聽流軒) 조진충(趙鎭忠, 1777~1837)이 그의 5대조 옥봉(玉峯) 조제형(趙濟亨, 1640∼1700)의 고반지지(考盤之地)인 모후산 아래 왕대마을에 제각을 건립했다. 1898년(고종 25, 무술) 3월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강론하면서 초연정(超然亭)이라 정명을 지었다.
초연정원림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는 내원과 정자를 휘어 감는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계원과 전면에 펼쳐지는 모후산의 전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일원 계곡과 원림은 당대 보성·순천 일대 문인들의 유람 공간이었다. 이기대선생생이 유람할 때에는 시에서 보듯이 소조(蕭條)한 모옥(茅屋)의 재각이 있었다.
1구에서 입구에서 곧바로 ‘하늘’을 본다. 골짜기가 트여 있고 산세가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별천지(別天地)에 들어섰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2구는 답청의 느린 걸음은 급할 것 없는 유람인의 자세이다. ‘몇 번이나 건넜는가’라는 반문은, 현실 세계에서 점차 멀어져 깊은 산수로 들어가는 심리적 이동을 드러낸다. 3구는 ‘금고(今古)’라는 표현을 통해 공간을 역사화한다. 왕대동은 단순한 경승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찾았던 문인들의 유서 깊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4구에서는 웅대한 산수와 대비되는 소박한 초가집을 통해 은일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인위적인 꾸밈이 없는 삶의 정취라 하겠다.
5구의 ‘삭립(削立)’은 산세의 험준함을, ‘울(菀)’은 생명의 충만함을 보여 준 것 같다. 늦봄의 만개한 산수자연이 시각적으로 펼쳐진다. 6구는 산의 절벽 위에 바람과 달빛이 걸려 있다[風月懸]는 것은 회화적인 표현이다. 자연 자체가 하나의 정자(亭子) 원림처럼 느껴지는 경지를 드러낸다. 7구의 ‘여군(與君)’은 함께 유람한 일행을 말한다. ‘표연(飄然)’은 속세를 떠나온 한가로움, 신선적(神仙的) 초탈감을 나타낸다. 8구 결구는 이 유람을 신선 세계에 비견한다.
이 시는 칠언율시로 전형적인 산수유람 구조이다. 기(起) 입산, 승(承) 경물 관찰, 전(轉) 장대한 산세, 결(結) 신선적 상승이며 평성 운 사용으로 전체 분위기가 유연하고 맑다고 하겠다. 7구에서 ‘여군(與君)’이라 하여 일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일행들은 누구누구였을까. 그들이 남긴 글이 있지 않았을까. 그날 시회에 참여했던 가내나 왕대동의 선비들이 남긴 시가 있다면, 이기대선생 저 시의 운자 天(천), 川(천), 烟(연), 懸(현), 仙(선)을 읽을 수 있을까.
그때 그들의 옷매무새는 어땠을까. 가내마을에서 지고 매고 가져간 음식은 무엇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가내에서 맛볼 수 있을까. 왕대동 현지 선비들도 음식을 마련했을 것이다. 여름 더위를 잘 넘기기 위해 미리 마신 과하주. 그해 여름 날씨는 어땠을까. 이런 저런 생각. 하여 기록이나 자료찾기는 이어진다.
*이기대선생의 시 「己亥暮春遊王臺洞」는 『가은실기(可隱實紀)』에 실려 있고, 국역본은 『가천세고(可川世稿)』(67쪽.)에 있다. 『가은실기』는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동산도서관, 조선대중앙도서관, 전남대도서관, 경기대도서관, 용인대중앙도서관, 하버드대학옌칭도서관, 연세대학술정보원, 모덕사(慕德祠, 충남 청양)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글은 천상재 인문아카데미 강의 자료로 정리하고 있는 내용 중 일부이다.
-강의 주제 : 「고문서와 문집을 통해 읽어 보는 가내[可川]마을」(강사 김희태)
-일시 장소 : 2026.08.19. (수) 14:00. 보성 가내마을 천상재.
*천상재 인문아카데미 강좌 준비차 2026년 4월 27일 가내마을 나들이에 나섰다. 음력 3월 12일이었다. 가내선비들이 왕대동 유람을 했을 쯤이다. 망일봉 산림욕장 언저리에서 주암호에 건너로 펼쳐진 무등산도 조망하였다. 귀한 말씀과 함께 자료를 제공해 주신 이남섭님, 이상영님, 위승환님께 감사드린다.


"꽃피는 봄날에 나들이 한번 하지요." 2월에 천상재 인문학당 강의(2026.08.19). 요청이 왔을 때 사전 답사 겸 자료 수집차 얘기했는데, 꽃이 만발한 4월 27일 가내마을을 한바쿠 돌았다. 음력으로 3월 12일. 이기대 선생 등 보성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 선비들이 왕대동 유람할 무렵과 시절이 엇비슷하다.

가내마을 전경. 마을 앞의 세적비, 가천정, 박사마을 비, 당산나무, 가은당 등 서재필선생 생가, 성주이씨 종가, 천상재, 가내천, 망일봉 하 산림욕장 등 곳곳을 돌아 보았다.

왕대동 계곡 - 187년전 가내 선비들도 저 맑은 물에 시심을 띄웠으리라 (2007.02.20.)
'인지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지의 즐거움445 - 『장흥문화』, 8호부터 이어진 인연 47호에 이르다 (1) | 2026.05.10 |
|---|---|
| 인지의 즐거움444 - 흐르는 탐진강 세월을 보듬고-장흥 지원 지청 100년사- 편집후기, 2009. (0) | 2026.05.10 |
| 인지의 즐거움442 - 쌍봉사 존상의 미소와 사찰 폐단의 혁파 -전라도 능주 쌍봉사 교폐(矯弊) 절목- (0) | 2026.04.23 |
| 인지의 즐거움441 - 어부의 피리소리에 푸른 마름이 찰랑거리네, 시서 김선 (1) | 2026.04.18 |
| 인지의 즐거움439 - 창파에 저녁바람 급해지리니, 백호 임제 (0) | 2026.04.01 |